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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Z Consulting

기술적 모순 걷어내는 통찰의 한 문장

송미정 | 76호 (2011년 3월 Issue 1)

편집자주 트리즈(TRIZ)는 창조적 문제 해결 이론(Theory of Inventive Problem Solving)을 뜻하는 러시아어 ‘Teoriya Resheniya Izobretatelskikh Zadatch’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말입니다. 모든 발명 과정에는 공통되는 법칙과 패턴이 있다는 믿음 하에, A분야 문제에 대한 해법을 B분야에서의 문제 해결책을 참조해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TRIZ입니다. 쉽게 말해재발명을 통한 문제 해결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년간 TRIZ 컨설팅 외길을 걸어 온 송미정 박사가 TRIZ를 활용해 현장에서 부딪힐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전 솔루션을 제시합니다.

이 공정은 액체가 생명입니다. 액체가 모든 기능 수행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이 액체는 점도가 높은데 그 성분은 극비 사항입니다. 이 액체는 파이프를 통해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이동합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액체가 제대로 흘러가지 않고 중간에 굳어져서 후공정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액체가 이송되지 않으면 내부의 중요한 물질의 이송이 지체되고, 그 결과 시스템 전체의 효율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지게 되며 생산성도 50% 이하로 악화됩니다. 액체가 이송되는 파이프 관의 크기는 극비이며 구조 역시 알려줄 수 없습니다. 액체의 성분은 조금도 바뀌어서는 안 되고 온도나 압력도 변해선 안됩니다. 먼지 하나도 들어가면 안 될 정도로 어떠한 외부의 교란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이 액체의 흐름을 한번 끊고 나면 한 달 동안 보수 공사를 해야 하는데 이로 인한 손실분은 약 100억 원에 달합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액체를 굳지 않게 해야 하는데, 주변에 추가적인 외부 히터를 설치하는 건 공간이 좁아 거의 불가능합니다.”

위 내용은 실제 상황과 가장 가깝게 재구성한 가상 상황으로, 현업 엔지니어가 트리즈(TRIZ) 컨설턴트에게 자사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다. 그나마 독자들이 이해하기 편하도록 필자의 각색을 거친 것으로, 실제 현업에서 컨설팅 업무를 수행할 때 저 정도라도 설명을 해 주는 고객사 엔지니어를 만나기는 매우 힘들다. 이처럼 처음 접하는 상황, 게다가 많은 양의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비핵심 정보를 제거하고 핵심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언가를 개선하고자 한다면, 문제가 되고 있는 시스템이 수행해야 하는 본질적기능(function)’이 무엇인지, 또 그 기능의 작동 원리라 할 수 있는지배 법칙(objective law)’은 무엇인지를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시스템이란 내가 설정하는 관심 영역 내부를 말한다. 위 사례에선 문제가발생한영역, 즉 파이프다. 그렇다면 이 파이프의 본질적 기능(대상의 속성을 변화시키거나 유지하는 작용)은 무엇인가? 보다 실용적으로 되묻자면, 이 파이프는 어떤 물질, 어떤 에너지에 작용하는가? 바로 현업 엔지니어가 그렇게도 강조한액체. 이 파이프가 액체에 가하는 작용은 무엇인가? 위치의 변화, 즉 이동이다. 다른 데서 발생한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바로 이 시스템(파이프)이 반드시 해줘야 하는 본질적 기능(액체의 이동)이 만족스럽지 않은 게 문제다.

만족스럽지 않은 기능을 보다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무엇일까? 물처럼 원활하게 흘러야 할 액체가 마치 조청(造淸)처럼 끈끈해지며 점도(粘度)가 높아지는 것이다. 액체가 끈끈해지면 무엇이 좋지 않은가? 이동 속도가 떨어진다. 그렇다면 액체가 끈끈해지는 것을 막는 게 이후의 공정에 더 중요한가, 아니면 액체의 이동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게 더 중요한가? 이동 속도를 일정하게 만드는 게 후공정의 관건이다. 이동 속도를 일정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파이프 주변에 히터를 설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외부 히터를 설치하자면 공간이 얼마 이상 확보돼야 하는데, 현재 공정에선 도저히 히터를 설치할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이제 본질적 문제를 통찰할 준비가 됐다. 실무 경험이 풍부한 트리즈 전문가, 혹은 트리즈를 실무에 적용한 경험이 많은 연구자라면 위의 상황을 모두 머릿속에서 분석, 요약해 다음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한다.

액체 이송로 주변에 큰 외부 히터를 설치해 열량을 많이 가하면(approach or condition),

액체의 이동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으나(good effect),

히터를 설치할 공간이 협소해 주변이 복잡해진다(bad effect).”

위의 문장은 트리즈의 가장 중요한 문제 형식화 기법 중 하나인기술적 모순(technical contradiction)’에 따라 현업 엔지니어가 고민하는 갈등 상황을 핵심만 짚어 명료하게 정리한 것이다. 이 기법을 알고 문제를 형식화하는 연습을 한다면 예기치 않은 상황, 전혀 접해 보지 않은 상황에서도 문제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형식화할 수 있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을 통찰해야만이 해결의 방향성을 잡을 수 있다.

통찰의 결과물은 매우 간단하지만 통찰에 이르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다. 중요한 목적음이 주변의 잡음 때문에 가려지는 현상을 음향심리학적으로 마스킹 효과(masking effect)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에도 이런 마스킹 효과가 강력하게 작용한다. 위의 사례에서도 수많은 노이즈 정보(액체의 조성, 파이프 관, 시스템 효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의 손실액 등)들이 들어있어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따라서 잡음을 걷어내지 않으면, 즉 본질과 관련성이 적은 정보를 생략하지 못하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친다

기술적 모순(technical contradiction): 시스템의 한 가지 특성을 개선하고자 하는 시도나 조건 하에서, 하나 이상의 다른 특성이 악화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위의 액체 이송로 사례에선 액체의 이동 속도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한데, 이 바람직한 특성을 제공하기 위한 시도(이송로 주변에 히터 장치 설치)로 이송로 주변이 복잡해지는 악영향이 발생한다. 이처럼 시스템(파이프)의 본질적인 기능(액체 이동)과 지배 법칙(액체의 속도는 점도가 높아지면 느려지고, 점도가 낮아지면 빨라진다)을 파악하고, 과제원들의 문제에 대한 인식(액체가 이동할 때 액체의 온도가 내려가면서 점도가 높아져 액체 이동 속도가 느려진다)과 이를 바탕으로 내놓은 일반적 해결안(히터 설치)을 통찰한 결과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작업을 기술적 모순 정의라고 한다. 혁신과 시스템의 진화는 모순을 극복할 때 일어난다고 보는 게 트리즈의 기본 관점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모순의 통찰은 가장 중요한 트리즈의 문제 해결 과정의 하나로 진행된다.

기능(function): 어떤 시스템이나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특정 기능을 제공하는 것이다. 기능 정의란 시스템의 존재 이유에 대한 통찰을 간결하게 요약하는 작업이다. 기능을 정의하는 순간, 다른 잡음 요소들 속에서 정말 집중해야 할 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기능은 작용이며, 작용에는 작용을 가하는 주체와 이를 받는 대상이 존재한다. 밥솥을 예로 들어보자. 설계자가 원래 의도한 밥솥의 기능을 정의한다면 곡물(대상)을 호화(대상), 즉 소화되기 쉬운 형태로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인 생각은가열한다지만 가열은 곡물을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 기능의 작용 수준이 만족스럽다면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건 기능이 불충분하거나 유해할 때가 문제다. 기능의 작용 수준이 만족스럽고 만족스럽지 않고는 후공정이나 고객이 결정한다. 기능의 대상과 유지 혹은 변화시켜야 할 성질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문제와 시스템의 본질을 통찰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 중 하나다.

기술적 모순기법을 통해 본질적인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적은 다음 통찰할 일은 왜 이런 문제(이동 속도의 감소)가 생기는가다. 위 사례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액체가 이동할 때 액체의 온도가 내려가고 이 때문에 액체의 점도가 올라가서 이동 속도가 느려진다. 사실 액체의 온도가 내려간다거나 점도가 올라가는 것, 이로 인해 액체의 이동 속도가 느려지는 것 자체만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확한 양의 액체가 정확한 타이밍에 주입돼야만 후공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파이프를 통해 정량/정시간에 액체를 이동시켜야만 후공정이 원활하게 진행되는데, 현실은 이 같은 후공정의 니즈(needs)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본질적 기본 기능(액체의 이동)과 해당 기능이 왜 필요한지(후공정의 니즈)를 파악한 후에는, 이를 관통하는 지배 법칙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지배법칙이란 기술 시스템을 지배하는 각종 자연과학적 원리와 규약 등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액체의 속도는 점도가 끈끈하게 높아지면 느려지고, 점도가 묽게 낮아지면 빨라진다. 점도는 물질의 종류에 따라 어떤 것은 온도가 높아지면 낮아지고, 어떤 것은 그 반대로 온도가 낮아질 때 함께 낮아진다. 이런 물질, 에너지들 간에 존재하는 각종 지배법칙을 순간적으로 통찰해야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들은 모두 대상 시스템에 대한 통찰에서 도출됐다. 그러나 대상 시스템 바깥에서도 통찰해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 바로 과제를 수행하는 이들의문제에 대한 인식과 그들이 생각하는일반적 해결안이다. 문제 자체에 대한 통찰은 아니지만 이런 외적인 이유 때문에 문제 해결책으로의 정교한 접근이 어려워지거나 제한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에서 과제원(고객사 현업 엔지니어)들은 파이프를 통해 액체가 이동하는 과정 중에 액체의 온도가 내려가고, 그때 점도가 올라가면서 액체의 속도가 느려진다고지배 법칙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차적으로 전통적인 큰 외부 히터 설치를 고려했다. 하지만 이들은 공간상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새로운 타입의 히터, 즉 콤팩트한 사이즈의 소형 히터를 개발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바로 이 같은 일반적 해결안이 오히려 문제 해결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문제가 복잡해지는 건 애초에 다른 방법은 배제한 채 외부 히터를 설치해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TRIZ 컨설턴트라면, 과제원들의 이 같은 문제 인식과 그들이 생각하는 일반적 해결안(소형 히터 개발)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본질적 기능을 꿰뚫고 필요 조건과 지배 법칙을 파악하는 작업만큼이나 매우 중요하다.

액체의 점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이동 속도를 일정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외부 히터가 유일한 방법일까? 만약 콤팩트한 외부 히터 개발이 유용한 해결책이라면, 트리즈 컨설턴트는 소형 히터 개발과 관련한 자료를 검색하고 문제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히터를 설치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과연 그 방법 밖에 없을까? 해결안을 찾아가는 데 정말 도움이 되는 통찰은 그 시스템이 진짜로 수행해야 하는 본질적 기능(액체를 정량, 정시간에 이동)만 잘 수행되도록 집중하는 것이다.

파이프에 단열재를 두르는 해결안은 어떨까? 액체를 정량, 정시간에 이동시키기 위해 액체에 더 큰 압력을 가해 파이프를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하게 한다면 온도가 내려갈 시간적 여유가 감소해 온도가 덜 내려갈 것이고, 점도도 덜 증가할 것이며 그 결과 파이프를 통해 흐르는 유체의 흐름이 원활해지지 않을까? 파이프의 전체 길이를 짧게 하는 방법은 어떨까? 온도가 내려갈 시간적 여유가 줄어들므로 흐름이 원활해지지 않을까? 파이프를 조금 더 굵게 하고 압력을 조금 더 높이는 방안은 어떨까? 액체가 식는 속도가 감소하니 점도가 유지돼 흐름이 원활해지지 않을까? 만약 펌프의 성능이 한정돼 더 높은 압력을 액체에 가하지 못하는 경우라면 중력을 추가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파이프의 방향을 가로 방향이 아니라 세로 방향으로 바꾸는 건 어떨까?

본질적 기능에 초점을 둔다면, 문제의 핵심은외부 히터를 설치해야 한다가 아니라, ‘액체를 정량, 정시간에 이동시켜야 한다로 재정의 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간파하는 순간, 히터 설치 외에 다양한 해결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본질적 기능을 통찰하지 않고 외부 히터 설치라는 대증적 해결안에 갇히는 순간, 위에서 예로 든 여러 가지 해결안들이 도출될 가능성은 사라진다.

통찰이란 보이는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가 개입된 활동이다. 인간의 노력이 극히 필요하고, 복잡다단한 현상계의 잡음이나 그림자에 지배되지 않고 핵심을 간파해내야 한다. 기술적 모순이라고 하는 트리즈의 문제 정의 기법은, 문제의 본질과 동떨어진 정보들은 배제하고 핵심이 되는 것만을 요약할 수 있는 통찰의 한 방법이다. 기능 정의 역시 대상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를 밝히는 기술 시스템을 대상으로 한 통찰의 좋은 방법이다.

의미 있는 기능 단위인 시스템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시스템이 원래 수행해야 하는 본질적 기본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 기능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해결안은 무엇인가? 혹시 일반적 해결안에 사로잡혀 본질적 기능에 충실한 다른 해결안은 생각해내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 통찰의 내용을 하나의 문장으로 형식화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답을 트리즈의 문제 해석 기법인기술적 모순기능정의 과정에서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해 문제의 본질, 시스템의 본질, 지배법칙의 본질을 읽어낼 수 있다면,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시스템과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시각이 새로운 아이디어의 가장 좋은 출발점이 된다.

필자는 KAIST에서 화학공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제 트리즈 협회 공인 Level 4 전문가로, 삼성종합기술원에서 200건 이상의 연구 개발 과제 컨설팅을 수행했다. 저서로 <회사를 살리는 아이디어 42가지(공저)>가 있다.

 

  • 송미정 | - (현)삼성종합기술원 CTO 전략팀 부장
    - 삼성종합기술원 연구혁신센터 차장
    - 국제 트리즈 협회 공인 Level 4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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