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951년 7월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유엔군은 확전을 방지하기 위해 현재의 선에서 더 이상 공격하지 말고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이 명령을 교묘하게 이용해 충분히 준비를 한 뒤 주요 고지를 기습해서 뺏곤 했다. 그들은 철저하게 한국군이 장악한 고지를 노렸다. 우리 군의 전투력과 화력이 미군보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전쟁 후반부를 장식한 고지전의 원인이었다. 유엔군이 반격을 가해 고지를 탈환해도 전선 유지 명령에 의해 더 이상 진격이 불가능했다. 중공군은 북쪽 산지로 철수했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공격했다. 반복되는 악순환에 미군 병사들까지도 불만이 많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군사지정학적 요충지, 백마고지
그러던 중에 중공군이 한 지역을 향해 작심하고 공세를 준비한다. 6·25 전쟁 때 대표적 격전지로 심한 포격 탓에 산등성이가 모두 벗겨져 마치 백마(白馬)가 쓰러져 누운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 ‘백마고지’란 이름이 붙어버린 바로 그곳이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 12㎞ 지점에 있는 해발 395m 고지로 불과 열흘 동안의 전투 기간 중 24차례나 주인이 바뀌었을 정도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군사분계선을 정하는 데 있어서 백마고지는 군사지정학적 요충지였다. 군사적으로 철원평야를 장악하면 남쪽에는 마땅히 방어선을 칠 만한 요지가 없어 국군의 방어선은 크게 후퇴하게 된다. 경제적으로도 철원평야는 한국에서 제일 비옥한 평야였다.
지형으로 보면 북한이 유리했다. 철원평야는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골짜기 사이에 고인 용암호수가 그대로 굳어서 형성된 땅이다. 이 용암을 가뒀던 산들이 철원평야를 두르고 있는데 남쪽은 얕은 구릉이 섬처럼 점선으로 이어져 있는 반면 북쪽은 가파른 산맥이 빈틈없이 벽처럼 솟아 있다. 김일성 고지로부터 백마고지로 이어지는 이 산줄기는 철원평야를 완벽하게 내려다본다. 감제고지(瞰制高地)인 북쪽 방벽을 안전하게 확보하려면 좀 더 북으로 진격해서 안전지대를 충분히 확보해야 했다. 문제는 이 북쪽이 워낙 첩첩산중이라 한번 진격하면 전선 전체를 상당히 길게 끌어올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럴 수 없는 한국군으로서는 눈 뜨고 철원평야를 내줘야 하는 판이었다.
그런데 이 산맥자락에 마치 방아쇠가 매달려 있듯이 남쪽으로 돌출해 있는 작은 구릉이 있다. 그곳이 백마고지다. 한국군은 이 작은 거점에 진을 치고 버팀으로써 철원평야가 북한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심하게 말하면 긴 암벽의 한 지점에 달라붙어 북한의 남진을 막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철원평야를 십자로 교차하는 도로망을 감제하는 곳이었다.
북한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요청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공군은 북한을 위해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고 이 땅을 뺏어주기로 한다. 그들은 중공군 중에서도 최정예로 꼽히는 38군의 114사단을 차출해서 3개월 동안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