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거울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인문학은 대학의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대학 밖의 학문이다. 중세 유럽 말기의 신흥 상공인 계급이 자녀들에게 ‘인간에 대한 학문’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인문학자들을 집에 거주시키면서 만들어 낸 학문이다. 현실 문제에 해결책을 주지 못하고 사변적 논쟁으로만 일삼던 중세 대학 교육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 열풍이 부는 것은 한국 대학이 현실 문제에 해결책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군주의 거울’은 9세기 경부터 신흥 제후와 봉건 귀족 등 유럽의 지도자를 위한 인문학의 중요한 장르로 각광을 받았다. 유럽의 각 나라에서는 새로운 군주가 탄생할 때마다 적절한 ‘군주의 거울’이 해당 국가의 지식인, 사제에 의해 집필됐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시작으로 현 시대에 필요한 ‘군주의 거울’을 연재한다. |
편집자주
고전에는 현대 지성인들이 되새겨야 할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군주의 거울’을 연재합니다. 인문학 고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통찰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왜 인문학이 이렇게 난리일까요?
DBR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메디치가문의 역사와 리더십에 대한 장기 연재(2010년), 마키아벨리를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하고 분석했던 장기 연재(2012년)에 이어 다시 인사드리게 됐습니다. 그동안 보내주셨던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리면서 이번에는 ‘군주의 거울’이란 장기 연재로 인사드립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저는 집필 문체를 대화체로 쓰겠다고 결정했습니다. DBR에는 경영의 통찰을 담고 있는 논리적이고 ‘딱딱한’ 글이 많기 때문에 제 연재에서는 조금 쉬어가시라는 의미에서 ‘부드러운’ 구어체로 집필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은 원래 운문(韻文)이나 대화체의 글로 집필됐습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였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운문체의 서사시(敍事詩)였고 그리스 철학의 진수를 담고 있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나 <국가>는 모두 대화체의 글로 구성돼 있지요. 그래서 저도 이번에 시작하는 DBR의 인문학 연재에 읽기 편한 대화체의 글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집필 문체를 선택하게 된 또 다른 개인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제가 드디어 연세대에서 정교수(Full Professor)가 됐습니다! (보통 이럴 때는 박수를 치셔야 합니다!) 정교수가 됐다는 것은, 이제야 제 목소리를 독자적으로 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다는 뜻입니다. 조교수, 부교수일 때는 제 주장을 펼치더라도 반드시 다른 학자들의 논문이나 학설을 참고하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이고 예의입니다. ‘정교수가 됐다’는 것은 테뉴어(Tenure)를 받았다는 것인데 아시다시피 테뉴어는 원래 ‘종신 교수직’을 의미합니다. 죽을 때까지 독자적인 방식으로 연구를 수행할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한국 학계에서는 통상적으로 테뉴어를 받은 교수도 65세에 은퇴하기 때문에 종신 교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죽을 때까지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학문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뜻은 한국에서도 유효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DBR 독자 여러분에게 ‘독자적인 방식’으로 인문학 얘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약속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용어, 딱딱한 문체,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인 개념은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읽기 편한 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주의 거울’이란 연재 제목부터 어렵다고요?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쉽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군주의 거울’에 대한 용어 설명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왜 인문학이 요즘 이렇게 난리인지, 왜 경영자들이 인문학 공부에 열광하시는지, 경영학 저널인 DBR에 왜 인문학자인 제 글이 연재돼야 하는지에 대해 먼저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중세 말기의 명문 대학이었던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의 본관 벽에 전시돼 있는 가문의 문장들. 이 대학에 자녀를 입학시킨 귀족 가문들의 문장이 볼로냐대학 본관 복도에 전시돼 있다.
요즘 각 기업에서 인문학 강연이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말 인문학이 대세입니다. 저도 여러 대학의 최고 고위자 과정이나 기업의 인문학 강연에 초청을 받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인문학 강연을 기획하시는 교육 담당자들의 얘길 들어보면 다들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또 인문학 강연회를 자주 개최합니다. 그러나 막상 강연 자체는 “재미가 없다”고 합니다. 초청 강사들의 인문학 강연이 현실과 동 떨어진 주제를 다루는 것 같고 지루하다는 것이지요. ‘내가 왜 이런 강의를 들어야만 하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을 ‘재미있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강사’를 찾는다고 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다들 인문학, 인문학 하는데 왜 정작 인문학은 재미가 없는 것일까요? 사실 이런 현상은 대학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인문학은 거의 고사(枯死) 상태입니다. 학생들은 학부 과정에서 의무적으로 일정 숫자 이상의 인문학 수업을 수강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문학 수업은 수강자가 없어서 폐강되기 일쑤고 강의가 개설된다 하더라도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졸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왜곡된 현상이 계속 나타나는 것일까요? 왜 경영자들은 인문학을 배우겠다고 열심인데 정작 인문학은 재미가 없고, 또 대학에서는 계속해서 ‘인문학의 위기’가 신음처럼 들려오는 것일까요?
이것은 인문학에 대한 오해 때문에 빗어진 현상입니다. 인문학의 기원과 목적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불편한 생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인문학(Studia humanitatis)’이란 단어가 최초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401년부터의 일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역사, 철학, 문학 등의 인문학 분야가 발달돼 있었고 로마 공화정 말기의 사상가였던 키케로(기원전 106∼43년) 같은 사람도 이와 비슷한 개념인 휴머니타스(Humanitas·인간됨)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인문학, 즉 스투디아 휴머니타티스(인간에 대한 학문)는 1401년 레오나르도 브루니(1370∼1444년)의 글에서 처음 사용됐지요. 그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는데 니콜로 데 니콜리(Niccolò de’ Niccoli, 1364∼1437년)라는 다른 인문학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페르라르카가 ‘스투디아 휴머니타티스’를 부활시켰다”고 기록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설명이 복잡해졌지요? 인문학은 1401년부터 공식적으로 등장한 개념인데 페트라르카라는 인물이 처음 사용했다는 것으로 기억해 두시면 되겠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조금만 더 상세히 설명 드리지요. 당시 유럽에는 명문 대학이 존재했습니다. 한국에서는 ‘SKY’라는 명문 대학이 있지요? 중세 말기의 유럽에는 ‘PBS’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공영방송 Public Broadcasting System이 아니라 파리(Paris)대학, 볼로냐(Bologna)대학, 그리고 살레르노(Salerno)대학의 첫 글자입니다. 물론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이나 스페인의 살라망카대학 같은 명문 대학도 있었지만 PBS 대학들은 각각 신학, 법학, 의학에서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런 대학들의 교과 과정은 중세 스콜라 철학을 바탕으로 발전했습니다. 스콜라 철학이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지요.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논리 체계를 수업시간에 사용했기 때문에 토론의 주제는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학의 수업은 요즈음처럼 교수가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으로 전개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을 ‘스콜라 방식’이라고 합니다. 먼저 교수가 그 분야의 권위자인 유명한 학자의 문장(명제)을 읽고 그것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을 간단히 설명해 줍니다. 보통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 나오는 문장(명제)을 읽어줄 때가 많았습니다. 이것이 교수가 하는 역할의 전부입니다. 나머지 수업 시간은 모두 학생들의 찬반토론으로 채워집니다. 학생을 양쪽 진영으로 나누고 한쪽은 찬성을, 다른 쪽은 반대 주장을 펼치게 하지요. 이때 정교한 논리를 사용해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해야 합니다. 중세 대학에서 활용되던 가장 기초적인 논리는 ‘삼단 논법’이었지요? 사람은 죽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다. 고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죽는다. 이런 논리를 근거로 학생들은 합리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합니다. 저도 연세대에서 강의하면서 학기마다 이런 스콜라식 토론 수업을 개설합니다. 이런 토론 수업에서는 사고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마련이지요. 논리적 사고의 훈련이 돼 있지 않은 학생들에게 참 어렵고 힘든 수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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