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는 언제 비범함으로 도약했을까. 그는 생의 어느 순간에 평범함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점을 지나게 되었을까.
영국에서 유학하고 변호사가 된 간디는 인도에서 변호사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는 직업적인 성공을 찾아 대영제국에 속한 남아프리카로 떠났다. 젊고 미숙한 변호사인 그는 사람들로부터 유능함을 인정받아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남아프리카의 나탈에 도착한 지 일주일 뒤 간디는 트란스발 주의 프리토리아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여기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기차가 나탈의 마리츠버그 역에 정차했다. 한 백인이 간디가 타고 있는 객실로 들어와, 승무원에게 유색인종과는 한 객실에 타고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승무원은 간디에게 3등 칸으로 가라고 말했다. 간디는 항의했다. 결국 간디는 기차 밖으로 쫓겨났으며, 추운 대합실에서 밤새 떨어야 했다.
간디는 프리토리아까지 가는 남은 여정 동안 1등 칸으로 여행하겠다고 계속 요구했지만 그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점점 화가 났다. 그리고 인도인이 3등 시민으로 대접 받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밤을 지새웠다. 프리토리아에 도착한 그는 인도인들을 모았다. 그리고 인도인에 대한 부당한 처지에 대처하기 위해 그들을 규합했다. 이날의 회합이 바로 변호사 간디가 정치적 지도자로 전환하는 첫 순간이었다. 간디는 뒷날 자신이 걷게 된 정치운동의 사명이 바로 마리츠버그의 기차역에서 시작됐다고 술회했다.
“나는 인도인 정착자들의 힘든 상황을 글로 읽고 귀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내 몸으로 직접 경험함으로써 세세히 느낄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는 자존심 있는 인도인이 살 곳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런 사태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데 점점 더 사로잡혀갔다.”
마리츠버그에서의 일화는 우연의 선물이었다. 누구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몰랐지만 그 일은 결국 간디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 후 간디는 다시는 세속적인 성공에 연연하는 젊고 미숙한 변호사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마리츠버그 역의 사건은 그를 도약시켰다.
감옥에서의 4개월
이와 비슷한 사례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아름다운재단의 상임이사이며 인권변호사이기도 한 박원순이 특별한 길을 걷게 된 이야기다. 대학 신입생 때 그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뉴스위크’를 끼고 멋을 부리며, 일주일에 두어 번 여학생들과 미팅하고, 사회학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어느 화려한 봄날이었다. 그는 저녁에 있을 미팅을 생각하며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밖이 소란하여 내다보았다. 시위가 벌어져 경찰이 무자비하게 학생들을 진압하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이 잡혀갔다. 그저 젊은 혈기에 그는 이 대열에 가담했고, 결국 체포됐다. 주동자들은 다 도망가고 단순 가담자에 불과했던 그는 곧 감옥에서 나오리라 생각했지만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직후여서 쉽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 제적되고 4개월 동안 교도소에 갇혔다. 그 4개월이 그를 바꾸어 놓았다. 거기서 그는 처음에는 험악하고 무서워 보였던 사람들이 오히려 착하고 약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들을 이해하게 됐다. 출옥 후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 생활을 하고 변호사 생활도 했다. 그러나 그는 법조계 인물로 남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교도소 경험이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하기 어렵다. 교도소에 가지 않았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고시에 합격한 뒤 검사가 되었을 것이고 지금쯤 검사장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교도소에 갇힌 자를 경험하고 약자와 함께 보낸 추억이 있었기에 늘 약자의 편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역사의 중심에서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실천하게 됐다.” 그 역시 운명적인 사건 이후 과거의 그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여행이 낳은 혁명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혁명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체 게바라는 원래 의사였다. 20대 초반에 의학도 신분으로 떠난 7개월 동안의 남미 여행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체 게바라가 애초에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고국인 아르헨티나 너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의 열정에 이끌려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중고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을 하고 난 뒤 그의 삶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이 여행에 대해 기록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아르헨티나 땅에 다시 발을 딛는 순간에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 글을 다시 구성하며 다듬는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의 위대한 남미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나는 생각보다 많이 변했다. 그 깊이는 내가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체 게바라가 여행을 통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과거의 그를 사라지게 했을까. 체 게바라는 우연히 칠레의 한 노동자 부부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그곳 사람들의 현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는 추운 밤 담요 한 장 없이 부둥켜안고 자는 노동자 부부에게 자신의 하나뿐인 이불을 건네주었다. 그는 당시의 경험에 대해 “내가 겪은 가장 추웠던 일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 경험은 낯선 인류와 좀 더 가까운 느낌을 갖게 해줬다”고 말했다. 그는 그 여행에서 이런 장면들과 무수히 마주치면서 의사도 성직자도 아닌 혁명가로서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