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
편집자주
모두가 ‘창조’를 말하는 시대지만 정작 정확한 개념 정의도, 진정한 의미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창조성’에 대해 10여 년 전부터 연구해 온 신동엽 연세대 교수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진행한 각종 인터뷰와 연구결과 등을 토대로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2012년 11월3일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의 디스커버리 그린파크 음악당.
객석에 각양각색의 청중들이 모였다. 인종, 연령, 성별, 직업, 문화적 배경이 모두 다르고, 출신 국가가 다양한 만큼 성씨도 다양하다. 막이 올라가고 동양인 여자 셋, 미국인 남자 하나가 무대에 섰다. 네 명의 성악가는 한국 어머니들이 출산한 딸을 위해 요리해주는 ‘미역국’을 소재로 한국계 이민 가족 여성들의 3대에 걸친 서사를 노래한다. 관객들에게는 그 이름도 생경한 ‘미역국’. 게다가 연주에는 일반적인 서양악기의 현대음악 선율 위로 우리 전통의 가야금 소리가 덧입혀진다. 40여 분 남짓 되는 오페라의 막이 내리자 관객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인다. 무엇이 인종과 문화적 배경이 우리와 전혀 다른 이들을 울렸을까? 미국 평단의 극찬을 받은 ‘우리 엄마의 엄마로부터(From my mother’s mother)’라는 이 오페라를 작곡한 사람은 한국인 여성 작곡가 김지영이다.
‘선두 따라잡기’식 창조혁신 시도의 명암과 내면 탐색의 중요성
창조적 혁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맨 먼저 하는 행동은 그 분야의 최첨단에 있는 선두가 현재 하고 있는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서 따라 하는 것이다. 바로 ‘선두 따라잡기(Catch-Up)’다. 선두의 최신 추세를 따라잡을 경우 창조적 혁신가의 대열에 쉽게 합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경우 아예 이런 시도를 ‘초우량 기업 베스트 프랙티스 벤치마킹’이라는 구체적 전문 용어로 부르며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다.
선두를 관찰해서 모방하는 벤치마킹 전략을 쓰면 후발 주자라도 노력 여하에 따라 출발 지점을 선두의 바로 뒤로 가져 가기도 하고, 때에 따라 선두를 따라잡고 추월할 가능성도 생기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전략을 택한다. 이런 면에서 모방이 혁신의 출발이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선두 따라잡기’를 통한 창조적 혁신 전략에는 몇 가지 함정이 있다.
첫째, 선두 따라잡기와 창조적 혁신은 전혀 다른 역량을 요구한다. 따라잡기는 선두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달려야 할 방향이 이미 정해져 있다. 단지 선두에 비해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가 관건이다. 선두보다 더 빨리 달릴 방법을 찾아내면 따라잡아서 추월할 수도 있다. 창조적 혁신은 선두를 포함한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영역에 맨 먼저 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많은 경우 창조적 혁신은 선두가 달리는 방향과 전혀 다른 새로운 방향을 찾아내는 데에서 창출된다. 선두가 달려온 길을 선두보다 더 빨리 달려서 마침내 추월하더라도 새로운 지평을 연 창조적 혁신보다는 결국 선두가 이제까지 이뤄놓은 성취 위에 돌 하나 더 쌓는 정도의 누적적 개선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둘째, 설사 선두가 미래에도 상당 기간 중요한 가치를 창출할 방향으로 달리고 있기 때문에 선두를 추월하기만 하면 창조적 혁신가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후발 주자가 선두를 따라잡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선두도 후발주자가 따라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달리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선두는 다른 대다수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후발주자가 열심히 달려 선두를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선두는 이미 오래 전에 다른 데로 옮겨 가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에 나오는 뒤로 움직이는 길에서는 길보다 빨리 뛰어야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레드퀸 경쟁(Red Queen Competition)’의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적 혁신의 바람직한 방법은 무엇일까? ‘창조적 혁신’의 개념 그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자신이 그 이전까지 하지 않던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일반적 혁신과 달리 ‘창조적 혁신’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누구도 달성한 적이 없는 새로운 가치창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적 혁신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다른 누구도 모르는 자신만의 독창적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그 누구도 모르는 자신만의 독창적 아이디어를 찾아낼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엔가 숨어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새로운 창조적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다양한 방향으로 안테나를 켜고 세상 구석구석을 바쁘게 뒤지고 다닌다. 즉 창조적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시야를 바깥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놓치는 창조적 아이디어의 보고가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내면이다.모든 사람은 각자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독특한 삶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지구상에 살아온 삶이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의 역사를 구성하는 무수한 경험들 중 몇 가지가 다른 사람들과 겹칠 수는 있으나 모든 경험들이 완벽하게 겹칠 수는 없다. 즉 시대에 따라, 문화적 전통에 따라, 사회구조적 위치에 따라, 가족배경에 따라 각자의 경험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똑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그것이 각자에게 미치는 영향과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이는 기업과 같은 조직들도 마찬가지다. 전략경영의 자원기반관점(resource based view)에서는 각 조직이 가진 경험이 축적돼 형성된 루틴(routine)들의 조합은 다른 조직들이 모방할 수 없으므로 지속가능한 차별적 경쟁우위의 원천이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그리고 구석구석 살펴보는 내면의 탐색과 성찰이 창조적 혁신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인 것이다. 그림동화의 파랑새에서 보여주듯이 역설적으로 온 세상을 그렇게 찾아 헤매던 창조적 아이디어의 보고가 바로 자기 내면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와 동료 학자들이 21세기 시대정신의 핵심인 창조적 혁신의 원천과 원리를 다각적으로 탐구해 조만간 <21세기 창조성의 원천>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할 책에서도 이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3년간의 연구과정에서 인터뷰했던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세계적 예술가들 대부분은 이미 자기 내면에 대한 치열한 탐색과 깊은 성찰이 습관화돼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내면탐색형 예술가’가 바로 이 글에서 소개할 세계적 작곡가 김지영이다. 물론 김지영뿐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도 대부분 자신의 경험과 내면을 끊임없이 되돌아봄으로써 창조적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고 있었다. 인류의 문화예술적 지평을 넓혀온 대부분의 해외 예술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예술가들은 창조적 예술의 아이디어와 영감을 찾기 위해 자기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그리고 깊게 뒤지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시야는 밖으로 향해 있지 않고 안으로 향해 있다. 이 예술가들은 자신의 뿌리, 자신이 살아온 과정과 경험, 자신의 문화적 배경과 전통이 새로운 창조의 씨앗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내면과 뿌리는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창조적 예술은 자기 내면에서 나온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다. 창조적 예술을 찾는 안으로의 끝없는 여행을 계속 하는 이유다.다시 말해 이들은 내면에서 소재를 찾아 자기만의 스토리텔링을 하는 예술가들이다.
이들의 창작물들은 무엇보다 예술가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자기 목소리로 전달하기 때문에 작가의 몸에 착 붙어 있고 편안하며 완성도가 높다. 각자의 내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에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도 있고 가족사도 있으며, 자신이 속한 사회나 나라 문화권의 전통과 역사도 스며들어 있다. 이 모든 것이 창조적 예술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이런 내면의 구성요소들의 집합은 예술가마다 다 다르므로 독창성과 차별성은 일단 보장된다. 관건은 이를 어떻게 완성도 높은 창조적 예술의 형태로 표현해내느냐다.
우리 국악의 독특한 농현 울림을 서양음악의 형식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음계(living tone)’라는 독창적 개념으로 표현한 윤이상, 헝가리 민속음악을 현대음악으로 승화시킨 벨러 버르토크,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미국 빈민가 흑인들의 재즈음악을 클래식 음악으로 승화시킨 조지 거슈윈, 대중적 민속 춤곡인 탱고를 세계적 클래식 예술로 발전시킨 아스토르 피아졸라. 이들은 모두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속한 문화와 사회에서 창조적 예술의 소재를 찾아낸 사람들이다.
아르헨티나의 탱고클럽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일하면서 클래식 음악을 독학하던 피아졸라가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갔을 때의 사례는 이런 내면의 탐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퇴폐적이라는 비판까지 받은 대중 민속음악이었던 탱고를 넘어서서 본격적인 클래식 음악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피아졸라는 자신이 작곡한 곡들을 들고 세계적 음악교수 나디아 불랑제를 찾아갔다. 피아졸라의 곡들을 자세히 살펴본 불랑제는 “다 좋은 곡들이군. 그런데 이 부분은 쇤베르크를 닮았고, 이 부분은 라벨과 비슷하네. 피아졸라는 도대체 어디 있지?”라고 물었다. 당황한 피아졸라가 자신이 탱고클럽을 위해 작곡했던 몇 곡의 탱고를 연주했다. 그러자 불라제의 표정이 바뀌며 “바로 거기에 피아졸라가 있네”라고 하며 자신만의 뿌리로 돌아가 자신만의 음악을 계속 발전시킬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세계적 극찬을 받고 있는 ‘신탱고’다.
미술에서도 샤갈의 그림들은 예외 없이 어린 시절 그가 러시아 유태인으로 자란 고향 마을과 자신의 아내와 사랑 등 자기만의 스토리를 자기만의 아름다운 색채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이 자란 뉴욕 브루클린 빈민가 건물벽의 그래피티 낙서를 현대 미술의 중요한 사조인 신표현주의로 발전시킨 ‘검은 피카소’ 장 미셸 바스키아도 여기에 속한다.
즉 이런 예술가들에게 자신의 내면은 창조성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자 보물들이 가득 묻혀 있는 노다지 금광인 것이다. 따라서 굳이 자신의 것이 아닌 낯선 것들로 가득 찬 밖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주인공인 김지영이 어떻게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세계인을 감동시킨 창조적 음악을 작곡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김지영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면 그녀는 현재 미국 뉴욕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세계적 작곡가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연세대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애나대에서 석사를,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들을 음악을 통해 만나게 하려는 시도인 요요마의 실크로드 프로젝트에 참여해 극찬을 받으며 세계적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서양 음악과 한국 전통 음악의 음색, 소재, 정서, 악기, 연주법을 창조적으로 결합한 작품들로 세계 음악계에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밀회(Tryst)’ 에밀레종을 소재로 한 ‘고대의 종(Ancient Bell)’ ‘우리 엄마의 엄마로부터(From my mother’s mother)’ 등 세계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은 음악들을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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