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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Mini Case: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배구단의 ‘토털 배구’ 철학

“이기는 배구보다 행복한 토털 배구를” 최태웅 감독에게 배우는 ‘팔로어십 경영’

김영준 | 224호 (2017년 5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는 ‘외국인 공격수에게 몰방해주는 배구’가 득세하던 한국 남자배구계에 ‘토털 배구’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 팀이 배구계를 넘어 기업과 기타 조직에도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시대정신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1) 이기는 배구보다 행복한 배구, 즐거운 배구를 추구
2) ‘머니볼’식의 통계분석 역량 육성
3) 선의에 기반한 ‘팔로어십’ 문화
4) 30대 젊은 감독에게 전권을 보장해준 사무국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는 2017년 4월3일 열린 남자프로배구 V리그 챔피언결정전 5차전에서 대한항공을 물리치며 3승2패의 기록으로 10년 만의 우승을 이뤘다. 이는 또 2005년 프로배구 출범 후 세 번째 우승(05-06시즌, 06-07시즌, 16-17시즌)이었다. 여기까지였다면 특별할 것은 딱히 없다. 이 팀보다 양적으로 우승을 많이 한 팀들은 야구, 축구, 농구, 배구 등 한국 4대 프로스포츠에서 찾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주목할 지점은 결과가 아니라 여정이다. 우승 횟수가 아니라 어떻게 이겼느냐는 ‘퀄리티’다.

스포츠도 이젠 프레임(frame)의 시대다. 현대캐피탈은 ‘혁신’ 프레임을 선점했다. 그들은 베스트(best)가 아니라 온리(only)를 추구한다. 현대캐피탈의 홈 코트 천안 유관순체육관에 들어가면 천장에 펄럭이는 대형 플래카드가 시야에 들어온다. ‘배구에 새로움을 더하다’라는 글이다. 현대캐피탈은 이기는 데 궁극의 가치를 두고 배구를 하지 않는 조직이다. ‘왜 배구를 하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에서 출발한다. 조직문화와 실행전략의 에센스가 다르다.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배구단이 기업 경영에 주는 교훈과 시사점을 소개한다.



한국 배구의 블루오션을 개척하다

남자배구계에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종합영어> 같은 위상을 갖는 팀이 있다. 삼성화재다. 삼성화재는 V리그 원년인 2005시즌 우승, 그리고 2007∼2008시즌부터 2013∼2014시즌까지 7시즌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이 팀의 신치용 전 감독(현 단장)은 ‘한국형 배구’를 완성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는 11시즌 동안 재임하며 매번 팀을 챔피언결정전에 올려놨고 이 중 8번을 우승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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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화재 배구의 요체는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효율성에 있었다. 이 팀에 필요한 정신은 절제, 희생, 헌신이었다. 배구는 6명의 선수가 코트에서 뛴다. 리베로, 세터, 공격수(라이트, 레프트, 센터)로 구성된다. 리베로는 수비에만 집중하는 포지션이며 세터는 공격수들이 때리기 좋게 공을 띄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삼성화재의 배구에서는 다섯 명의 토종 한국인 선수들이 1명의 인재(외국인 공격수)를 위해 리시브와 수비로 조력했다. 세터는 ‘어떤 상황에서도 외국인 선수에게 공을 정확히 올려주느냐’에 집중했다. 선수들은 지옥훈련을 감내했고 군대에 버금갈 조직문화를 체화했다.

한국 프로배구리그는 팀들 간 전력 평준화를 위해 최하위 팀부터 최상위 팀까지 성적의 역순으로 다음 시즌의 신인 지명권을 준다. 그러니 연속 우승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화재가 지속적 승리, 지속적 우승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최적루트는 ‘관리의 삼성’이라는 그룹 이미지를 현실에서 재연하는 것이었다. 신치용 감독은 이 꿈을 실현했다. 삼성 스포츠단 체육인 가운데 유일하게 ‘자랑스런 삼성인 상’을 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물론 신치용식 배구의 모방자들도 속속 등장했지만 에센스를 간파하지 못한 채 겉만 따라 하던 경쟁팀들은 번번이 삼성화재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세계적 실력을 갖춘 외국인 선수를 고액에 스카우트해오는 것만으로는 원조 격인 삼성화재를 이길 수 있는 팀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캐피탈이 변화를 시도했다. 현대캐피탈은 삼성화재의 전통적 라이벌이고 2회 우승을 거두긴 했지만 성적으로 비교하면 조역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었다. 변화의 시작은 ‘이를 추동할 리더가 누구냐’에서부터 출발한다. 현대캐피탈 정태영 구단주의 선택은 2015년 4월 당시 39세로 선수생활을 이어가던 최태웅이었다.

최태웅은 국가대표 명세터 출신이다. 그는 삼성화재에서 1999년부터 2010년까지, 그 이후 현대캐피탈에서 선수로 뛰었다. 현대캐피탈의 최태웅 감독 임명은 3가지 지점에서 반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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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선수에서 은퇴하자마자 코치직도 거치지 않고 바로 감독으로 낙점된 것이다.1 최 감독의 전임자가 배구계에서 명성이 높은 김호철(현 국가대표팀 감독)이었기 때문에 파장은 더 컸다. 김 감독은 현대캐피탈의 2회 우승을 이끄는 등 삼성화재 신 단장과 한국 배구를 양분하는 커리어의 지도자였는데 그 후임자로서 감독 무(無)경험자가 선택된 것이다. 당시 현대캐피탈 내부적으로는 ‘최태웅이라면 바로 감독을 시켜도 잘할 것’이라는 그 나름의 믿음이 서 있었다. 그는 선수 시절 사비를 들여 유럽 배구를 공부하러 가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고, 현대캐피탈이 천안에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라는 복합 베이스캠프(숙소+훈련장+재활시설)를 지을 때는 구단주 앞에서도 선수 입장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조리 있게 얘기할 줄 아는 합리성과 배짱을 보였다. 현대캐피탈은 초보 감독인 최 감독에게 계약조건과 감독 권한 등을 김호철 전임 감독과 똑같은 수준으로 보장해줬다.



둘째, 최 감독의 본적이 현대캐피탈의 앙숙인 삼성화재라는 점이다. 여기엔 스토리가 있다. 2000년대 후반 삼성화재가 ‘무적함대’ 평가를 받던 시절 최 감독은 이 팀의 세터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그 반대편의 현대캐피탈에서는 박철우라는 걸출한 라이트 공격수가 있었다. 그런데 박철우는 당시 삼성화재 신 감독의 막내딸인 전 프로농구 선수 신혜인과 열애 중이었다. 호사가들은 박철우와 신혜인의 관계를 두고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칭했다. 세간에서 떠들어댈수록, 현대캐피탈과 삼성화재의 라이벌 전선이 첨예할수록 당사자들은 처신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 박철우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자 삼성화재가 신 감독의 예비 사위인 박철우를 영입하는 용단을 내렸다. (이후 박철우-신혜인 커플은 결혼해 잘 살고 있고 박철우는 현재까지도 삼성화재에서 핵심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런데 FA 영입에는 보상선수라는 대가가 따른다. FA 선수를 영입하는 팀은 그 선수의 원소속팀이 원하는 선수를 대신 내줘야 한다. 딱 3명만 보호선수로 지정할 수 있다. 여기서 현대캐피탈은 반전의 선택을 감행한다. 박철우의 보상선수로 베테랑 세터 최태웅을 지명한다. 당시 현대캐피탈은 세터가 부족하지 않은 팀이었는데 삼성화재의 전력을 약화시킬 의도로 최태웅을 지명한 것이다. 이는 삼성화재가 베테랑 최태웅을 보호선수 3인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도와 무관한 현대캐피탈행으로 최태웅은 ‘삼성화재에서 버림받았다’는 내상을 입었다. 게다가 현대캐피탈 이적 후 갑상선암 발병이라는 고난까지 닥쳤다.

이후 투병과 재활을 거치며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온건해졌다고 고백했다. 코트 복귀를 도와준 현대캐피탈 김호철 감독과의 새로운 인연도 얻었다. 상처를 딛고 새 팀에서 묵묵하게 노력한 최태웅은 본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쟁쟁한 현대캐피탈 출신의 스타플레이어들을 제치고 감독에 임명됐다.

세 번째는 시간이 흐르면서 드러난 경탄이다. 최 감독이 펼치는 배구가 V리그에서 지금껏 보지 못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최태웅의 배구는 신치용의 배구, 삼성화재의 배구를 넘어서려는 의도가 없다. 그는 우열이 아니라 다름의 방향성을 지향했다. 외국인 선수에게 공격을 집중시키는 효율적 배구가 아니라 플레이어 전원의 개성을 살려서 다양한 공격과 수비 옵션을 실험하는 ‘토털 배구’에 방점을 찍었다. ‘스피드 배구’라는 브랜드를 설정하고, ‘업템포 1.0’(2015∼2016시즌 18연승)과 ‘업템포 2.0’(2016∼2017시즌 우승)으로 시즌이 거듭될수록 업그레이드했다.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는 “여정 자체가 보상”이라고 설파했다. 현대캐피탈이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최 감독은 필자에게 이런 속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행복한 배구를 하고 싶다. 우승 몇 번이 아니라 선수들이 은퇴할 때 ‘배구하기를 참 잘했다’고 느끼도록 해주는….” 승패에 죽고 사는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행복’이라는 추상적 메시지를 현직 감독에게 듣게 될 줄이야… 물론 연전연패하는 배구팀이라면 행복할 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가치의 중심을 어디 두느냐에 있다. 현대캐피탈은 ‘어쨌든 승리’라는 결과 지상주의가 아니라 승리까지 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현대캐피탈 배구단이 광채를 발하는 포인트다.

현대캐피탈의 ‘스피드 배구’는 공격과 수비 전환 시 플레이어 전원이 참가하는 ‘토털 배구’다. 모든 선수들이 활동적, 창의적이어야 유기적 팀플레이가 기능할 수 있다. 공격수와 수비수의 역할이 명확히 나눠지는 기존 분업배구의 틀을 깬 개념이다. 현대캐피탈은 V리그 7개 구단 중 외국인 선수의 공격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낮다. 외국인 선수 영입 방식이 자유계약(구단이 원하는 선수와 자유롭게 협상하는 방식)에서 트라이아웃(연봉액 제한을 두고 모든 구단이 한꺼번에 선수들을 공개 테스트해서 뽑는 방식)으로 변경된 2016∼2017시즌에는 외국인 선수 의존도가 더욱 낮아졌다. 외국인 선수의 공격 비중이 떨어진 만큼 국내 선수들의 다변화된 공격 루트가 갖춰져야 득점이 생산될 수 있다. 현대캐피탈은 센터진의 중앙속공, 사이드 공격수의 파이프(중앙 백어택), 시간 차 공격, 이동 공격 등 리그에서 가장 다변화된 공격 루트를 가동하고 있다. 또 에이스 문성민을 비롯한 선수들의 서브 능력은 V리그에서 가장 위협적이다. V리그 최고 리베로로 꼽히는 여오현 플레잉코치의 리시브와 디그(몸을 날려 공을 건지는 것), 그리고 이단공격 시 세터를 대체하는 다른 포지션 선수들의 토스 능력은 팀의 버팀목이다. 세터 출신인 최 감독은 부임 직후 베테랑 세터 권영민을 KB손해보험에 내주고 무명의 신예 세터 노재욱을 영입하는 모험적 트레이드를 감행했다. 최 감독의 눈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노재욱은 현대캐피탈의 리빌딩을 이뤄내며 스피드 배구를 이식했고 우승까지 선사했다.

최 감독은 부임 첫해부터 2015∼2016시즌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후반기 전승(18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낳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챔피언결정전(1승3패) 우승은 OK저축은행에 내줬지만 배구팬과 미디어는 준우승팀 현대캐피탈에 더 열광하는 이상 현상이 빚어졌다. 2016∼2017시즌에는 역대급 명승부 끝에 대한항공을 3승2패로 꺾고 정상을 정복했다. ‘배구에 새로움을 더하겠다’는 좌표를 설정한 현대캐피탈의 여정이 우승이라는 최고의 보상까지 이어진 것이다.



현대캐피탈식 토털 배구의 원동력

현대캐피탈은 어떻게 토털 배구, 스피드 배구를 하는가? 이 질문은 ‘무엇이 가장 현대캐피탈다운 배구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하나씩 살펴보자.

1. 통계 기반의 의사결정

보는 이들에게는 화려하고 역동적인 현대캐피탈 배구에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냉철한 통계가 자리한다. 언젠가 최 감독은 “누군가 아무리 유의미한 데이터를 가져다줘도 (객관적) 검증이 되지 않으면 채택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현대캐피탈 배구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전력분석이다. 최 감독은 시즌 막판, 하루 2시간만 자고 계속 전력분석 비디오를 봤다. 이 무렵 만날 때마다 눈은 충혈돼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자려고 누우면 어둠 속에서 숫자들이 떠다닌다. 그러면 다시 일어나서 본다. 몸은 힘들지만 재미있어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웃었다. 의미 있는 데이터를 발견해서 어떤 패턴이 조합되면 실전에서 적용해본다. 실전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다시 수정한다. 다른 팀들도 알게 돼 효용이 다 된 기존 데이터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면 폐기하고 새로운 데이터를 찾아 나선다.



현대 야구는 세이버 매트릭스로 집약되는 통계 분석이 주류를 점하고 있다. 야구인들의 경험이나 직관에 의존하지 않고 객관화된 숫자로 선수 가치를 측정하고 팀 플랜을 짜는 방식이다. 이미 아이비리그 등 명문 대학 수재들이 일약 메이저리그팀의 단장으로 특채되는 일이 더 이상 이례적이지 않다. 한국 프로야구도 마찬가지다. 넥센, NC, SK처럼 통계분석을 중시하는 구단들이 ‘야구는 야구인의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있다. 일례로 포수가 투수의 공을 잡을 때의 미트 움직임(프레이밍)을 수치화하자는 아이디어 하나로 팀 성적을 극적으로 끌어올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야구에 비해 아직 배구는 통계가 정밀하지 못하다. 그러나 데이터를 통해 패턴을 파악하려는 필요성을 부정하는 팀은 없다. 그 최전선에 최 감독의 현대캐피탈이 위치한다. 최 감독에게 데이터 분석은 일종의 ‘보물찾기’다. 현대캐피탈 배구단은 군대의 규율이 아니라 연구소의 창의성을 지향한다. 이런 최 감독에게 가장 큰 적은 상대팀이 아니라 ‘선입견’이다. 편견을 배제하고 숫자의 진실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제 배구 코트에서 적용하는 것. 그 명징한 객관성의 세계가 어렴풋했던 현대캐피탈 배구의 요체라 할 것이다. 최 감독은 “선수들은 (복잡한 데이터 추출 과정을) 다 알 필요가 없다. 감독, 코치들만 전부 외우면 된다. 선수들에게는 최대한 단순하게 전달한다”고 말한다. 현대캐피탈 선수들을 인터뷰해보면 데이터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데이터에 관한 믿음이다. 현대캐피탈 배구단은 금융사인 현대카드그룹 계열이다. 금융회사의 지향성인 객관성, 합리성, 신뢰성을 배구단에서 이상적으로 실현하는 셈이다.

2. 선의에 기반한 팔로어십(followership)

리더십은 곧 ‘팔로어십’과 연결된다. 구성원들이 리더를 어떻게 믿고, 따르게 하느냐에 성패가 갈린다. 최 감독은 자율 기조를 두되 ‘원팀’의 가치를 매우 강조한다. 현대캐피탈 작전타임을 보면 다른 팀과의 차이점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대개 배구팀은 작전타임 때 주전선수들만 감독, 코치의 지시를 듣는다. 웜업존의 후보 선수들은 몸을 풀 뿐이다. 그런데 현대캐피탈은 후보 선수들도 같이 작전타임을 듣는다. ‘주전도, 후보도 같은 정보를 공유해야 된다’는 최 감독의 지론이 반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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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캐피탈의 캐나다 출신 외국인 선수 톤 밴 랭크벨트는 ‘아는 한국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같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배웠다”고 말했다. 팀이 패하면 많은 연봉을 받는 외국인 선수가 눈총을 받기 십상인데 톤은 기량 미달로 퇴출될 정도였지만 이 때문에 팀 안에서 불협화음이 나오진 않았다. “차별하지 말고 외국인 선수도 국내 선수처럼 대해주라”는 지침을 구성원들 모두가 지켰다. 톤은 퇴출이 결정된 후에도 최 감독과 포옹을 나누며 감사를 표시했다. 톤의 대체 선수로 입단한 크로아티아 출신 대니(다니엘 갈리치)는 챔피언결정전 마지막 5차전에서 발목이 돌아가는 치명적 부상을 입었음에도 끝까지 경기를 뛰어 우승에 결정적 공헌을 해냈다. 떠나면 그만이기에 ‘용병’이라고도 불리는 외국인 선수에게도 팀을 향한 진정성, 로열티를 끌어낸 것이다.

원팀은 리더를 향한 신뢰에서 비롯된다. 그 믿음은 1) 인간적 선의 2) 공포심 3) ‘이 리더를 믿고 따르면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설 때 완결된다. 한국의 스포츠 지도자들이 대개 2번과 3번에 기반해 리더십을 끌어낸다면 최 감독은 1번과 3번으로 선수들을 감화시키는 타입이다. 현대캐피탈 센터 신영석은 “감독님이 배구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면 안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한다.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뒤 최 감독은 눈물을 흘렸다. “1차전 패배 직후에 문성민을 자극하기 위해 모진 말을 했던 미안함이 떠올라 울었다”고 고백했다. 팀 수장의 인간적 배려에 선수들은 역량 이상의 플레이로 화답했다. 최 감독조차 내심 ‘우승은 어렵다’고 생각해 마음을 비웠는데 선수들이 결코 숫자로 찍히지 않는 결속력을 발휘한 것이다. 에이스 문성민은 챔피언결정전 MVP가 됐다. 향후 실적이 쌓일수록 선수들의 무한믿음은 강화될 것이다. ‘그림이 아니라 화가’라는 말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가 다르다는 얘기다.

최 감독은 자율적, 수평적 팀 문화를 선수단에 전파하고 있다. 선수들은 경기 전날이 아니라면 숙소가 아닌 집에서 출퇴근이 가능하다. 합숙이 관행인 한국 체육계 풍토에서 독특한 실험이다. 또 경기 직전 라커룸을 선수 가족과 팬들을 위해 개방할 때도 있다. 이에 대해 최 감독은 “내가 선수들을 위해 이만큼 해주니까 너희들도 이만큼 따라오라는 의도로 실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의 방침일 뿐”이라고 말한다.

3. 감독에 대한 프런트의 신뢰

강력한 감독의 리더십은 프런트(사무국)가 토대를 마련해주는 법이다. 최 감독은 취임하자마자 프런트에 한 가지 요구를 했다. “선수단 훈련 때 프런트는 없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현대캐피탈 프런트는 이 말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사진 찍는 직원 외에는 출입엄금이다. 최 감독은 “선수들이 훈련에만 집중하기 위해”라고 말하지만 선수들은 현장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 실감했을 것이다. 최 감독이 프런트의 동의를 얻어낸 또 하나의 파격은 연봉협상 권한이다. 고용자인 프런트가 선수들의 고과를 책정하고 연봉협상을 하는 것이 당연한데 최 감독은 그 권한을 위임받았다. 감독이 인사권 외에 재정까지 장악하니 권한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 힘은 곧 선수단의 단합을 불러왔다.

현대캐피탈 프런트의 공식 명칭은 배구지원팀이다. 캐슬에 가보면 알겠지만 배구지원팀 사무실은 꽤 협소하다. 신현석 단장은 배구단 말단직원들과 같은 책상을 쓴다. 원래 프런트 사무실로 쓰이던 공간은 코치들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단장실로 쓰였던 방을 프런트 전 직원이 공유하고 있다. 신 단장은 분위기가 좋을 때 최 감독에게 “돈 좀 그만 써”라고 말하며 웃는다. 최 감독이 끊임없이 전력분석 시스템 장비의 업그레이드를 시도하고 있는 현실을 두고 농담하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그룹 차원의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들어 있다. 최 감독을 향한 정태영 구단주 이하 스태프의 전폭적 지지가 함의돼 있다. 그룹 차원에서 감독을 계약직 기술자가 아니라 현대캐피탈 배구단의 장기 비전을 설계해줄 동반자로 바라보는 것이다.

4. 시대정신을 반영한 ‘쿨’

탁월한 리더는 말의 힘(言語力)을 체득하고 있다. 배구계에서는 소위 ‘최태웅 어록’이 회자된다. 작전타임 때 어록이 빛이 나는 것은 말을 꺼낸 순간부터 마법처럼 상황의 반전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지휘자가 고비에 처했을 때 할 수 있는 방편은 선수를 교체하거나 변화를 끌어내는 메시지를 발화하는 것인데 최 감독은 여느 감독들처럼 두 가지 모두를 다 구사한다. 관건은 타이밍인데 이것은 가르쳐서 될 영역이 아니다.

아무리 데이터를 중시해도 배구는 결국 감정을 지닌 사람이 하는 것이다. 결국 리더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최 감독이 선수들에게 유독 화를 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은 조직을 넘어 위대한 조직은 구성원의 역량과 성격에 대한 정확한 측정을 전제로 한다. 현대캐피탈 배구단 선수들은 최 감독이 설정한 틀 안에서 개성을 발하며 자발적으로 코트에서 뛰어놀면 된다. 최 감독은 한계를 뛰어넘는 정신력을 강요하지 않는다. 약점을 개선하라고 특별 훈련을 시키지도 않는다. 저마다의 선수가 지니고 있는 능력을 조합해 최적 전력을 구성하는 합리적 조직운영을 지향한다. 즉 현대캐피탈 선수들은 자기들이 잘하는 것들을 해내면 된다. 예전 고도성장기의 한국과 일본 샐러리맨들처럼 “24시간 싸울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아도 되는 시대로 패러다임이 이동했다. 매력, 관심이 자원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현대캐피탈 최태웅 감독의 합리성과 세련됨에 뿌리를 둔 배구에 팬들이 감응하는 근본적 이유일 것이다. 현대캐피탈 배구단이 최강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가장 매력적인 팀임은 확실하다. 이 팀을 향한 지지는 이 시대가 무의식적으로 바라는 가치를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덧 현대캐피탈과 최 감독은 삼성화재식 한국 배구의 대안을 넘어 트렌드를 선도하는 팀이 됐다. 아마도 정태영 구단주의 신임 아래에서 최 감독은 장수 감독이 될 개연성이 높다. 한국 프로스포츠에서도 지도자가 팀과 역사를 같이하는 장수 감독이 나올 시기가 무르익었다.

최 감독은 “기본만 빼고 계속 변화를 주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한국 배구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현대캐피탈의 전력분석 노하우를 공유해도 괜찮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여기엔 ‘차별화된 혁신을 계속 추구할 것’이라는 최 감독의 자신감이 배어 있기도 하다. 앤젤라 더크워스의 베스트셀러 <그릿(Grit)>에 따르면 ‘성공은 끝까지 하는 것’이다. ‘그릿’은 IQ, 재능, 환경을 뛰어넘는 열정적 끈기의 힘’을 뜻한다. 현대캐피탈과 최 감독의 ‘그릿’이 좁게는 한국 배구, 넓게는 한국 사회에 영감을 주는 불씨가 될 수 있을까.



김영준 스포츠동아 기자 gatzby@donga.com

필자는 스포츠동아 배구팀장이다. 스포츠를 통해 정치학, 경영학, 사회학, 심리학 등 세상의 이치를 통찰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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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웅 감독이 작전타임에서 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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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해! 과감히 미스해! 범실해도 상관없어! 해야지, 안 하면 나중에 못한다고!”
- 2015년 11월14일 천안 대한항공전 5세트

“경기에 져도 좋으니까 오레올하고 (문)성민이 주지 말고 다른 사람 줘. 괜찮아.”
- 2015년 11월10일 서울 우리카드전 5세트. 세터에게 공격 다변화를 주문하며.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계속 발전되는 팀이지 우리가 잘하고 있는 팀이 아니야.”
- 2016년 2월2일 구미 KB손해보험전 3세트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너희들을 응원하고 있는 거야. 그 힘을 받아가지고 한번 뒤집어 봐. 이길 수 있어!”
- 2016년 2월9일 천안 OK저축은행전 3세트

“너는 문시호 아빠다.”
- 2016-2017 V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부진했던 주공격수 문성민에게 아들 이름을 언급.
문성민은 이 경기를 역전승으로 이끌고 4, 5차전에서도 활약하며 시리즈 MVP에 선정됐다.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B5%9C%ED%83%9C%EC%9B%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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