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 Management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로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부실한 초동 대처, 오락가락한 구조인원 집계 발표, 승객보다 먼저 탈출한 선장 등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이어지면서 침울함을 넘어 공분까지 자아내고 있다. 세월호 소속 선사인 청해진해운은 지난달에도 해상 사고를 일으킨 전적이 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400톤급 여객선이 어선과 충돌한 사고였다. 이달 초에는 청해진해운 소속의 또 다른 여객선이 연료 공급 탱크 이상으로 엔진이 멈춰서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1건의 큰 재해가 발생하기 전에는 그와 유사한 경미한 재해가 29건이 일어났고, 그전에는 이미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사소한 사고가 300번 일어났기 마련이라는 ‘하인리히 법칙’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리스크 관리의 시작은 위기 요인을 제때에 감지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하인리히 법칙이 시사하듯 아무리 큰 재해도 사전 징후를 제때에 포착한다면 가능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딜로이트의 분석에 따르면, 기업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고의 약 80%는 경영자의 실수에 의해 일어나고, 그중 80%가 경계심 또는 상황에 대한 인지도가 부족해 발생한다. ‘블랙 스완’ 현상이 일상화된 21세기에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선 조그마한 대내외 환경 변화나 사소한 위기 징후도 놓치지 않고 감지해 낼 수 있는 역량이 요구되는 이유다.
이를 위해선 먼저 리스크 요인들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유형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무엇이 리스크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위기 징후를 감지해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2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장수기업 듀폰의 사례를 참고해볼 만하다. 듀폰은 회사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상황을 식별하기 위해 매우 구체적인 ‘리스크 맵(Risk Map)’을 만들어 놓고 위기 발생 시 조기 경보를 울릴 수 있는 업무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구현하고 있다. 즉, 가능한 리스크를 크게 1) 사업모델(예: 글로벌 비즈니스 전략, 아웃소싱 선정 등) 2) 시장(예: 신용등급·이자율 변동, 시장점유율 등) 3) 이벤트(예: 법규·규제, 분쟁·소송 등) 4) 운영(예: 시스템 중단·장애, 자연재해 등) 등 4가지로 유형화하고 수십여 개에 달하는 하위 리스크들을 세부적으로 구분해 정의해 놓고 있다. 체계적인 리스크 대응 매뉴얼을 갖고 있는 건 물론이다. 위기 상황 정의부터 위기 대응팀의 구성, 담당자별 행동 수칙, 연락 체계 등이 상세하게 짜여져 있어 위기 발생 시 정해진 명령체계와 명확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
듀폰이 오늘날 리스크 관리에서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경영철학의 공로가 크다. 듀폰 사무실에선 어디에서도 문턱을 찾아볼 수 없다. 직원들이 혹여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모든 유리문에는 안전유리용 접합필름이 들어가 있다. 만에 하나 태풍으로 유리문이 깨져도 파편이 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비상 대피로 안내 및 안전 교육은 전 세계 듀폰 사업장의 의무 사항이다. 교육 내용 중엔 필통에 필기구를 꽂을 때에는 손이 찔리지 않도록 펜촉을 아래로 향해 꽂는다는 등의 세부 사항까지 포함돼 있다. 문서로 된 정책을 현실로 실체화시킨다는 목표 아래 사소한 내용까지 정해놓은 덕택이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일터’라는 듀폰의 명성 뒤에는 리더의 강력한 의지와 솔선수범이 자리 잡고 있다. 듀폰 설립 당시인 19세기 초만 해도 노동자들 사이에선 술을 마시고 일하는 게 관행이었다. 창업자인 E. I. 듀폰은 안전이 최우선 가치임을 강조하기 위해 근무 중 음주·흡연 금지 등 안전규칙을 명문화해 직원 계도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아예 공장 한가운데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다 1818년 3월19일, 공장 직원 하나가 낮술을 마시고 일하다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 이 사고로 당시 공장 직원의 3분의 1이 사망했고 듀폰의 부인과 어린 아이까지 큰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듀폰은 그런 일을 겪고도 부서진 집을 수리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살았다고 한다. 사고 여파로 재정적으로 힘들었지만 공장 안전을 위한 투자에 더욱 집중했고 근무 중 음주 위험에 대한 직원 교육을 한층 강화했다. 사망한 근로자의 유족들을 위한 연금제도까지 만들어 책임 있는 기업 시민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이 같은 듀폰의 진심은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대형 폭발 사고 이후, 공장의 강 건너에 살던 사람들까지 하나둘씩 공장 옆으로 이사를 오는 등 듀폰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 말로만 ‘안전’을 공허하게 외치며 정작 안전 불감증에 빠져 계속 똑같은 사고를 반복하고 있는 한국의 여러 기업 지도자들이 곰곰이 되새겨볼 대목이다.
이방실 기업가정신센터장 smile@donga.com
필자는 서울대 영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석사)을 졸업했고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올리버 와이만에서 글로벌화 및 경쟁전략 수립 등과 관련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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