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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거울

로마 2대왕 누마가 세운 아름다운 체제, 왜 한순간에 무너졌나

김상근 | 156호 (2014년 7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 ‘리쿠르고스와 누마편에서 스파르타의 지도자 리쿠르고스와 로마의 왕 누마를 소개했다. 리쿠르고스는스파르타식 교육을 도입해 스파르타를 그리스 최강의 도시국가로 만든 인물이다. 그는 원로원 제도를 도입해서 참주제와 민주제의 약점을 보완하고 사람들이 돈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못하도록 철로 화폐를 만드는 등 개혁입법에 나섰다. 로마의 입법자 누마는 사제가 왕에게 종교문제를 조언할 수 있도록 했고, 사람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시민의 집단을 민족이 아니라 직업과 기술에 따라 나눠 분열과 갈등을 줄였다. 그런데 두 지도자의 노력은 다른 결과를 보였다. 리쿠르고스의 개혁입법은 꾸준하게 성과를 냈으나 누마의 입법은 단기 성과에 그쳤다. 이유는 무엇일까. 리쿠르고스는 교육을 통해 지속가능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반면 누마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고 그의 노력은 단기 성과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주

고전에는 현대 지성인들이 되새겨야 할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군주의 거울을 연재합니다. 인문학 고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통찰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살다보니 별 일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당한 일, 신기한 일, 혹은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때가 있지요. 지금이 꼭 그런 상황입니다. 기원후 1세기 후반, 그리스 델포이에 살았던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해석하고 있는 제가, 지금 델포이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지난 8주 동안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했던 여러 도반(道伴)들과 함께 그리스 유적지를 답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와 함께 그리스 여행을 하고 계신 사람들은 정말 멋진 분들입니다. 공직에 계시거나, 일반 기업의 현직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고 바쁜 삶을 살고 계신 최고경영자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저와 함께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공부하고 있고, 호메로스와 플라톤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찾아 그리스 유적지를 답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최근 이룩한 괄목상대는 이런 분들의 부지런함과 노력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분들은 오늘 아침에 아테네공항에 도착했는데, 바로 마라톤 평야로 직행해서 기원전 490, 페르시아 전쟁의 유적지를 돌아봤습니다. 긴 비행기 여행의 여독도 풀리기 전이지만 이분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잊지 못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우스 청동 신상 앞에서 고전기 그리스의 미학에 심취한 이분들의 모습이 청동 신상보다 더 멋져 보였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분들은 아테네에서 버스로 2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델포이로 왔습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을 집필했던 바로 그곳입니다. 소크라테스가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란 신탁을 받았던 곳,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을 받았던 곳,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전하는 패배를 모르는 분이라는 신탁을 받았던, 바로 그 아폴로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아폴로 신전의 사제로 일했지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밤 11. 어둠이 짙게 내린 델포이의 숲 속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갑자기 헤겔이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날개를 편다는 유명한 말입니다. 지금 델포이의 밤을 지키며 구슬피 울고 있는 부엉이 소리를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도 들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플루타르코스도 바로 이곳 델포이에서 부엉이 우는 소릴 들으며 <영웅전>을 썼을 것입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밤에 날개를 편다는 것은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야 그 사건에 얽혀 있는 교훈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뜻이지요. 플루타르코스가 이곳 델포이에서 한 작업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영웅을 짝을 지어 비교하면서 그 영웅들의 삶에 나타났던 지혜와 통찰력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요. 부엉이가 날개를 펴던 늦은 밤,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을 집필하며 불면의 밤을 보냈을 바로 그 장소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제 가슴이 설렙니다. 지난 회에는테세우스와 로물루스편을 공부했지요? 이번 회에는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와 로마의 입법자 누마를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이 글을 델포이에서 쓰고 있는 저나, 한국에서 이 글을 읽게 되실 여러분들 모두를 향해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개를 활짝 펼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플루타르코스의 책을 펼칩니다.

 

스파르타의 입법자 리쿠르고스 이야기

 

‘스파르타식 교육이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그리스의 도시국가 스파르타에서 사용했던 교육방식을 말합니다. 강인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임전무퇴의 용사를 길러내기 위해 스파르타 사람들은 혹독한 교육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그 덕분에 스파르타는 그리스 최고의 용사를 길러냈지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했던 레오니다스의 300용사도 바로 이스파르타식 교육의 결과였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리쿠르고스(Lykrugos)가 바로 그스파르타식 교육을 도입해 자신의 조국을 그리스 최강의 도시국가로 만든 지도자입니다. 우선 그는 출신배경부터 남달랐습니다. 스파르타의 영웅 헤라클레스의 11대 손이었기 때문이지요. 영웅의 핏줄을 타고난 전설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헤라클레스의 11대 후손이었고 왕족이기도 했지만 리쿠르고스는 왕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이었던 그는 형이 죽자 8개월만 임시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미망인이 된 형수가 8개월 후에 아들을 낳자 리쿠르고스는 조카를 스파르타의 왕으로 정식 선포하고 왕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줬습니다. 사심 없는 그의 행동 때문인지 스파르타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이 이어졌고 아직 통치하기에는 어린 조카를 위해서 왕위를 맡아달라는 옹립 움직임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왕위를 이어받지 않기 위해 다른 나라로 오랜 기간 동안 외유를 떠납니다.

 

리쿠르고스가 처음 도착한 곳은 크레타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크레타 왕들의 선정(善政)과 안정된 사회 시스템을 보고 큰 감동을 받습니다. 사회계급 간의 적대적인 감정을 줄이고 인격과 사회의 고결함을 통해 크레타 사회의 화합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스파르타의 대립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발견한 셈입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이오니아 지방이었습니다. 그리스 동부의 해안 지역으로 지금의 터키 서부 해안가에 해당됩니다. 당시 그곳은 그리스 문명권에 속해 있었고, 그리스 건축의이오니아 양식으로도 유명한 곳이지요. 리쿠르고스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호메로스의 책을 읽게 됩니다.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한 책인 <일리아스>와 트로이전쟁을 마치고 고향 이타케로 귀환하던 또 다른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을 담고 있는 <오디세이아>를 접하게 되고, 이를 그리스 본토에 처음으로 소개합니다. 리쿠르고스는 여기서 배움의 여정을 멈추지 않고 이집트(아이귑토스), 리비아(아프리카), 이베리아(스페인), 심지어 인도까지 방문했다는 일부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는 세상을 주유(周遊)하면서 문물을 깨치고, 이상적인 정체(政體)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됐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과제는 어떻게 하면 조국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염원이었지요.

 

스파르타란 배를 침몰시키지 않기 위해 리쿠르고스는 원로원이라는 평형수를 채워 나라의 균형을 잡은 것입니다. 집권만 하면 권력을 독점하려는 왕들의 고약한 버릇을 견제하고 시민들의 비합리적인 선택을 질책하기 위해 원로원 제도가 도입된 것입니다.

 

스파르타의 시민과 왕의 초청으로, 리쿠르고스는 결국 스파르타로 돌아옵니다. 신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원과 성원 속에서 그는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입법자가 됩니다. 그가 제일 먼저 착수했던 개혁입법은 28명의 원로원을 확보하고 대의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당시에 스파르타가 선택할 수 있는 정체(政體)는 참주제 아니면 민주제였습니다. 권력을 독점하는 개인이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든지(참주제), 아니면 일반 시민들의 권력을 나눠 가짐으로서 평등권을 보장받는 방식(민주제)이었습니다. 리쿠르고스가 도입한 원로원의 존재는 이 두 제도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참주제를 선호하던 왕들은 권력을 영속적으로 독점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나중에 플라톤은 이러한 참주제의 모순을왕들의 열병이라 불렀지요. 높은 자리에 오르면 꼭 권력을 독점하려는 모습이 마치 열병에 걸린 사람과 같다는 뜻입니다. 또한 민주제의 모순은 일반 시민들이 비이성적인 판단을 할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공공의 이익보다는 자기 개인에게 주어지는 이해득실에 따라 투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리쿠르고스는 원로원 제도를 도입해서 이 두 가지 모순을 동시에 해결하려고 했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를국가라는 배()의 바닥짐으로 만들어 배의 균형을 잡음으로써 가장 안전하고 질서 있는 방식을 달성한 것이라고 평가합니다(5). 큰 파도가 밀려오거나 배 내부에 충격이 가해져도 배가 전복되지 않는 것은 배 밑바닥에 바닥짐으로 균형을 잡게 했거나 적절한 양의 평형수를 채웠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 중 하나가 더 많은 화물을 선적하기 위해 평형수를 평소의 29%만 채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스파르타란 배를 침몰시키지 않기 위해 리쿠르고스는 원로원이라는 평형수를 채워 나라의 균형을 잡은 것입니다. 집권만 하면 권력을 독점하려는 왕들의 고약한 버릇을 견제하고 시민들의 비합리적인 선택을 질책하기 위해 원로원 제도가 도입된 것입니다. 물론 외형적인 민주주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의 권익도 최대한 보장해 줬습니다. 왕이나 원로원에게는 법안의 발의권을 보장했지만 일반 시민들도거부권행사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지켜 나가도록 했습니다. 또 토지를 재분배해서 일시적인 사회 평등을 시도함과 더불어 사회가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특단의 교육 조치를 마련합니다.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 사람들이 개인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명예롭게 여길 수 있도록 혁신적인 개혁 작업을 펼칩니다. 우선 금이나 은으로 만들던 주화 제작을 중단하고 값싸고 무거운 철로 화폐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철로 된 화폐를 모아봤자 집안의 무거운 짐만 될 뿐 환금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스파르타 사람들이 지나친 재산 축적을 시도하거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기 위해 과도하게 서로 경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일반 시민들은 공동으로 식사하는 제도를 만들었고 음식은 늘 검소하게 먹도록 했습니다. 남녀의 차별을 없애고 여성들도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겸비하도록 훈련시켰습니다. 많이 소유하거나 출세하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명예를 얻는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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