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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행주대첩, 권율의 실수와 만회

임용한 | 140호 (2013년 11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593 2월 권율이 이끄는 1만의 조선군이 행주나루를 건넜다. 감개무량한 도하였다. 왜군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한 달 만에 수도를 빼앗기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한 지 약 1년 만에 조선군이 한양으로 진입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한양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권율 개인도 감회가 남달랐다. 권율은 8개월 동안 전라, 충청도 병력을 주축으로 한양 탈환을 시도했다가 광교산에서 왜군에게 대패한 기억이 있다.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이 패전 덕분에 황진 등 몇 명의 뛰어난 장수들이 의기투합해서 패잔병을 합치고 병사를 조련했다. 왜군을 보기만 해도 도망치던 군대가 싸울 수 있는 군대로 다시 태어났고 마침내 한양 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됐다.

 

한양 탈환에 나선 권율

그러나 아직 조선군은 단독으로 한양을 탈환할 능력은 부족했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평양에서 남진하고 있는 이여송의 명나라 군대였다. 명군이 한양에 있는 왜군을 몰아내면 권율의 조선군은 탈출로를 봉쇄하고 왜군을 요격할 계획이었다. 유성룡은 이 계획에 굉장한 기대를 걸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비롯해서 왜군의 지도부는 한양에 있었다. 이들을 잡거나 살해한다면 임진왜란을 종결할 수도 있었다.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군이 워낙 멋진 승리를 거두었던 터라 조선은 명군의 승리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평양성은 조선 최고의 요새였지만 서울 도성은 나무꾼들이 쉽게 넘어 다닌다고 할 정도로 조금 높은 담장에 불과했다. 이중성벽 같은 기본적인 방어시설도 없는 성이었다. 그래서 선조가 한양을 방어할 생각도 않고 도망쳤지만 이제 공격할 입장이 되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왜군도 평양성은 왜성의 축성기법을 사용해서 방어 시설을 보강했지만 한양 도성은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손도 대지 않았다.

 

원래 권율은 한강 남쪽에서 대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적을 소탕해야 한다는 마음에 나루를 건너 강북으로 들어왔다. 자신감이 넘친 권율은 아예 무악재까지 진군해서 주둔하려고 했지만 부하들이 만류해서 중단했다. 게다가 무악재로 보낸 정찰대가 왜군의 습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래서 행주나루 옆의 작은 야산에 병사를 주둔시켰다. 이 야산은 실록에서는 그저 성산(城山)이라고 언급돼 있다. 오래된 토성이 있었지만 지형을 깎아낸 흔적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성벽도 남아 있지 않았다.

 

권율의 명을 어긴 조경

군대는 하루를 머물러도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고 쉬는 법이다. 그게 군사학의 철칙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땅은 이 철칙을 지키기가 힘들었다. 대부분이 화강암 암반인 탓에 땅을 1m 파는 데도 몇 시간이 걸렸다. 권율은 다가올 결전을 대비해서 병사들을 쉬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부하 참모 몇 명이 원칙을 들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권율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일로 잠시 어디를 다녀오게 됐다. 권율이 없는 틈을 타서 조방장 조경이 무단으로 공사를 강행했다. 토성은 축대와 같은 구조여서 땅이 계단형으로 깎여 있을 뿐 엄폐물이 전혀 없다. 조경은 이중으로 목책을 세우고 목책 뒤로 참호까지 팠다. 이 공사를 단기간에 마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틀 동안 공사를 강행했다. 권율은 돌아와서 이 모습을 보고 화를 냈지만 금세 무안하게 돼버렸다. 공사를 끝내자마자 왜군 3만이 몰려왔다.

 

조선군이 행주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이여송 군은 벽제관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도주했다. 그러나 권율은 이 사실을 몰랐다. 명군을 격퇴한 왜군이 조선군이 한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마저 쓸어버리기 위해 한양에 주둔한 전 병력을 동원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기록된 행주산성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행주산성 전투라고 하면 여성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랐다고 하는 행주치마로 유명하다. 그러나 행주산성 전투는 민간인이 개입하거나 피난해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다만 이 산에 돌이 많았고 수성전에서는 화살 못지않게 돌이 좋은 무기가 됐다. 조선군은 석전의 풍속이 있을 정도로 돌팔매가 장기라 돌멩이 공격이 화살과 첨단무기인 총통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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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용한

    임용한yhkmyy@hanmail.net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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