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명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전 동아시아 윤리학은 20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유학자 맹자(孟子, BC 372?∼BC 289?)로부터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맹자가 정초했던 윤리학은 성선설(性善說)로 요약할 수 있다. 맹자에 따르면 윤리적으로 선한 본성을 현실화시킬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선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맹자 이후부터 동아시아 유학자들 대부분이 선한 본성을 어떻게 하면 현실화시킬 수 있는지를 놓고 속앓이를 거듭하게 된다.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중국뿐만 아니라 거의 500년 동안 조선에서도 강한 철학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주희(朱熹, 1130∼1270)를 들 수 있다. 동아시아 유학에서 수양론(修養論)이 그렇게도 발달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만큼 맹자가 제안했던 인성론과 수양론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잠시 맹자의 이야기를 경청해보자.
어떤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상황을 보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고, 지역사회의 친구들에게서 칭찬을 바라서도 아니며, 우물에 빠지는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관찰해보면, ‘측은해하는 마음(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의 단서이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의 단서이며,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의 단서이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智)의 단서이다. … 네 가지 단서, 즉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것을 확충시킬 수 있다. 불이 처음 타오르고 물이 처음 솟아나듯이 진실로 사단을 개발시켜 채워갈 수 있으면 온 세상을 보호할 수 있다. 확충하지 못한다면 부모조차 섬길 수 없다.
-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상>
맹자에게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이다. 나아가 그는 이 네 가지 마음을 유학의 네 가지 덕목,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연결시키고 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고,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이고,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이고,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라는 맹자의 표현이다. 단서로 번역된 단(端)이란 글자는 초봄, 아직도 차갑기만 한 대지를 뚫고 나오는 푸른 새싹을 상징한다. 주희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시비지심이 각각 인의예지라는 씨앗으로부터 나온 새싹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나온 새싹들을 잘 키워서 무성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은 푸른 녹음으로 가득 찰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네 가지 마음을 잘 키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윤리적으로 선한 인간으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네 가지 선한 마음의 싹을 제대로 피우려면 일단 땅 속의 열매가 튼실해야 한다. 이는 주희가 말한 함양(涵養) 공부이다. 선한 마음의 싹이 땅으로 올라올 때, 동시에 악한 마음의 싹도 올라오기 마련이다. 당연히 선한 싹과 악한 싹을 구분해야만 한다. 그래야 선한 싹은 북돋우고 악한 싹은 제거할 수 있다. 체찰(體察), 즉 몸소(體) 선한 싹과 악한 싹을 살피는(察) 공부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인의예지가 씨앗이고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그리고 시비지심이 그 새싹이란 주희의 생물학적 상상력은 과연 옳은 것인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주희의 생각에 도전했던 유학자가 조선의 남쪽 끝 전라도 강진 땅에서 등장하게 된다. 바로 19년의 유배 기간 동안 새로운 윤리학을 집요하게 꿈꾸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다.
궁금해진다. 정약용은 어떻게 주희의 생물학적 상상력을 극복했을까? 다음 구절을 읽으며, 우리는 그의 영민함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명칭은 반드시 우리의 실천(行事) 이후에 성립한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 할 때 ‘측은지심’이 생겨도 가서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인(仁)이라 말할 수 없다. 한 그릇의 밥을 성내거나 발로 차면서 줄 때 수오지심이 생겨도 그것을 버리고 가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의(義)라 말할 수 없다. 큰 손님이 문에 이르렀을 때 공경지심이 생겨도 맞이하여 절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예(禮)라 말할 수 없다. 선한 사람이 무고(誣告)를 당했을 때 시비지심이 생겨도 분명하게 분별해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근원만을 캐들어 가서 지(智)라 말할 수 없다.
- <맹자요의(孟子要義)>
주희에게 인의예지는 씨앗이고, 측은지심 등 사단은 새싹이었다. 다시 말해 인의예지는 원인이고 측은지심 등은 결과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정약용의 기지가 발휘된다. 주희의 해석과 달리 정약용은 측은지심 등 사단을 원인으로, 인의예지를 결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측은지심과 관련된 맹자 이야기를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맹자에 따르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상황’에 직면하면 누구나 측은지심과 같은 동정심이 발생한다. 옳은 지적이다. 그렇지만 맹자의 논의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동정심을 갖게 된 사람은 과연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를 구했는가? 아니면 실패했는가? 만약 측은지심을 품은 누군가가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를 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를 인(仁)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것이 정약용이 품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정약용의 생각을 따르다 보면, 우리는 맹자나 주희가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저 측은지심은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한 마음이라는 생각만이 맹자나 주희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맹자나 주희의 윤리적 감수성이 인간의 본성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정약용의 그것은 바로 위기에 빠진 어린아이에 가 있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 ‘측은지심’이 발생했을 때 주희가 그것을 발생시킨 ‘본성’이라는 내적 원인으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켰던 반면, 정약용은 그 어린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외적 방향으로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킨 것이다. 결국 정약용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유학의 가치 덕목은 마음의 본성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주체적 노력과 실천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덕목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의예지’란 가치 덕목은 우리에게 내재하는 본성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行事)’을 통해서만 확립되는 무엇이라고 강조했다.
정약용은 흔히 실학(實學)의 집대성자라고 불린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실학 정신이 타자와 무관한 고독한 자기 수양이 아니라, 타자와 관련된 윤리적 실천이 중요하다는 그의 통찰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측은지심’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도 잘못하면 그 우물에 같이 빠질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방관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측은지심이 생겼다는 단순한 이유로 우리를 윤리적으로 선(善)하다고 간주할 수 있을까? 윤리적인 선악(善惡)은 그렇다면 어느 지점에서 결정되는 것일까? 정약용에 따르면 그것은 측은지심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안전을 선택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선악은 ‘측은지심’과 같은 도덕 감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주체의 결단과 의지에 달려 있다. 마침내 맹자로부터 시작된 수양의 윤리학이 정약용에 이르러 실천의 윤리학으로 전회됐다. 지금 함양(涵養), 체찰(體察)이란 슬로건으로 과거 동아시아 사람들의 수양 이야기가 일종의 노스탤지어처럼 번지고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내면이 아닌 외면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다시 말해 본성의 함양이 아니라 주체적 결단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정약용의 고독한 외침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지금은 옷깃을 여미고 강진의 고독한 유학자를 생각할 때 아닌가?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장자 철학을 조명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