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억센 연변 억양의 사람이 “○○은행 직원입니다”라며 전화를 걸어온다면 중국 동포에 대한 편견이 없어도 십중팔구는 “혹시 ‘보이스피싱(전화사기)’ 아닐까”라는 의심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화를 받은 사람이 연변 출신의 이주 노동자라면 어떨까. 친근한 고향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지도 모른다. 언어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판단 과정에 끼어들기 때문이다.
같은 말도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온다. 심지어 들리는 강도도 다르다. 외국에 나가 시끄러운 레스토랑에 앉아 있을 때 멀리서 얘기하는 우리말이 또렷하게 들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외국이라서만은 아니다. 시끄러운 연회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 속삭이기만 해도 뒤를 돌아볼 정도로 귀에 쏙쏙 들어온다. 비슷한 언어의 끌림 효과다.
비즈니스 현장도 마찬가지다. 고객을 일대일로 상대하는 음식점이나 쇼핑몰과 같은 서비스기업에서는 직원의 말 한마디가 서비스의 성패를 좌우한다. 셀프서비스와 같이 고객의 참여와 역할을 중시하는 서비스 모델에서는 고객과 직원끼리 주고받는 대화의 중요성이 더 크다. 문제는 브랜드, 광고, 인쇄물과 같은 간접적인 언어를 활용하는 마케팅에는 투자를 늘리면서도 정작 서비스의 성패에 직결되는 고객과의 접점에서의 언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다는 것이다.
지방자치와 다문화 사회를 일찌감치 경험한 서구기업은 언어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있다. 2011년 영국 맨체스터 국제공항은 콜센터 직원들에게 사투리를 가르치겠다고 발표했다. 표준말을 써도 시원찮을 판에 사투리를 가르친다니. 우리 상식으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언어의 끌림 효과를 이용해 지역 고객에게 다가가려는 선택이었다. 공항 측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콜센터를 맨체스터 인근으로 옮기고 맨체스터 사투리와 억양, 맨체스터 문화 등을 집중적으로 교육해 고객과의 거리를 좁혔다.
언어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대표 기업이 미국의 온라인 쇼핑몰회사인 자포스다. 이 회사는 2003년 비용 절감차원에서 콜센터를 인도나 필리핀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곧 포기했다. 인도나 필리핀인의 어색한 영어 발음은 문제가 아니었다. 토니 셰 창업주는 “줄리아 로버츠가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에서 신었던 신발을 찾아달라’는 식의 고객의 요구를 이해하고 응대할 정도로 미국 문화를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며 해외 아웃소싱 계획을 철회했다. 대신 라스베이거스로 콜센터를 옮겼다. 고객 응대를 회사의 핵심가치이자 역량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어는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 경영에서도 주목을 받는다. 기업들은 회를 뜨듯 고객을 세분화하고 고객 통찰력을 찾아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눈에 불을 켠다. 글로벌 보험사인 미국의 어슈어런트는 콜센터로 문의하는 고객들의 과거 상담 경력은 물론이고 고객의 성격, 사투리 사용 여부 등과 같은 내용까지 정밀하게 분석해 최적의 콜 센터 상담원을 배치했다. 이런 식으로 상담원의 전화를 거부하는 요청을 20% 줄이고 보험 판매를 29% 정도 끌어올렸다고 한다.
콜센터에서만 이런 변화가 일어날까. 요즘 서비스경영학계에서는 서비스 이전, 서비스 접점, 사후 서비스와 같은 단계에서 언어가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선택을 이끌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예컨대 고객들은 동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기업이나 가게의 간판 광고를 선호하고 말이 통하는 직원과 대화할 때 더 큰 만족을 느낀다. 서비스에 실망하더라도 동질적인 언어를 쓰는 직원이 응대하면 좀 더 긍정적인 반응과 입소문이 나온다는 것이다.
콜센터를 지방으로 옮길 때 “사투리가 세지 않아서”라는 선정 배경이 따라붙는 한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기업의 ‘언어 전략’이 표준화단계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거주 외국인 100만 명, 외국 관광객 1000만 명 시대에는 생각도 달라야 한다. 고객에게 다가설 수 있다면 ‘충청도 고객은 충청도 직원이 응대한다’는 식의 상상력도 필요하다. 다양성의 시대에는 언어도 시장 차별화의 열쇠다
박용 동아일보 논설위원 parky@donga.com
필자는 동아일보 편집국, 사회1부, 경제부, 산업부와 경영전략실, 미래전략연구소 기자를 거쳐 현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핀란드 헬싱키경제대 경영학 석사(EMBA) 과정을 마치고 서강대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글로벌 서비스경영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머크웨이> <선진 교육을 벤치마킹하라> <세계 최강 미니 기업> <입사 선호 40대 한국 기업> 등의 공저와 <타이거 매니지먼트>(공역) 등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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