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에서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이 작품은 개봉 18일 만에 누적 관객 수 600만 명을 돌파했다. 국내 개봉된 애니메이션 흥행 성적으로 역대 최고였던 ‘쿵푸 팬더2(506만 명)’의 기록을 한 달도 채 안 돼 훌쩍 넘겼다.
관객들이 겨울왕국에 열광하는 이유는 북유럽의 환상적인 설경(雪景)을 고스란히 재현해 낸 화려한 영상미, ‘라이온 킹’ 이후 디즈니 최고의 걸작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라는 평을 받기에 손색없는 노래와 음악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원작에 대한 참신한 재해석에 바탕을 둔 탁월한 스토리다.
디즈니는 메인 캐릭터를 결정할 때 동화 속 핵심 주인공(카이와 겔다)이 아닌 주변부 인물(눈의 여왕)에 초점을 맞췄고 이성 친구 간 사랑이 아니라 자매 간 우애로 구도를 바꿨다. 이렇게 탄생한 자매공주 엘사와 안나는 백설공주, 신데렐라, 오로라 등 소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기존 디즈니 공주 캐릭터들을 비웃듯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진취적 인물로 묘사된다. 차갑게 얼어붙은 언니 엘사의 마음을 녹인 것도 왕자의 키스가 아닌 여동생 안나의 사랑이다. 왕자는 되레 왕위 찬탈을 위해 공주를 속이고 위협하는 비열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겨울왕국은 2006년 디즈니에 인수된 픽사의 문화가 디즈니에 녹아들어간 결과물로 볼 수 있다. 겨울왕국의 공동 감독인 제니퍼 리는 초기엔 감독이 아닌 작가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까지 그녀의 주요 경력은 ‘주먹왕 랄프(2012)’의 스토리를 담당한 게 전부였다. 스토리 책임자인 리를 디즈니 역사상 최초의 여성 감독(장편 애니메이션 분야)으로 발탁한 사람이 있다. 바로 픽사의 1등 창업공신이자 현재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두 곳 모두의 최고창의성책임자(CCO·Chief Creative Officer)를 맡고 있는 존 라세터다. 창조적 스토리야말로 애니메이션 제작의 핵심이 돼야 한다는 픽사의 철학이 디즈니에서도 발현한 상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995년 ‘토이 스토리(감독: 존 라세터)’를 필두로 영화계에 디지털 혁명을 일으켰다고 해서 픽사의 경쟁력을 기술력에만 한정시킨다면 큰 착각이다. 픽사의 핵심 경쟁력은 창조적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역량이다. 이미 잘 알려진 고전 동화에 기초해 작품을 만드는 디즈니와 달리 픽사는 이전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창조적 이야기를 생산하기 위해 조직의 역량을 집중 투입한다. 당연히 애니메이션 제작도 감독 등 필름메이커의 주도하에 이뤄진다. 필름 제작 시 전통적으로 경영진의 입김이 거센 디즈니와 차별화되는 점이다.
피인수기업(픽사)의 인재였던 라세터가 인수회사(디즈니)의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디즈니의 최고경영자(CEO) 로버트 아이거 덕택이다. 그는 독선적 경영 스타일로 2005년 불명예 퇴진한 마이클 아이즈너의 후임이다. 아이거는 픽사 인수 후 픽사의 공동 창업자인 에드 캣멀(현재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사장)과 존 라세터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부활을 책임져 달라”고 부탁했다. ‘주인’인 아이거가 ‘객’에게 안방을 내주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제안을 한 이유는 드림웍스, 픽사의 공세에 밀려 2000년대 이후 퇴색된 디즈니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라세터의 리더십 아래 디즈니는 ‘공주와 개구리(2009)’ ‘라푼젤(2010)’ ‘주먹왕 랄프’ 등을 내놓았고 드디어 겨울왕국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거대 기업인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할 때 일각에선 픽사가 독창적 색깔을 잃고 디즈니의 일개 사업부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아이거는 픽사의 독특한 문화와 정체성을 그대로 인정했고 양 스튜디오 모두 각자의 색깔에 맞는 작품을 내놓도록 했다. 심지어 그는 캣멀, 라세터 등 적진의 장수를 중용해 피인수기업의 문화가 인수기업으로 흘러들어오게 했다. 즉, 모든 연령층이 감동받을 수 있는 동화 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디즈니 고유의 색깔은 유지하되 창조적 스토리와 필름메이커의 역할을 중시하는 픽사의 문화를 받아들여 폐쇄적 우월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유도했다. 기업 간 인수합병 과정에서 화학적 결합을 통해 최대의 시너지를 일으키기 위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볼 때다.
이방실 기업가정신센터장 smile@donga.com
필자는 서울대 영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석사)을 졸업했고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올리버 와이만에서 글로벌화 및 경쟁전략 수립 등과 관련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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