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Philosophy

껍데기뿐인 아름다움은 싫다 우리는 절대적인 숭고함을 추구한다

213호 (2016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현실은 인간을 외소하게 하는 절대적 크기의 공간인 동시에 인간이 외면하고자 하는 온갖 배설물과 쓰레기들이 가득 찬 잉여물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를 마주할 때 인간은 불쾌와 역겨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나 자신 역시 언젠가는 그 배설물들처럼 부패해 소멸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나 또한 자연의 일부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숭고함을 느낀다. 이처럼 우리를 겸허하고 작아지게 만드는 현실은,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다.



편집자주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유점을 포착해 철학사상을 감각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풀어내온 박영욱 교수가 DBR에 ‘Invitation to Philosophy’ 코너를 연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어두운 전시관을 들어서면 하얀 벽면에 큰 스크린이 걸려 있다. 스크린에는 영상이 나타난다. 스크린 상단부에는 황동의 밸브에 커다란 물방울이 대롱대롱 맺혀 있다. 물방울은 점점 커진다. 이윽고 물방울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커져서 아래로 떨어진다. 이때 ‘쿵’ 하는 소리가 방 안 전체를 감싼다. 실제로는 별로 크지 않지만 컴컴하고 적막이 흐르는 방 안에서 이 소리는 마치 세상의 적막을 깨는 태초의 폭발음과 같은 엄청난 소리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음을 졸이면서 물방울을 응시하고 있는 관객들의 내면이 개입된 심리적 효과 때문일 것이다.

124_213_img1


이 전시는 한때 백남준의 조수로 일한 적이 있는 미디어 아티스트 빌 비올라(Bill Viola, 1951∼)의 작품으로 제목은 ‘그는 당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He weeps for you)’이다.(그림 1) 제목을 통해서 우리는 스크린 속에 맺힌 물방울의 이미지가 눈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눈물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스크린의 이미지를 보고 있는 관객들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관객을 대신해서 눈물을 흘리는 ‘그’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관객이 스크린에 나타난 물방울의 이미지를 응시하는 동안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자신의 이미지가 물방울 속에 거꾸로 매달려 나타난다. 실시간 카메라가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을 찍어서 관객과 전시장 일부를 스크린의 물방울 속에 담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눈물방울의 주체는 관객과 이 전시장을 모두 볼 수 있는 전능한 시선이어야 할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주체는 우리를 볼 수 있어도 우리는 그를 바라볼 수 없다. 그렇기에 이 물방울의 주체는 우리 인간을 넘어선 전능한 주체이다.

관객은 물방울을 바라보고 그것을 눈물로 인지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주체를 볼 수 없으며 그가 누구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 이 작품을 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결코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의 조형적 아름다움에서 오는 쾌감이 아니다. 관객은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신비감만을 느낄 뿐이다. 이러한 신비감은 대상의 형식적 조화나 안정적 구도에서 느끼는 미감과는 거리가 멀다. 만약 그 눈물의 정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면 신비감이나 겸허함의 감정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대롱대롱 매달린 물방울이 이윽고 떨어지면서 내는 ‘쿵’ 소리와 함께 절정에 이른다. 이 ‘쿵’ 하는 소리는 실제로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관객의 귀에는 심장을 떨리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게 들린다. 말 그대로 관객은 ‘심쿵’ 한다.

‘심쿵’이라는 말만큼 이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심쿵’ 한 감정은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보았을 때 느끼는 예외적인 감정이다. 어떤 사람을 보고 심쿵 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단지 잘생기거나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익숙한 대상에 대해서 심쿵 하지 않으며, 그저 아름답거나 잘 생긴 사람들에게 심쿵 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심쿵함을 느끼는 순간은 대상에 대해서 예외적인 느낌을 받았을 때이다. 물론 이 심쿵함의 정체를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 정체를 알아차린다면 이미 예외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며, 심쿵함을 유발시키지도 않을 터이다. 우리가 심쿵함을 느끼는 대상의 정체는 아름다움이 아닌 그 이상의 것, 즉 그 대상을 예외적인 것으로 만드는 어떤 힘인 것이다. 비올라의 작품은 관객이 아름다움 이상의 것, 즉 심쿵함을 경험하게 만든다. 이 아름다움 이상의 것, 어떤 대상을 예외적인 것으로 만드는 힘을 미학적으로는 ‘숭고(함)’이라고 부른다. 비올라의 전시를 통해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미감이 아닌 숭고함이다.



숭고는 절대적 크기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태고부터 예술작품을 보고 아름다움의 감정뿐만 아니라 숭고의 감정을 느꼈겠지만 예술의 본질이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숭고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체계화한 것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와서이다. A.D. 1세기 고대 수사학자 롱기누스의 저서로 알려진 <숭고에 관하여>에서는 숭고란 독자를 압도하는 힘으로 묘사된다. 이는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에게 계승되는데 그는 <미와 숭고의 이념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에서 숭고를 대상의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쾌감과 달리 경악과 고통, 그리고 존경의 감정이 섞인 매우 역설적인 상태로 묘사한다. 숭고는 아름다움과 달리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평온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동요를 유발하는 격렬한 감정이다. 이러한 숭고의 감정은 우리가 쉽게 지배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한 힘의 크기를 대상이 지니고 있을 때 발생한다. 숭고의 정체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위력이다.



롱기누스나 버크가 이미 숭고와 크기의 관련성을 언급했지만 숭고한 대상이 지닌 크기의 특징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사상가는 단연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다. 칸트는 숭고함을 발생시키는 ‘크기’를 두고 단지 큰 것이 아닌 ‘절대적으로 큰 것’으로 설명했다. 이 절대적 크기란 사실상 너무나 커서 측정이 불가능한 상태를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 이렇게 큰 것이 과연 존재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히말라야 산도, 나이아가라 폭포도 측정이 불가능할 만큼 크지는 않다. 하지만 칸트가 말하는 절대적 크기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보다 1㎝만 큰 사람도 절대적 크기를 지닌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느 농구 선수에게 항상 중요한 경기에서 만나야 하는 단지 1㎝ 큰 상대편 농구선수가 있다고 치자. 그 선수는 자신과 동일한 포지션인 상대방 센터에게 언제나 높이에서 밀려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현실적으로는 1㎝의 크기 차이에 불과하지만 그 선수가 느끼는 상대방 선수에 대한 크기의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에게 상대방의 선수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며 넘어설 수 없는 크기를 지니고 있다. 그 크기의 차이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124_213_img2


바로크 회화의 예를 들어보자. 이탈리아 바로크시대 회화를 대표하는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의 그림은 명암의 대비로 유명하다.(그림 2) 그의 그림을 보면 핵심이 되는 인물은 마치 연극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매우 밝은 빛으로 처리된 반면 배경은 매우 어둡다. 그의 그림에서는 르네상스 회화와 같은 시각적으로 깊이 있는 기하학적 공간감이 잘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전체 화면이 어둡게 처리되고 있으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매우 평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이 그의 그림에서 느끼는 것은 평면성이 아니다. 정반대로 관객은 무한한 공간적 깊이를 느낀다. 가령 바닥이 다 드러나 보이는 10m 깊이의 물과 3m의 깊이밖에 되지 않지만 깊이를 전혀 알 수 없는 시퍼런 바닷물 중에서 사람들이 더 많은 공포감을 느끼는 것은 어떤 물일까? 당연히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3m의 바닷물이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물의 표면밖에 없으므로 매우 평면적이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면성은 깊이의 측정 불가능성을 의미하므로 절대적인 깊이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결코 측정할 수 없는 무한한 공간적 깊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칸트가 말하는 절대적인 크기란 객관적으로 측량할 수 있는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느끼는 주관적인 크기를 말한다. 칸트에 따르면 사람들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크다고 느끼는 것은 뒤집어 보자면 자신이 한갓 왜소한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했다는 표현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면서 숭고함을 느낀다면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 아니다. 나이아가라의 엄청난 광경을 보는 순간 자연의 광활함과 끝이 없을 듯한 영겁을 느끼고, 동시에 곧 나 자신이라는 존재가 얼마만큼 왜소한 존재이며, 인생 길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를 자각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대상의 절대적 크기에 압도당해 느끼는 숭고함은 나 자신이 유한하고 왜소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깨달음, 일종의 종교적 감정과도 같은 것이다. 칸트가 숭고의 감정을 종교적 감정으로 봤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숭고란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것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가로 잘 알려진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리오타르(Jean Francois Lyotard, 1924∼1998)는 칸트의 숭고론을 충실하게 따른다. 그러나 그가 칸트의 숭고론에서 주목한 것은 숭고의 감정이 지닌 종교적 측면이나 숭고의 대상이 지닌 절대적 크기가 아니다. 리오타르에게 숭고의 핵심은 결코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는’ 숭고의 역설이다. 칸트의 숭고론에서 이미 숭고가 지닌 대상은 절대적인 크기를 지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측정할 수조차 없는 절대적인 크기를 어떻게 재현해낼 수 있을까?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중세의 고딕성당은 절대적인 높이를 앞세워 인간에게 숭고의 감정을 유발했다. 물론 오늘날 마천루에 비하면 낮고 소박한 건물일 따름이지만 아무리 높은 바벨탑을 쌓는다 하더라도 이것이 가진 절대적인 크기를 결코 재현하지 못한다. 숭고한 대상을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대상의 아름다움은 얼마든지 재현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란 대상의 조화로운 형식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현실의 공간을 원근법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시시각각 빛에 의해서 변화하는 사물의 시각적 효과를 표현했다. 그러나 대상의 숭고함을 직접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모더니즘 회화는 바로 이러한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숭고한 회화이다.

124_213_img3


우크라이나 출신의 화가 카시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의 시도는 숭고가 지닌 이러한 역설을 잘 보여준다. 그가 관심을 지닌 것은 절대적인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의 회화를 ‘슈프레머티즘(suprematism)’으로 일컫는데, 이 단어를 흔히 ‘절대주의’로 번역하는 데서도 그의 회화적 관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말레비치는 이런 절대적인 대상이란 무엇보다도 어떤 특정한 형태로 구체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말레비치의 회화는 당연히 추상화의 형태를 취했다. 그는 궁극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절대적인 대상을 재현하기 위해서 구상이 아닌 추상의 방법을 선택했으며 그 결과 흰 바탕에 검은 사각형의 형태만 그려놓았다.(그림 3)

절대적인 것, 즉 숭고의 대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숭고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서 검은 사각형은 대상의 절대성을 사각형이라는 기하학적 도형으로 추상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다. 말레비치의 시도는 단순한 추상화의 작업보다 더 급진적인 것이었다. 검은 사각형은 어떤 대상을 추상화한 것이 아니라 아예 대상 자체도 추상화하고 남은 제거의 흔적이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추상화마저도 추상화(제거)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검은 사각형이 자신의 의도를 충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나중에 검은 사각형을 아예 배경과 구분되지 않는 흰 사각형으로 대체해버렸다. 그의 그림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다면 마침내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색 캔버스만 남고 말 것이다.

절대적인 것, 즉 숭고의 대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숭고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비록 숭고함의 감정이 인간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내부의 감정을 촉발하는 것이 없다면 그러한 감정조차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숭고한 대상은 존재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숭고한 대상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숭고한 대상이란 현실 자체다. 현실이란 항상 인간이 재현하고자 하는 범위, 혹은 재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다. 가령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학교수로서, 남성으로서 현실세계에서 재현된다. 과연 이것이 현실의 전부일까? 나 자체는 교수도, 남성도 아니고 더군다나 인격자도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이러한 가면을 쓰고 살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진실의 문이 열리며 이 모든 것들은 가면에 불과할 뿐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 순간 내가 지닌 것,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허상들, 내가 소중하다고 믿는 것들은 모두 덧없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이 순간이 내가 진정으로 겸허해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숭고한 대상이란 우리가 정말 위대한 것이라고 믿는, 매우 크다고 믿는 그러한 가상의 척도들이 와르르 무너질 때 얼굴을 내미는 현실의 참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모습을 결코 재현해 낼 수가 없다. 현실 자체가 숭고한 것이다.



혐오스러운 것, 그것은 숭고의 또 다른 모습

독일 출신의 화가 한스 벨머(Hans Bellmer, 1902∼1975)는 수많은 구체관절 인형을 만들고 그것을 사진으로 기록했다.(그림 4) 구체관절 인형이란 말 그대로 팔, 다리, 목과 같은 신체의 주요 관절 부위가 움직일 수 있도록 인간의 신체를 구체화한 인형을 말한다. 벨머가 만든 구체관절 인형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끔찍한 모습을 띠고 있거나 변태나 이상성욕자들의 기호에나 적합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기한 성기를 적나라하게 노출한 노인이라든지 에로틱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여성의 모습 등이 그것이다. 벨머가 만든 이 역겨운(?) 작품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벨머의 이 끔찍한 인형들을 보고 단지 역겨움만을 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124_213_img4


벨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호불호를 떠나서 감정적 동요를 느낄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 무관심하기란 쉽지 않다. 벨머의 작품을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거실에 전시해놓고 틈나는 대로 감상하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벨머의 작품을 한 번이 아닌 그 이상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124_213_img5


미국의 사진작가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은 벨머의 구체관절 인형 작업과 유사한 작업을 한다. 그녀 역시 다소 기이한 형태의 구체관절 인형을 만드는데 이 인형을 인간의 구토물이나 배설물, 쓰레기 등과 적절하게 섞는다.(그림 5) 그녀는 전통예술이 추구하던 아름다운 대상이 아닌 ‘어브젝트(abject, 비천한 것, 혐오스러운 것)’한 대상을 묘사한다. 알고 보면 이 어브젝트한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한때 썩은 과일, 부패한 동물 시신, 해골 등을 그린 정물화가 유행한 적이 있다. 흔히 ‘바니타스(Vanitas)’라고 부르는 이 정물화는 싱싱한 과일이나 꽃을 그리는 전통적 정물화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당시 바니타스화는 쓰레기, 부패, 배설물 자체를 찬양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다소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해골의 무상함을 통해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부각시키려는 이분법적 태도가 전제됐던 것이다. 이에 반해 ‘어브젝트’ 예술은 혐오스러운 대상을 그 자체로 드러내고자 하며 불쾌한 호기심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에서 바니타스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렇다면 이 혐오스러운 것이 왜 예술의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이 혐오스럽고 비천하게 여기는 것도 불가피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현실을 보여주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면 그러한 사명은 현실의 아름다운 일부분만 도려내서 사람들의 미감을 자극시키는 것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인간은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에 살고 싶어 하며 그러한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산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그러한 가상의 세계를 뚫고 나와서 현실의 참 모습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러한 욕망을 실현하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현실은 나이아가라와 같은 엄청난 크기를 지닌 곳이어서 그것에 마주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왜소함을 자각하고 숭고해진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은 인간이 가상의 세계로부터 추방하고자 하는 온갖 배설물과 쓰레기들이 가득 찬 잉여물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를 마주할 때 인간은 불쾌와 역겨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 역시 언젠가는 그 배설물들처럼 부패해 소멸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 또한 경건함을 느끼게 만드는 숭고의 대상인 것
이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현대음악과 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 등 구체화된 예술 형식에 주목해 철학 사상을 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등이 있다.
?
동아비즈니스리뷰 329호 Fly to the Metaverse 2021년 09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