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서 배우는 삶, 그리고 경영

'불멸의 조직, 만드는 5가지 비법. 수천 년 지속된 종교에서 배우다

205호 (2016년 7월 lssue 2)

Article at a Glance

기업은 100, 국가는 500년을 넘기기가 힘들다. 그런데 유독 지금 존재하는 종교들만큼은 수천 년을 버텨왔다.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등이 그랬다. 그 놀라운 지속가능성의 원인은 다음 다섯 가지다.

1) 종교는궁극적인 관심을 추구한다.

2) 종교는 강력한 소속감을 제공한다.

3) 종교는 늘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개혁된다.

4) 종교는 지역문화에 반드시 토착화된다.

5) 종교는 이타적 삶을 추구하게 만든다.

위 다섯 가지를 자신의 기업에 적용해보자. 지속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위 다섯 가지를 다시 자신의 인생에 넣어보자. ‘성공한 삶’ ‘기억되는 삶의 기준이 보일 것이다. 

 

기업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는데

 

기업도 망하고, 나라도 망한다. 세상에 망하지 않는 조직이나 집단은 없다. 이른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시대는 끝났다. ‘한 방에 훅간다는 표현은 단순한 말장난(pun)이 아니다. 공중정원을 자랑하던 바빌로니아제국도 망했고(BC 539),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고 기염을 토하던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 제국(1804∼1815)도 역사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철학적 사유에서는 플라톤을 당할 수 없었고, 비극의 장중함에는 소포클레스를 당할 수 없었으며, 의술에 관해서는 히포크라테스를 당할 수 없었던 위대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는 왜 망했을까?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던(oikumene) 광활했던 로마제국, 중앙아시아를 종횡으로 오가면서 동서양을 호령했던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한때는해 질 날이 없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영국은 왜 지금, 저 모양 저 꼴이 된 것일까? 왜 나라는 망하는 것일까?

 

회사나 기업도 망한다. 국세청의 2015년 국세통계연보에 따르면 2014년에 대한민국에서 폐업을 신고한 사람(법인 포함)의 숫자는 총 761328명에 달한다. 소상공인들만 폐업을 신고하는 것이 아니다. 거평그룹·율산·고려증권·국제그룹·덕산그룹·동명목재·동아그룹·명성그룹·삼풍·삼미·진로·대농·기아·해태·뉴코아·쌍용·한보·동화은행·고합·우성·벽산·아남·나산·새한·한신공영·STX· 대우 등등의 수많은 대기업 집단도 역사의 무대에서 총총히 사라지거나, 다른 회사에 팔려나갔다.

 

나라도 망하고 기업도 망하는데, 절대로 망할 것 같지 않은 집단이 있다. 종교집단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아리안족이 인더스 강 유역에 이주를 시작(BC 1800년경)하면서 태동한 힌두교는 기원전 5세기경에 본격적인 종교의 틀을 갖췄는데, 지난 2500년간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중간에 무굴제국(1526∼1857)의 이슬람 통치기간도 있었고, 영국제국의 기독교 신앙과 영어 공용어 교육이 강제됐던 식민지 통치기간(British Raj, 1858∼1947)도 있었지만, 인도의 민족 종교인 힌두교는 소멸되거나 쇠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깊이와 넓이를 측량하기 어려운 광활한 힌두교의 품 안에서 불교와 자이나교 등의 자매 종교가 탄생해 종교의 확산까지 초래됐다.

 

중국의 토착 종교로 출발한 유교와 도교는 또 어떤가? 현실에 대한 기복(祈福) 심리가 강한 중국인들에게 유교와 도교가 과연 고등 종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반복되고 있지만 유교와 도교가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 여전히 종교적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유희문 한양대 교수(중국학과)의 탁월한 분석에 의하면, 중국을 남북으로 가르는 친링(泰嶺)산맥과 화이허(淮河)를 기준으로 중국의 비즈니스 패턴도 종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 중국 북부의 상인들 사이에서는유가 자본주의가 지배적이며 전통과 사회적 규범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반대로 남부 지방의 상인들은도가 실용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북방의 유가적 자본가들은 충(), (), ()을 중시하는 관우(關羽)를 섬기고, 남방의 도가적 실용주의자들은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의 정신에 따라 창의와 혁신의 가치를 선호하면서 해상의 수호신 마조(?祖)를 최고의 신으로 친다고 한다. 중국의 종교는 북방의 유가적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화웨이(華爲)와 남방의 도가 실용주의를 대표하는 알리바바의 마윈(馬云) 회장에 의해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이른바사막 종교혹은경전의 종교로 불리는 이 세 종교는 쇠락할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력한 신앙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 같은 종교라는 불가사의한 실체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기업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는데, 왜 종교는 망하지 않는 것일까?

 

물론 개인의 신앙에 대한 문제는 반드시 사적인 영역에서 논의돼야 한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절대적 가치를 신봉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기 쉽다. 따라서 종교는 가급적 공공의 장소에서 논의되지 않는 것이 좋다. 종교가 공공의 영역에서 활동범위를 넓혀가면 우리나라와 같은 다종교 국가에서는 종교 간의 충돌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따라서 이 글은 개인의 영역인 신앙의 호불호(好不好)나 자기 신앙의 배타적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마케팅에 이용하자는 말은 더욱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과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경영자들에게지속가능 경영의 참고자료를 제공하는 것에 있다.

 

 

종교의 사회적 기능: 성스러운 차양막(Sacred Canopy)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rk Weber, 1864∼1920)에 의해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이전의 종교에 대한 연구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위세에 눌려 이렇다 할 학문적 진보를 이루지 못했다. 종교(특히 서구의 그리스도교)는 신앙의 대상이지 사회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었다. 서구적 전통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진리 자체로 받아들여졌고 다른 종교의 신학은이단(이슬람)’이나미신(불교와 힌두교와 같은 동양종교)’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전통적 신학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정통 철학자들이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 대해서 분석하거나(칸트), 신앙을절대 의존의 감정(das schlechthinnige Abhaengigkeitsgefuehl)’이라고 해석하는 정도였다(슐라이에르마허, 1768∼1834). 이러한 정통 그리스도 신학의 배타적 접근이나 종교의 철학적 해석을 단숨에 뛰어넘으며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연구한 사람이 바로 막스 베버였다. 그는 유명한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책에서 자본주의의 출발점이 종교와 특별히 개신교(Protestants)의 직업윤리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음을 밝혔다.

 

, 자본주의는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개인이 근검절약하고 열심히 노동을 하면서 생긴 결과란 것이다. 막스 베버의 이러한 종교사회학적 접근은 칼 마르크스가 유물론적으로 해석했던 자본주의 발전과 상충하는 것으로 동시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문제는 자본주의 태동의 역사적 배경을 밝힌 막스 베버의 이론이 맞고 틀린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이상을 품은 개인의 신앙적 실천이 사회변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원동력의 하나로 제시됐다는 것이다. 금욕주의적인 칼뱅주의(제네바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자가 주장한 보수적 개신교 신앙) 때문에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변동이 초래됐다는 막스 베버의 이론은 그동안 그 사회의 하부구조로만 인식되던 종교와 문화의 중요성을 극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종교적 이상을 품은 개인의 신앙적 실천이 사회변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원동력의 하나로 제시됐다는 것이다.”

 

사회가 발전·변동하기 위해서는 부(토지) ()분배, 권력의 등장과 운용, 관료제의 효율성, 자연 환경의 변화, 인구의 변동 등이 중요한 지표로 간주돼 왔는데 막스 베버의 이론을 거치면서 종교 문화가 사회 변화의 또 다른 원동력임이 밝혀진 것이다. 막스 베버의 이론이 더욱 각광을 받게 된 이유는 이른바 현대화 과정(Modernization)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가 봉건제에서 근·현대화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그 사회의 내재적 종교·문화가 담당하는 사회변동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막스 베버의 이론이 재조명된 것이다.

 

막스 베버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분석한 학자가 있다. 보스턴대의 사회학 교수였던 피터 버거(Peter Berger)였다. 그는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성스러운 차양막(Sacred Canopy)’이란 용어로 설명했다. 거대한 우주 안에서 미세한 먼지와 같은 개인, 복잡다단한 현대의 사회적 관계성 속에 노출돼 있는 무력한 개인은 종교를성스러운 차양막으로 삼으며 우주와 사회 속에서의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사회적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개인이나 그 성취를 위한 경쟁에서 탈락해 실망하고 있는 개인에게의미 있는 질서(meaningful ordering)’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란 것이다. 눈부신 기술의 진보와 과학적 세계관의 확산이 심화되고 있는 지금, 왜 종교는 쇠퇴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스도교 신앙의 비과학성을 질타했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돼도, 아인슈타인 이래 가장 탁월한 과학자로 알려져 있는 스티븐 호킹이 공공연하게 신이 없다고 외쳐도, 여전히 종교가 맹위를 떨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편 종교의 특징

 

종교가 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한 자국을 남기며 인류의 기억과 함께할 것이라는 추론을 전개하기 위해 먼저 전제해 둬야 할 것이 있다. 실제로 망한 종교도 있고, 지금 건재한 종교도 미래에는 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종교의 절대 신이었던 제우스는 이제 신화의 주인공으로 어린이 만화책에만 등장한다.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를 섬겼던 엘레우시스 종교는 소멸된 지 오래다.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 맹위를 떨쳤던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는 현재 이란과 인도 뉴델리 부근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가 망하지 않는다는 전제는 성립될 수 없다. 다만 보편종교(Universal Religion)라 불리는 세계 5대 종교, 즉 그리스도교, 불교, 유교, 힌두교, 이슬람의 사회 종교사적 의미에서 접근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이 글의 목적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과 현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면서 경영자들에게지속가능 경영의 참고자료를 제공하는 것에 있다. 수천 년 동안 망하지 않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왔던 보편 종교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망하지 않는 조직이나 집단의 특징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1. 종교는 궁극적인 관심을 추구한다

종교는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을 추구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망하지 않았다. 종교는성스러운 차양막으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면서 그 종교의 신봉자들에게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 것을 요구한다. 세속의 가치를 버리고 성스러운 가치를 추구하란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출가를 하고, 신부님들은 독신으로 살아간다. 독일의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가 이런 종교의 고유한 특징에 주목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세속적인 가치나 일상적인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고 차원이 다른 궁극적인 가치의 세계를 추구하게 한다.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에압도되는 경험을 통해 신자는 영적인 세계에서완전히 항복(total surrender)’당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초월적인 거룩함(numinous)의 체험을 통해서 세속 세계의 현실적 욕구는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종교심에 대한 폴 틸리히의 이해는 지나치게 감정적 경험에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종교의 변치 않는 속성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가끔 우리는 인파가 붐비는 번화가나 지하철 안에서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마이크를 잡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영적인 세계에 완전히 항복한 사람들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광신도라 폄하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가치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AD 250∼330)가 황궁의 편안함을 박차고 나가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한 행동이나, 오를레앙의 성처녀 잔 다르크(1412∼1431)가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백년전쟁의 현장으로 출동한 행동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궁극적인 관심을 추구한다.

 

‘궁극적 관심을 추구하는 종교가 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종교를 신봉하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충성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입게 되는 물질적 손해와 시간의 소비를 자발적으로 부담한다. 스스로 시간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종교기관에 시주(施主)를 하거나(불교), 헌금을 하거나(그리스도교), 희사(Zakat, 이슬람)에 참가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공여하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다시 말하자면궁극적인 관심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공동체에 자발적으로 충성한다. 자신이 입게 될 손해까지도 기꺼이 감수할 각오를 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신앙의 자발성은 그 신앙 공동체의 확산을 위해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부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포교(布敎)라 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선교(Mission)라 한다. 다만 힌두교(인도), 이슬람(중동국가와 사하라사막 이북의 아프리카 국가), 유교(동아시아)는 지역 문화와 토착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포교를 지향하거나, 선교를 강력하게 주창하지는 않는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만이 선교 종교(Missional religions)라 할 수 있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BC 265∼232)의 포교 정신에 따라 불교는 인도라는 제한적인 국가적 범위를 넘어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지로 확산됐다. 그래서 전륜성왕(samr?t Chakravartin)이라 칭송받게 된다. 중국의 경우, 후한(後漢, 25∼220)시대 말기인 2세기 후반에 서역과 인도에서 온 역경승들에 의해 불교가 전파됐다. 이들의 행동은 강제된 것이 아니라궁극적 관심을 추구하던 신앙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또 다른 강력한 선교 종교인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다. 인문주의 운동과 르네상스가 만개하던 16세기 유럽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던 예수회(Society of Jesus) 선교사들은 목숨을 걸고 미지의 땅으로 나섰다. 스페인 북부의 귀족 출신이었던 프란체스코 하비에르(Francesco Xavier, 1506∼1552) 1542년에 처음으로 인도 땅에 발을 내딛으면서 아시아 선교의 아버지가 된다. 그의 선교 행적은 1549년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鹿兒島) 상륙으로까지 이어진다. 인도와 일본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었던 그는 결국 중국으로 가기 위해 다시 배에 올랐다가 상천도(上川島)라는 작은 섬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

 

아무도 그에게 이런 모험을 강제하지 않았지만 하비에르 선교사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는궁극적인 관심을 좇아가는 삶을 살았고,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에 전해지게 됐다. 바로 이런 자발성이 종교의 건재함을 가져온 첫 번째 이유다.

 

2. 종교는 강력한 소속감을 제공한다

폴 틸리히가 제시했던궁극적 관심은 종교의 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지만 왜 그런 현상이 생기는지에 대한 시원적인 설명이 부족했다. 도대체 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궁극적 관심을 추구하게 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게 되는가?

 

 

이 근본적인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인물이 바로 프랑스의 인류학자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1858∼1917)이다. 그는 1912년에 출간한 <종교적 삶의 기본적인 형태>를 통해서 인간이 신앙을 가지게 되는 이유를 모색했다. 인류학적 조사를 위해 그는 호주의 원주민(Aborigine)들의 신앙 현상을 기록한 선교사들의 자료를 활용했다. 원시시대의 인류가 종교를 가지게 되는 이유와 그 사회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원시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호주 원주민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호주 원주민들의 원시 종교인 토테미즘(Totemism) 연구에 집중했다.

 

그 연구의 결과는 한마디로, 자신의 부족이 속한 집단의 종교에 소속되기 위해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믿는 종교는 종교 자체의 신조나 교리 체계가 아니라 일종의 소속감(Sense of Belonging)이란 것이다. 개인은 집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 종교를 가진다면 그들이 숭배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같은 신을 모시는 집단성이다.

 

종교는 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강력한 소속감을 제공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종교의 창시자나 종교지도자의 가르침에 의해서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써 누리는 소속감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을 유지한다. 이런 에밀 뒤르켐의 연구를 계승하면서 종교의 사회적 현상을 탁월하게 분석했던 미국 워싱턴대의 사회학과 교수 로드니 스탁(Rodney Stark)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1996년에 출간한 <그리스도교의 탄생>은 종교사회학의 이정표를 장식했던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신학적 저술이 아니라 종교가 태동하는 이유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담고 있다. 또 이 책은 사회학적 논의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영학, 특히 마케팅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로드니 스탁은 <그리스도교의 탄생>이란 책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거대한 국가 종교(State religion)로 변모하는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했다. 예수에 의해 창시되고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지중해 연안으로 확산됐던 그리스도교는 사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런 미미했던 종교가 어떻게 로마제국의 거대한 국가 종교로 변모하고, 심지어 서구 정신의 모태가 될 수 있었을까?

 

로드니 스탁에 의하면, 그리스도교는 초기 신자들의 강력했던 소속감(Sense of Belonging) 때문에 세계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자들은 이미 교인이 된 사람들이 제공했던 희생과 돌봄 때문에 신자가 됐다는 것이다. 급격한 사회 변동이 진행되던 로마제국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서로 돌보면서 함께 고난을 견디면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로드니 스탁의 사회학적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곳은 미국의 대형 중산층 교회였다. 미국의 대형 중산층 교회들은 로드니 스탁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소집단 목회(Small Group Ministry), 셀 목회(Cell Ministry), 구역예배, 혹은 목장 등의 소속감을 증대시키는 목회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미국의 대형 교회인 시카고 인근의 윌로크릭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는 이런 소그룹 목회 프로그램을 통해서 교인들의 소속감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유명하고, 미국의 다른 종교 집단뿐만 아니라 일반 마케팅 회사에서도 이 교회의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3. 종교는 늘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개혁된다

위의 두 가지 현상만 놓고 본다면 종교는 마치 영원히 번영하는 존재처럼 보일 것이다. ‘궁극적인 관심을 공유하는소속감이 증대된 집단은 끝없는 확장을 거듭하게 될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았다. 특정 종교를 처음으로 만든 종교 창시자(교주)의 원래 의도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초심을 잃게 되고, 종교 권력의 남용이나 사제계급의 타락 현상이 드러나면서 쇠퇴의 국면으로 접어든 종교가 많다. ‘궁극적인 관심을 추구하는 보편종교도 예외일 수 없다.

 

지금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사회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보편종교의 세 번째 특징은 늘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개혁된다는 것이다. 종교는 개혁되면서 존재한다. 종교집단도 해체를 위협하는 집단적 위기를 피할 수 없다. 종교집단이 초기 신앙의 순수함을 잃고 관료화되거나 종교지도자의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존폐의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때마다 보편종교는 개혁됐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힌두교의 경우 초기의 역동적이었던 아리안 종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보수화됐고, 피부색이 흰 브라만 계급의 종교적 권력이 지나쳐 존립을 위협하게 됐다. 바로 이런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 인도 토착인종인 드라비다족의 시바(Shiva) 신앙이었다. 시바 신앙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불붙은 종교 개혁을 통해 힌두교는 브라만 종교에서 일반 대중이 쉽게 믿을 수 있는 대중 종교로 탈바꿈했다.

 

대승불교의 개혁도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배타적이었던 아라한(阿羅漢) 중심의 신앙 체계는 불교를 소수에 머무르게 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일반 대중도 성불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개혁은 불교를 대중을 위한 보편 종교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이런 대승불교의 개혁적 경향은 기원 후 5세기부터 본격화된 선()불교의 또 다른 개혁을 통해 새로운 종교로 거듭나게 된다. 모든 인간 내면에 불성이 존재하고, 견성(見性)해 성불(成佛)할 수 있다는 불교의 지속적인 개혁은 이후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전래되면서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합리성을 중시하는 서구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사실 개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개혁자들이 등장해예수의 종교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전개하게 된다. 가난의 영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성 프란체스코의 개혁, 500주년을 맞게 되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 그리고 ‘20세기 신학자들의 마당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평가받는 칼 바르트(Karl Barth)1 의 개혁이 대표적이다. 종교는 개혁되면서 존재해 왔다. 개혁을 멈추는 순간 종교는 소멸의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지금까지 망하지 않은 종교가 있다면 그 이유는 개혁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종교는 지역문화에 반드시 토착화된다

보편 종교가 지금까지 망하지 않는 이유는 전래된 지역에서 토착화(Contextualization)되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지파로 출발했던 그리스도교는 이집트에서 곱틱(Coptic)화됐고, 아프리카에서는 토속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그리스와 러시아에서는 정교화(Orthodox)됐다. 이탈리아에서는 가톨릭교회가 됐고, 독일에서는 루터교가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성공회가 됐다.

 

그리스도교 역사 초기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5∼230년 추정)라는 신학자는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며 신앙의 순수성을 가질 것을 강변했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그리스 철학으로 오염시키지 말자는 구호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루살렘의 종교가 아니라 토착화된 세계 종교(World religion)로 변모해갔다. 불교는 인도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현재 인도의 불교는 암베드카드(Ambedkar, 1891∼1956)라는 불가촉천민 출신의 정치가가 정치적 목적으로 집단적으로 불교 개종을 주장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거의 존재감이 없다. 인도에서 출발한 종교는 중국에서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토착화됐고, 불교의 토착화는 한국, 일본, 태국, 미얀마, 네팔 등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보편종교가 토착화되는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한 종교의 신()의 이름이 다르게 불린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절대신인 야훼(Yahweh)를 자기 종교의 절대신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야훼는 지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하느님(하나님)’으로 불린다. 일본인들은가미사마(神樣)’로 부르고, 중국인들은 상제(上帝), 혹은 천주(天主)로 부른다.

 

아프리카에서는 더 복잡하다. 케냐에서는 나봉고(Nabongo), 혹은 문비(Munbi), 잠비아에서는 암보(Ambo), 우간다에서는 카긴고(Kagingo), 잠비아에서는 나마쿵크웨(Namakungwe), 탄자니아에서는 물룽구(Mulungu), 남아프리카의 줄루족에서는 운쿠룬쿨루(Unkulunkulu)로 불린다.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각각 같은 신격(神格)을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밀한 신학적, 언어학적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보편종교는 글로벌화되면서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간단하지만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다.

 

토착화라는 적극적인 현지 적응을 통해서 보편 종교는 그 사회적 명맥을 유지해 나간다. 물론 이런 토착화의 유일한 예외적 보편 종교는 이슬람 신앙이다. 그들의 신앙은 각 지역에 토착화되지 않고 늘 메카로 향한다. 그들의 경전은 지역 언어로 번역되지 않고 쿠란의 언어인성스러운아라비아어를 고집한다. 일부 과격한 무슬림들이 이런 이슬람 신앙의 비()토착화성에 집착하며 배타적인 공격성을 유지한다. 비교적 토착문화와 잘 결합했던 인도네시아의 무슬림들이 타 종교와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는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5. 종교는 이타적 삶을 추구하게 만든다.

개인의 이익 추구를 장려하는 자본주의 정신과 가장 배치되는 보편 종교의 특징은 이타적(Altruistic) 삶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보살행(菩薩行)을 강조하고, 기독교는믿음, 소망, 사랑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설파한다. 서구의 언론이 줄기차게 폭력적이라 묘사하는 무슬림들은 사실 라마단 기간 중에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최고의 종교적 덕목으로 간주한다.

 

개인의 이익 추구를 경제활동이란 이름으로 장려하고, 치열한 경쟁을 긍정적 가치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이런 종교적 덕목은 기껏해야 심리적 위안을 얻으려는 개인의 자기 방어 심리로 폄하되기 일쑤다. 그러나 유구한 종교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본 사람들은 신앙심에서 출발한 이타적 행위는 심리적 자기 정당성 부여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준재벌 가문에 속해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안락한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한반도에 신앙을 전하겠다고 찾아온 1885년의 행동을 심리적 자기 정당성 부여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해석이다.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자의 흉탄에 스러지면서, 라마(Rama)신이시여!”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의 삶이 영국의 식민지 압제에서 인도인들을 구하기 위한 이타적 신념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종교는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덕목을 통해 영원한 인류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한여름 밤의 꿈

 

성공을 위해 질주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경영자들에게 한여름의 성찰을 제공하기 위해서 이번 호 DBR이 기획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글의 주 독자층이 이런 경영자들이라면 종교가 (지금까지) 망하지 않는 이유를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비즈니스에 대입해보길 바라면서 이 글을 썼다.

 

내가 경영하는 사업은궁극적 관심을 추구할 수 있을까? 내가 제약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면, 신약(新藥) 개발로대박을 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류를 질병의 고통에서 구하겠다는궁극적 관심으로 내 회사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을까? 나의 제품과 서비스는 소비자들에게 강력한 소속감(Sense of Belonging)을 제공하고 있는가? 왜 사람들은 애플이 신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밤새워 가게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 사람들은 일당 몇 만 원을 받고 동원된 사람들인가? 아니면 자발적으로 충성하면서 애플의 제품에서 어떤 소속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나는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의 초심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첫 출근할 때 느꼈던 그 설레는 감정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나의 비즈니스 모델은 토착화에 성공하고 있는 것일까? 오리온 초코파이는 중국에서 초코파이 정()으로 토착화됐다는데, 내 회사의 제품은 여전히 한국이라는 지역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우리 직원들이 월급을 받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그저한여름 밤의 꿈일 뿐일까?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플라톤아카데미 연구책임교수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등의 20여 권의 저서를 내며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연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최근에는 <군주의 거울> 시리즈를 출판했다.

 

생각해볼 문제

 

이 글에서는 종교가 지속되는 이유 5가지를 제시하고 이를 경영자들이 자신의 비즈니스에 적용해 생각해보도록 했다. 이를 조금 더 좁혀서 자신의 인생에 적용해보자. 인간이 지속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작게는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이고 크게는존경으로 기억되는 것일 터다. 그러한 삶을 우리는성공이라 부른다.

 

1.내가 내 인생에서 추구하는궁극적 관심은 무엇인가?

2.나는 내 주변사람들에게 울타리를 제공하고 믿음을 주고 있는가?

3.나는 항상 초심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4.나는 변화하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새로운 역할을 찾고 있는가?

5.나는 나 개인이나 내 가족만이 아니라 세상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동아비즈니스리뷰 319호 New Wave of Logistics 2021년 04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