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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朝鮮 : 경진북정(庚辰北征)

조선 최대의 정벌 성공, 그러나 세조는 그 후속 조치에 더 힘썼다

김준태 | 213호 (2016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1469년(세조 6년), 국경을 빈번하게 침략해 노략질을 일삼던 모련위 지역의 여진족을 토벌한 ‘경진북정’이 이뤄졌다. 명나라와의 관계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던 사안을 화전양면 전략으로 완벽히 해결한 이 사례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겼다.
1)리스크가 동일하다고 해서 거기에 대한 관리방식도 항상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진족을 어르고 달래던 조선은 어느 선을 넘어 리스크의 양상이 변하자 전혀 다른 대응방식을 쓰기 시작했고 성공했다.
2)현장을 믿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세조는 자신의 핵심 참모인 신숙주를 현장 지휘관으로 임명한 뒤 그가 무한 책임과 완벽한 통제권을 갖도록 했다. 다른 신하들이 다른 의견을 내도 우선적으로 현장의 판단을 존중했다.
3)위기를 해결할 때에는 조직의 역량을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조준 정렬해야 한다. ‘여진족의 노략질을 완전히 해결한다’는 목표하에 명나라와의 갈등도, 다른 여진족 부족과의 협상도 일관성 있게, 그리고 치밀하게 풀어나갔다.


편집자주
조선에서 왕이 한 말과 행동은 거의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록 중 비즈니스 리더들이 특히 주목해봐야 할 것은 바로 어떤 정책이 발의되고 토론돼 결정되는 과정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왕과 마찬가지로 기업을 이끄는 리더들 역시 고민하고 판단하며 결정을 내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해당 정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면밀히 성공과 실패의 요인들을 분석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정통한 연구자인 김준태 작가가 연재하는 ‘Case Study 朝鮮’에서 현대 비즈니스에 주는 교훈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북방이 평정됐는가?”
“더 이상 국경을 범하는 자가 없습니다.”1

1460년(세조 6), 오랜 기간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2 로서 북방 안보를 책임졌던 양산군(揚山君) 양정(楊汀)이 임무를 마치고 귀경했다. 국경의 상황을 묻는 세조에게 양정은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고 답한다. 몇 달 전, 조선이 전격적으로 감행한 경진북정(庚辰北征)의 성과 덕분이었다.

경진북정은 국경을 빈번하게 침략해 노략질을 일삼던 모련위(毛憐衛)3 지역의 여진족을 토벌한 것으로 추장 중 한 사람인 낭발아한(浪?兒罕) 부자의 모반이 발단이 됐다. 평소 여진족은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키고 물적·인적 피해를 입히는 등 조선에 상존한 리스크로 작용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과 명나라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데다 이들 중에는 명나라의 관직을 받은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함부로 단속할 길이 없었다. 자칫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조정은 방어를 위주로 하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이들을 회유함으로써 리스크를 관리하고자 했다. 여진 각 부족의 추장과 주요 인사들에게 관직을 제수했으며 한양으로 불러들여 임금이 접견하고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저들이 요청하는 물자도 가능한 지원해주었다. 일정 수준의 출혈을 감수하는 대신 국경의 안정을 꾀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조선 조정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북방의 척박한 땅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각종 물자를 필요로 했지만 이를 직접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무역으로 충당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노략질을 수단으로 택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배반이 빈번했던 이유다. 더욱이 여진족은 수많은 부족들로 사분오열돼 있었기 때문에 전 부족을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복종하는 부족이 있으면 반항하는 부족이 있었고 자기들 부족 간의 다툼이 조선에 불똥을 튀기기도 했다.

세조가 즉위한 15세기 중반은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화됐는데 세종의 야인정벌로 숨죽이고 있던 여진족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금 조선의 땅과 조선의 물자를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계유정난(癸酉靖難,1453)과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 시도(1456) 등 조선 정국에 혼란이 거듭되면서 국경의 경계태세가 해이해지고 자신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라는 오판도 한몫을 했다.

여기에 대해 세조는 “그들이 침범하지 않을 거라 믿지 말고 내가 철저히 대비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4 며 철저한 리스크 관리를 강조하면서도 우선은 평화노선을 유지할 것을 천명한다. 야인들이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이내 용서해줬고 임금을 알현하겠다는 요청들도 모두 수용해줬다.5 여진족을 함부로 대하는 관리들을 징계하기도 했다. 저들의 행실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조선에 더 큰 이득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터진다. 모련위 지역의 추장 낭발아한(浪?兒罕)이 왕명을 거역하고 모반을 도모한 것이다.

꾸준히 토산물 등을 바치며 조선의 신하를 자임해왔던6 낭발아한은 1458년(세조 4)에 이르러 평소보다 많은 사람을 이끌고 와서 입조(入朝)7 를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함길도 도절제사인 양정이 관행을 들며 거부하자 낭발아한은 화를 내고 무례한 태도를 보이며 돌아갔다.8 낭발아한의 관직은 함길도 도절제사의 부하로 이는 엄연한 하극상이었다. 세조는 낭발아한을 질책하면서도 선물을 내려 그를 달랬는데9 그는 오히려 조선 조정을 원망했고 낭발아한의 조카인 월랑가(月朗哥)는 조선에서 파견한 통역관에게 활시위를 당겨 죽이려 들기까지 했다.10 나아가 낭발아한은 조선이 여진족을 공격하려고 한다며 힘을 합쳐 대항하자고 다른 부족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낭발아한의 아들 낭이승거(浪伊升巨)가 거짓말로 병가를 내고 아비에게 도망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격노한 세조는 낭발아한과 낭이승가를 붙잡아 오라고 명령했다. 다른 여진부족들이 오해할 수 있으니 각 추장들에게 이들의 죄를 분명히 설명하고 낭발아한만 문책할 것임을 밝히도록 했다.11 하여 낭발아한과 아들, 손자들이 체포돼 회령의 감옥에 갇혔는데12 아들 아비거(阿比車)를 비롯한 일부 자손들은 탈출하게 된다. 이후 9월 24일, 낭발아한은 효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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