퇴계 선생의 인생론

"사람답게, 그리고 나답게" 충만한 理의 세계, 모두가 소중하다

205호 (2016년 7월 lssue 2)

Article at a Glance 

‘나’라는 개체가 사람으로 태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성층권위에서 바늘 하나를 떨어뜨려 작은 색종이 위에 정확하게 꽂힐 확률 정도일지도 모른다.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너무나 당연한 듯 주어져 있는 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넘기지 않고 진지하고 깊이 있게 사색하고 성찰하는 게 철학이라는 얘기다. 이 땅의 위대한 철학자였던 퇴계 이황 선생도 세상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끝없이 사유하고,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 알고 그대로 살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다. 퇴계 이황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의를 공유하는 하나인 존재인 동시에 제각기 다른 모습과 다른 일을 하며 전체의 조화에 참여하는 존재다. 누군가를 똑같이 따라하고 완전히 닮으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나다움을 긍정하고 사람다움에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이라는 기적과 철학의 시작

 

우리는 사람이다. 호모사피엔스의 형상을 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 그 종의 특성대로 살아간다. 직장을 다니는사람은 오늘도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출근해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쉬고 잠을 잔다. 가끔 골프도 치고 술도 마시며 여행도 가고 문화생활을 즐기기도 한다. 필자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닌, 우리의 일상이며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과연 이 일들이 정말로 당연할 것일까?

‘나’라는 개체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사람은 지구상의 생물 개체 중 몇 퍼센트나 차지할까?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의 수를 대략 60억 명이라고 치자. 아마도 지구상에는 우주상의 별들만큼이나 많은, 혹은 그 이상의 생물 개체가 살고 있을 것이다. 정말로 셀 수 없는 수의 개체가 이 지구상에존재하고 있을 텐데 그 생명체 중에서 사람은 고작 60억 명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부모 사이에서 다른 이가 아닌가 수정돼 태어날 확률은 또 얼마인가? 이렇게 본다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어쩌면 성층권 위에서 바늘 하나를 떨어뜨려 작은 색종이 위에 정확하게 꽂힐 확률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이라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매우 극적이고 특수한 일이다.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너무나 당연한 듯 주어져 있는 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넘기지 못하고, 진지하고 깊이 있게 사색과 성찰을 더한다. 이 세계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과 만물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철학의 질문이다.

 

 

 

 

사실 이 물음은 철학자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품을 수 있고 또 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 존재의 의미에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소위 철학자나 철학 연구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존재와 삶의 의미를 묻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내려는 노력, 그것은 호모사피엔스의 형상을 가진 존재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숙제일지도 모른다.

 

다만 오늘날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일쑤다. 이러한 생각은 이내딴생각’ ‘쓸데없는 생각으로 치부된다. 학생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성적은 미끄럼틀을 탈 테고, 사회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금방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 자세와 세상에서의 일이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성찰 없이는 진정한 삶의 성공을 성취해낼 수 없다.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자. 삶에서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이뤄낸 인물은 이 질문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될 것이다. 눈앞에 주어진 일에 쫓기지 않고, 넓고 긴 안목으로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조력(觀照力)이 진정한 삶의 성공과 행복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진리는 결국 하나지만 진리를 향해 가는 길은 다양할 수 있다. 마치 목적지에 가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의 선택지가 여럿인 것처럼, 진리에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진리 자체는 절대적이지만 그것을 찾는 길은 어느 하나가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각자가 처해진 상황, 그리고 자신의 성향에 맞는 길을 택해 그 길을 갈수 있도록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주는 길은 고르게 펼쳐져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에게 길을 묻는 시간을 갖기로 하자. 우리 땅, 우리 문화 안에서 철학을 하신 분이니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 세상은 무엇인가

 

먼저 퇴계의 세계관을 살펴보자. 퇴계는 이 세계를 어떤 눈으로 바라봤을까? 퇴계는 유학자이며, 그중에서도 주자학의 맥을 이어받은 성리학자다. 따라서 퇴계의 세계관을 엿보기 위해서는 번거롭지만 리기론(理氣論)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 ()니 하는 촌스러운(?) 옛날 용어는 벗어던지고 세련된 현대어로 바꾸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 아직 필자는 그런 능력이 되지 않는다. 다만 독자들의 졸음을 유발해서는 안 될 테니 최대한 쉽고 친절하게 해석해 보고자 한다.

 

유학의 전통은 자질구레와 구질구질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어와 개념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나 물고기를 잡는 통발과 같은도구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한 분석보다는 직관적 이해를 중시한다. 그래서 용어와 개념은 다양하게 분화되지 않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 가령 공자가 사람의 사람다운 속성, 남을 사랑하는 마음,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따뜻한 사회 등과 다양한 층차의 의미를 인()이라는 한 글자로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리학에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은 리()와 기()뿐이다. 성리학은 리와 기라는 두 개념으로 이 세계가 생성되고 운행되는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다.

 

“천지 사이에는 리가 있고 기가 있다. 리는 형이상의 도()로서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다. 기는 형이하의 물질로서 만물을 낳는 재료이다.” 1  리가 있으면 반드시 기가 있으니 나누어서 말할 수가 없다. 세상 모든 것이 리이고 모든 것이 기이니, 어느 것인들 리가 아닌 것이 있으며, 어느 것인들 기가 아닌 것이 있으랴?” 2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에게 세상은 무엇으로 돼 있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세상은 리와 기로 돼 있다. 그러나 리 따로, 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리와 기는 함께 있다. 세상은 전체가 하나의 리와 기의 조합이며 각각의 사물도 또한 하나의 리와 기의 조합이다.” 이게 무슨 선문답인가?

  

 

쉽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기에 대해 생각해보자. 첫째로 형체와 질량을 가진 현상계의 모든 물질은 기이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만이 기는 아니다. 가령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도 당연히 기이며, 아무것도 없는 진공도 또한 기다.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공기의 흐름, 이런 것들이 모두 기다. 즉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모든 입자와 파동, 양자 같은 것들이 모두 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는 물질이라기보다는 에너지라고 하는 편이 가까울 것 같다. 그리고 기에 해당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작용들, 즉 생각, 의지, 감정, 기억들도 모두 기다. 물론 그것은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주자는 그것을 기의 정상(精爽)이라고 했다.그러니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생각되는 모든 것들은 기다.

 

그렇다면 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 리는 어디에도 없다. 리는 우리가 보지도, 듣지도, 심지어 생각으로도 집어낼 수 없는, 어디에도 없는 무()이다. 그런데 없는 것은 아니다. 주자나 퇴계는 리는 없는 것이면서도 있는 것, 지극한 무이면서 지극한 유(至無而至有)라고 했다. 이것은 또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리가 없다는 것은 물질과 같은 양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이다. 리는 기가 생성되고 운행될 수 있는 원리이자 그 존재의 근원이다. 근원이자 원리인 리가 없으면 당연히 기도 없다. 원리가 없는데 어찌 그 사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가령 연필이 있다면 그것이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원리가 있다. 나무가 한 그루 있다면 그것이 싹트고 자라고 시들어 죽는 원리가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고 죽고 자손을 이어가는 것도 그러한 원리가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고, 이 우주가 있는 것도 바로 우주가 생성·운행·소멸되는 원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현대적 감각으로 말하자면, 리는 사물의 운용법칙인 물리(物理), 생체의 원리인 생리(生理), 마음의 작용 원리인 심리(心理), 그리고 사람의 도덕 원리인 윤리(倫理)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러한 것들이 없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리는 확실하게있다.’오히려 없는 곳 없이 어디에나 편재한다. 다만, 인간이 정리해 놓은 물리, 생리, 심리, 윤리와 같은 것은 그 자체가 리가 아니라는 점은 짚어두자. 리는 이론이나 생각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파악하고 정리해 놓은 그와 같은···윤리들은 지극한없음이자있음인 리의 단면을 우리가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해 놓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다른 개념이 떠오를 것이다. 바로 신(, God)이다. 사실 성리학에도 신의 개념은 있다. 다만 서양 종교의 인격신의 개념과는 다르다. 유학에서는 그 의미가 한정된다. 퇴계의 말을 들어보자.

 

“형상의 측면에서 보면 하늘()이라 하고, 그 성격의 측면에서 말하면 건()이라고 하고, 만물을 주재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상제(上帝)라고 할 수 있으며, 현상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귀신(鬼神)이라고 하고, 신묘함의 측면에서는 신()이라고 칭한다.”  3

 

리는 다른 말로도 표현 가능하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리이기 때문에 하늘이라고 하고, 그 속성은 쉼 없이 강건하기 때문에 건()이라고도 하며, 만물의 주재자가 된다는 의미에서 은유적으로 상제라는 인격신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자연 현상으로 드러나는 신묘한 작용이라는 의미에서 신()이라고도 한다. 리는 이러한 의미를 모두 포괄해 한 글자로 표현해놓은 개념인 것이다.’

 

이 존재의 원리는 각각의 사물이나 개체에도 있지만 세상 전체에도 하나의 큰 리가 있다. 여기서 개체의 리는 전체의 리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마치 크리스트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와 비슷하다. 리는 둘이 있을 수 없다. 개체의 리가 바로 전체의 리이고, 전체의 리가 또한 개체의 리이다. 리는 내 것과 네 것, 전체와 부분이 나눠지지 않는다.

 

나에게 있는 것도 이 우주의 리이고 그 사람에게 있는 것도 이 우주의 리이며, 고양이 한 마리,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 있는 리도 모두 이 우주의 리이다. 그래서 리의 측면에서 보면 우주는 하나이고 만물은 동체가 된다. 리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지극한 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리는 지극히 비어 있으면서 지극히 꽉 차 있고, 지극한 없음이면서도 지극한 있음이며, 움직이면서도 움직임이 없고 고요하면서도 고요함이 없는 정결한 것이라, 털끝만큼도 보탤 수 없고 털끝만큼도 덜어낼 수 없다. 음양, 오행과 만사, 만물의 근본이 되면서도 음양, 오행과 만사, 만물 안에 갇히지 않는다.”4

 

그렇기 때문에 리와 기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별개의 사물이 아니다. 리는 무시간·무공간, 즉 영원 무한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리는 존재하며 역사(役事)하고 있다. 어떻게? 바로 이 기의 세계를 통해서다. 리는 기와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시시각각 기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도()는 일상의 모든 곳에서 작용하면서 도처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디라도 리가 없는 곳이 없으니, 어디에서든 공부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경각의 시간도 멈추지 않아 찰나라도 리가 없는 때가 없으니, 언제인들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5

 

그러니 퇴계의 세계관에서 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영원 무한한 리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리다. 이 세계는 리 그 자체이다.” 종교적 표현으로 번역해보면 이렇다. “이 세계는 하느님(혹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뜻에 의해 운행되는, 하느님의 뜻 그 자체이다.”

 

만물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사람을 포함한 세상의 만물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됐을까? 그냥 우주의 원리 또는 신의 섭리에 의해 그렇게 생겨났다는 식으로 포괄적으로 말하고 끝내 버린다면 그것은 종교지 철학이라고 할 수 없다. 철학은 구체적인 답을 내어 놓아야 한다. 성리학은 철학이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과 만물의 생성에 관한 정합적 이해 방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현대과학의 정밀한 방법과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렸다고 할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방식이 다를 뿐이니 한번 참고해 보자.

 

리기론에 따르면 세상 만물의 근원은 리지만 재료는 기다. 사람 역시 당연하게도 기로 만들어져 있다. 기가 아니라면, 사람뿐만 아니라 만물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기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실질적 존재가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있다는 것은 반드시상대성을 전제하게 돼 있다. 동일한 것의 나열만으로는 물질의 존재는 불가능하다. 물질의 존재는 반드시 상대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

 

큰 것이 있기 위해서는 작은 것이 있어야 하고, 밝은 것이 있기 위해서는 어두운 것이 있어야 한다. 대소(大小), 장단(長短), 명암(明暗), 흑백(黑白), 정조(精粗), 미추(美醜), 이러한 모든 것들은 상대되는 것이 있기에 그것에 서로 의존해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상대개념을 종합적으로 집약한 개념이 음양(陰陽)이다.

 

물질은 음과 양의 두 상반된 성질을 가진 기를 재료로 해 생성된다. 음과 양은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 음의 성질 속에 양이 들어 있고, 그 속에 또 음이 들어 있고, 또 양이 들어 있는, 무한한 경우의 수를 가진 음양의 향연으로 물질은 생성된다. 가령 물은 음의 성질을 가진 물질이고 불은 양의 성질을 가진 물질이다. 그러나 단순히 물은 음이고, 불은 양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의 맑음은 양의 성질 때문에 있는 것이고, 불의 중심에는 음의 성질을 가진 요소가 있다. 이렇게 음과 양의 무궁무진한 조합이 만물을 생성해낸다고 하는 것이 전통적 유학의 사유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물질적 존재는다름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만물은 음양의 서로 다른 다양한 조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니 애초에 다를 수밖에 없다. 동물과 식물은 다르고 동물과 사람 또한 다르다. 식물이나 동물도 그 종류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종이 존재한다. 또 같은 종류 안에서 각각의 개체 역시 모두 다 다르다. 바로 기의 다양성 때문이다.

 

당연히 사람도 모두 다르다. 생긴 것이 다르고 성격과 성향, 재능과 능력의 정도도 모두 다르다. 다양하기에 세상은 재미있고 아름다운 곳이며, 그 다양성 덕에 더 조화로울 수 있다. 다양하지 않다면 물질의 생성 자체가 없었을 것이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단조롭고 밋밋해 재미없는 물질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한 것은 서로 억지로 같아지려 하지 말고 다양성의 조합을 즐기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원래 생겨 먹은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다름의 향연의 배후에는 하나의 진리, 즉 리가 있다. 이 하나의 리가 이 물질 세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땅강아지나 개미, 기왓장과 벽돌, 심지어 똥오줌 속에도 도()가 있다고 했던 장자(莊子)의 말처럼6 이 세상 모든 것은 리의 현현이다. 세상 만물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존재이다. 리의 차원에서 보면 모두는 하나이고, 기의 차원에서 보면 다르다. 그러니 인간을 포함한 세상 만물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의 존재 의미

 

만물은 제각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리에서 근원했다는 말은 이런 의미다. 즉 만물은 각자 자기에게 부여된 형상대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주의 운행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소나무는 소나무의 모습으로, 대나무는 대나무의 모습으로, 소는 소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도를 실현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천지 사이에 리는 하나지만 기는 수만 가지로 다르다. 그 리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지만, 그 기를 논하면 만물이 나누어져 각각 다른 기를 가졌다. … 그렇다면 대개 만물이 리와 기를 받아 생겨나면서 그 본성은 차이가 없지만, 기는 치우침()과 바름()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이 날 때 음양의 바른 기운을 받은 것은 사람이 되고, 음양의 치우친 기를 받은 것은 만물이 됐다.”7

 

퇴계에 따르면 인간은 여타의 만물들과 다른 존재이다. 사람이 여타 존재와 다른 것은 재료가 되는 기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좋은 기만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최고급의 도자기가 최고급의 흙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사람은 음양오행의 기 중에 가장 빼어난 것을 재료로 하여 태어난 가장 영명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에 대해 이러한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유학사상이 인간의 우월의식과 타 존재에 대한 지배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우월성을 부여하지 않아도 이미 인간은 타 존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고작 인간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타 존재와의 비교를 대서특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마치 다 큰 어른이 어린이를 상대로 나이나 지식을 자랑하는 것과 같은 쓸데없는 바보짓일 뿐이다.

 

그렇다면 굳이 사람을 타 존재와 비교해서 우수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바로 세상과 만물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책임이다. 가령 식물은 그냥 땅에 뿌리를 박고 서서 때에 맞게 수분을 흡수하고 광합성을 하면 된다. 동물은 죽지 않도록 밥을 먹고 종족보존을 하면 된다. 즉 개체의 생명을 지키고 자손을 보존하는 것, 그것뿐이다. 사람은 그것으로 족하지 않다. 사람이란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꾸려야 한다. 그 삶은 자기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 나아가 만물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이라는 이름의 무게는 한없이 무겁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타 존재를 압도해 그것을 이용하고 착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라는 것이다. 그 의무란 무엇일까? 간단하다. 바로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호모사피엔스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보통 우리는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람다운 삶

 

그렇다면 사람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이 세상에 온 까닭은 무엇일까? 각 종교는 여기에 대해 명쾌하게 대답해준다. 크리스트교라면하느님(혹은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라고 할 것이고, 불교라면 성불(成佛)과 중생 구제를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학사상에서는? 물론 전혀 다를 바 없다. 명명덕(明明德), 사람의 밝은 덕을 이 세상에 밝히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이 땅에서 진리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진리라니?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세상, 어느 세월에 진리를 찾고 앉아 있을 겨를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바로 머리를 스칠지도 모른다. 혹 이 말에 동의한다 해도 난관은 있다. 진리를 얻고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세속을 떠나 어딘가에서 수련하며 용맹정진해야 하지 않을까? 물욕을 완전히 끊고 세속적인 즐거움도 돌같이 봐야 하는 것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진리를 실현하는 것은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역대의 유학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해온 종지(宗旨).

 

 

 

 

진리를 얻는다는 것은 어떤 거창한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유학에서 진리를 얻은 삶은 매우 간단하다. 하늘이 부여한 사람의 본성이 있으니 그 본성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성즉리(性卽理), 사람의 본성이 다름 아닌 리()이니 본성대로 사는 것이 바로 진리를 실현하는 길이다. 이는 대나무가 대나무의 본성대로, 개가 개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개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개가 가장 개다운 것처럼 사람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사람답다. 개의 본성을 습득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사람답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사람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유학자들은 사람의 본성을 인의예지(仁義禮智)로 봤다. 인의예지 또한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남을 아끼고 사랑하며(), 해야 할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으며(), 진심으로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옳고 그름을 명확히 판단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외재적으로 규정되거나 규율된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본래 있던 본성이다.

 

그것이 본성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질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을 접하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깜짝 놀라고 안타까워하는 측은지심이 드는데, 이 측은지심이 바로 남을 사랑하는 인()이 우리의 본성으로 내재돼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오늘날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지구 반대편에서 생긴 총기난사나 테러사건에 희생된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는 측은지심, 그리고 그 가해자에게 분노하는 수오지심은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저절로 드러난 도덕감정이다.

 

반대로 사람이 본성을 거스르면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곧바로 알게 된다. 우리가 마음으로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나의 본성을 거스르고 있다는 신호다. 이는 마치 우리가 몸의 작동 원리에 거스르는 짓을 하면 몸이 불편함을 느끼고 병이 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누가 보지 않더라도 나쁜 짓을 하면 마음이 쪼그라드는 듯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고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처벌이나 비난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나의 본성을 어겼기 때문이다.

 

맹자는 온 천하를 소유하고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의 즐거움도 본성대로 사는 삶의 즐거움에는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라 했다. 본성대로 사는 사람을 유학자들은 성인(聖人)이라고 했고, 퇴계 또한 그것이 필생의 목표였다. 성인이라고 하면 무언가 멀리 있는 것처럼,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퇴계가 꿈꾼 성인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단지 일상 속에서 인의예지의 본성을 어기지 않는 사람, 즉 사람다운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나다운 삶

 

인의예지의 본성대로 사는 사람다운 삶은 그 사람 개인에게는 편안함과 행복을 줄 것이며, 사회 전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실현하는 우주적 진리, ()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유학사상의 천언만어는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인의예지의 본성을 회복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점으로 집중된다.

 

그러나 인의예지만이 전부는 아니다. 리의 측면에서 사람은 모두가 같은 존재이지만 기의 차원, 그러니까 개인의 차원에서 사람은 각각 다른 존재이며 또 달라야 하는 존재이다. 같기만 해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화이부동(和而不同), 모두가 다 다르되 조화로워야 한다. 마치 제각각의 소리를 내는 악기들이 모여 오케스트라가 되듯 말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사는 것만큼 나답게 살 것이 요구된다. 나다움은 나의 또 하나의 본성이다. 개인의 타고난 기질이 모두 다르기에 유학에서는 그것을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했다. 기질지성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연지성(本然之性)과 대비되는 개인의 기질적 경향성이다. 혹자는 이 기질지성을 불안하고 나쁜 것으로 보지만 퇴계는 그렇지 않았다. 기질지성도 하늘이 내려준 소중한 본성이다. 그 기질지성에 맞게 살아가는 것, 그것도 나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숙제인 것이다. 다만 기질지성이 행패를 부리지 않기 위해서 본연지성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 이것이 퇴계가 본연지성에서 발한 감정인 사단(四端)을 기질지성에서 발한 칠정(七情)과 차원이 다른 감정으로 봤던 이유다.

 

퇴계는 스스로 나답게 살기에 충실했다. 물러날 퇴(退)자를 자신의 호()로 삼을 정도로 퇴계는 관직에서 물러나서 고향으로 내려가 자연을 벗 삼아 살기를 원했다. 퇴계가 물러나기를 그토록 간절히 원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의 사직서에서는 항상몸이 약하고 재주가 모자라서라는 이유를 대지만 진짜 이유는 그것이 본인의 기질에 맞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퇴계는 관직을 버리고 자연인으로 사는 것을 자신의 분수 또는 본분이라고 했다. 본분에 맞지 않는 일, 나답지 못한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보수가 좋고 남들에게 그럴 듯해 보이더라도 축복이기는커녕 재앙이다. 물론 분수나 본분이라는 말을 오해하거나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 분수는 타인에게 강요하는 데 쓰이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다. 퇴계는 이 말을 자기 자신에게만 사용했고, 타인을 대상으로는 하지 않았다.

 

 

작은 재주로 높은 재주 사이에 끼어 있었음이

스스로 부끄러웠고 / 自?菲才厠盛才

몸은 물러나고 이름만 남아 있으니 또 남들이

시기하더라 / 名班身退又人猜

지금에야 부끄러움도 시기도 떨쳐버렸음이

믿어지니 / 只今可信無猜?

물고기 새 무리 속에 노닐며

우두머리가 되리라.8  / 魚鳥?中與作魁

 

퇴계는 항상 관직에서 자유롭고자 했지만 나이가 들고 학문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자유롭기 어려웠다. 조정에서는 그를 자유롭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벼슬은 끊임없이 주어졌고, 때로는 실제로 조정에 있지 않더라도 조정에서는 여전히 직함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었다. 일례로 65세 때, 귀향해 있는 동안에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이름이 여전히 남아 있자 퇴계는 그 직함을 거둬줄 것을 요청했고, 여러 번 간청한 끝에 조정으로부터 허락이 떨어지자 매우 기뻐했다.

 

이렇게 관직을 싫어한 퇴계였지만 자제들이나 제자들에게는 과거를 보고 관직에 나아갈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높은 재주를 가진 제자에게는 더더욱 적극적이었고, 중앙관직에 나아갈 성향이 아닌 제자들은 지방의 작은 관직을 얻기를 바랐다. 모두가 나답게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나다움은 누구도 나에게 가르쳐주거나 인도해주지 못한다. 나다움을 찾아서 나답게 사는 것은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서 다시금 배움의 중요성이 떠오른다. 스스로 나답게 사는 인생의 길을 찾아 나선 사람이라면 결코 배우지 않고는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퇴계의 인간학이 현대에 주는 메시지

 

우리는 왜 여기 있을까? 우리는 왜 사람일까? 왜 식물처럼 발을 땅에 뿌리박고 있지 않으며, 왜 동물처럼 네 발로 걷지 않을까? 우리는 어쩌다가 언어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어쩌다가 지식을 습득하고 사고를 하는 능력을 가지게 됐을까? 주체와 객체는 왜 있으며, 너와 나는 왜 구분이 가는 존재가 됐을까? 퇴계 역시 이러한 질문을 품었을 것이며,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평생을 배우고 사유하고, 또 배우고 사유했을 것이다. 그렇게 내린 결론이 위와 같다. 사람은 하늘의 섭리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섭리를 실현시킬 책임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스스로 그 길을 걸었다.

 

퇴계는 평생을 학문과 교육에 헌신했고 수많은 제자들을 남겼다. 직접 퇴계의 손을 거쳐 간 제자만 해도 300명이 넘고,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학자들은 셀 수도 없다. 거기에는 속하지 않지만 특이한 제자가 한 명 있다. 퇴계도 그를 알지 못했고, 그 또한 퇴계를 알지 못했지만 놀랍도록 똑같은 사상을 펼쳤던, 퇴계 사후 반세기나 지나서 태어난 지구 반대편의 인물,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 1632∼1677). 스피노자는 자신의 역작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연 안에서는 자연의 잘못으로 여길 만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9 퇴계의 세계관과 인간관을 정확히 집약해주고 있다.

 

우리 모두는 자연이다. 그것은 리와 기의 오묘한 향연으로 이뤄진 신비의 세계다. 온 우주를 지배하는 하나의 리가 물질로 드러난 것이 바로 이 세상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는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버려야 할 것도 없다. 우리는 하나의 리를 공유하는 하나인 존재인 동시에 제각기 다른 모습과 다른 일을 하며 전체의 조화에 참여하는 존재다.

 

 

 

사람은 같으면서 다르다. 사람이라는 점은 같고, 나라는 개인은 모두가 다르다. 나라는 존재가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 나는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답게, 그리고 나답게 살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인의예지라고 하는 보편적인 본성을 누구나 가지고 태어났고, 그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것이 나의 행복과 사회의 안녕에 직결된다. 그리고 모두가 다른 개별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나만의 나다운 길을 찾아 나서기를 재촉한다. 사람은 사람다움과 나다움, 이 두 기준을 가지고 인생을 스스로 경영해가야 하는 존재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갈 길은 명확하다. 세상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사람으로서나답게살아가면 된다. 예수나 석가모니를 믿는다고 해서 예수나 석가모니처럼살 필요는 없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세종대왕이나 퇴계를 존경한다고 해서 그처럼살 필요도 없고 역시 그럴 수도 없다. 넬슨 만델라같은정치인이 되거나 정주영 회장같은기업인이 되는 것도의 길일 수는 없다. 그분들의 삶은 그것이 이 세상 안에서 가장 그분들다운 삶이었을 뿐이다. 나는 가장나다운삶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나다움을 긍정하고 사람다움에 충만한 삶을 살 때 지금에게 주어진 것들, 내가 가진 것들 중에는 어느 하나 잘못된 것이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나의 외모, 성격, 재능, 취향, 무엇 하나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정말로 고귀한 존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한없이 소중한 삶을 살고 있다.

 

 

 

이치억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 연구교수 muhayu@daum.net

 

필자는 퇴계 선생의 17대 종손(차종손)으로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나고 자라면서 유교에 대한 반발심으로 유교철학에 입문했다가 현재는 유교철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성균관대 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성신여대 동양사상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성균관대·동인문화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19호 New Wave of Logistics 2021년 04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