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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6

용병? 그래도 스스로 무장해야 산다

김상근 | 101호 (2012년 3월 Issue 2)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마키아벨리, 권력의 중심에 서다
1498년 5월28일, 우리들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외교를 담당하는 제2 서기장에 선출됐다. 그가 제2 서기장에 선출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피렌체의 공직자윤리법은 세금체납자 아들의 정계 진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의 아버지가 세금체납자(스페키오)였다. 정계 진출에 관한 금치산자(禁治産者)가 관례를 깬 것이다. 피렌체의 공직자는 주로 정규 대학 교육을 마치고 법률을 전공한 사람 중에서 선출됐다. 세금체납자의 아들이자 변변한 학력도 없었던 29살의 청년 마키아벨리가 혜성과 같이 등장해 피렌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와 경쟁했던 입후보자 중에는 피렌체 대학의 수사학 교수(프란체스코 가티)도 있었고 전문 변호사(안드레아 디 로몰로)도 있었지만 마키아벨리가 대평의회(Consiglio Maggiore) 투표에서 당선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마치 자신의 처지를 회상하는 듯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박복한 처지에서 높은 신분이 되는 데 있어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지위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실력 내지 책략을 쓰지 않고 출세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1
 
정말로 ‘박복한 처지’에서 출발했던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피렌체의 고위 공직자로 급부상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말대로 ‘실력 내지는 책략’을 써서 출세한 것일까? 그는 훗날 그 공직에서 쫓겨난 후 절친한 친구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자신은 “타고난 운명 탓에 비단이나 모직을 짜는 법을 몰랐고, 은행업이나 무역으로 큰돈을 버는 것에 관심이 없었으며, 이익이 될 만한 일에 냄새를 맡는 감각도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2 별 볼일 없는 집안의 후손이었다는 푸념이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어떻게 피렌체의 제2 서기장이 될 수 있었을까? 그는 <로마사 논고>에서 “모략만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털어놓는다.
 
“나는 비천하게 태어난 자가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출세한 예를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목격한 것은 조반니 갈레아초가 그의 큰아버지인 베르나르도 각하의 손에서 롬바르디아의 지배권을 빼앗은 것과 같은 사건들이다. 즉 모략만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을 나는 확고하게 믿고 있다.”3
 
마키아벨리는 공직에 오르기 위해서 강력한 후원자를 얻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무엇을 아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누구를 아는가’이고 또 ‘누가 나를 아는가’이다. 실력은 나에게 맡겨진 업무를 처리할 능력이지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내가 가진 인적 자원으로부터 출발한다. 마키아벨리가 발휘했던 술수의 증거는 남아 있지 않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행정부의 최고위직인 제1 서기장 마르첼로 아드리아니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개인적으로 가르친 스승이었고 3달 먼저 피렌체 제1 서기장으로 선출(1498년 2월13일)되면서 마키아벨리의 앞길을 터줄 수 있었다. 경쟁자였던 프란체스코 가티 교수가 메디치 가문과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도 흑색선전의 도구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피렌체 행정부는 1494년에 축출된 메디치 가문의 복권 움직임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메디치 가문이 귀환해 참주정으로 돌아간다면 피렌체의 공화정 정부는 무너지게 된다. 아마 마키아벨리는 선거전에서 프란체스코 가티가 메디치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요즘 선거전에도 흔히 등장하는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키아벨리가 담당했던 업무
피렌체의 행정부는 제1 서기국과 제2 서기국으로 편성된다. 제1 서기국은 대외 관계 및 외교 문서를 담당했고 마키아벨리가 서기장이었던 제2 서기국은 국내 관계 및 전쟁 업무를 관장했다. 그러나 복잡하고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던 피렌체 정치의 현실은 그렇게 두 서기국의 업무를 칼처럼 가르지 못했다. 국내 문제 담당이었던 마키아벨리는 외교 업무에도 자주 동원됐고 뛰어난 문장력 때문에 공식 외교 문서 작성에도 자주 투입됐다. 예나 지금이나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일복이 터지는 법이다. 천성이 낙천적이면서도 업무 능력이 뛰어났던 마키아벨리는 문제가 있는 곳에 제일 먼저 투입되는 피렌체 최고의 공무원이 됐다. 제2 서기장으로 임명되자마자 마키아벨리에게 군사 문제를 전담하는 ‘10인 위원회’가 맡겨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5월28일에 제2 서기장으로 임명된 마키아벨리는 7월14일부터 ‘10인 위원회’의 서기장도 겸직하게 됐다. 그렇다고 연봉이 두 배로 늘어난 것도 아니다. 당시 제1 서기장의 연봉은 330소금화(小金貨, fiorno piccolo)였고 제2 서기장에게는 192소금화가 지급됐다. ‘10인 위원회’ 서기장의 임금은 따로 지급되지 않았다. 한 사람 연봉에 일은 두 배! 그래도 마키아벨리는 열심히 일하던 국가의 충복이었고 맡은 일은 끝장을 보는 유능한 공무원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집에서 시뇨리아 정청까지 출근하려면 베키오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가 첫 출근하던 날 신이 나서 달려갔을 베키오 다리의 모습은 1498년과 거의 변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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