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험관리 분야 전문가인 마크 앱코비츠 미국 밴더빌트대 교수는 2008년에 펴낸 저서 <운영위험관리(Operational Risk Management)>를 통해 20세기에 발생한 10개의 지진 중 7개가 15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생했고, 그 중 5개는 특정 지역에 몰아닥쳤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지진이 시기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집중되는 경향에 비춰볼 때 그는 아시아에 큰 지진과 쓰나미가 ‘곧’ 닥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로 그가 예측한 지 3년도 안 돼 뉴질랜드, 일본에 사상 최대의 지진이 발생했다.
#2. 2004년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마침 해운대에 있었던 윤제균 영화감독은 TV를 보며 ‘해운대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이란 상상을 했다. 이것을 토대로 5년 뒤 그는 영화를 만들었고, 영화 속에서 해운대는 일본 서쪽 해상에서 발생한 8.5의 강진과 이에 따른 지진해일로 큰 피해를 본다.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일본 동북부는 9.0의 최대 강진을 맞았다.
#3.경상대 지구과학과 좌용주 교수는 2009년 8월 한 일간지 칼럼에서 “동해상 일본해역에서의 해저지진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해저에 대한 폭넓은 정보 획득과 더불어 유사시의 방재대책 수립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라고 경고했다.
#4.원전 사고의 위험을 경고한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하버드 매거진이 “과학기술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의 실체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한다고 평가했던 제임스 차일스의 2001년작 <인간이 초대한 재앙(Inviting Disaster)>을 보면, 원전의 운용 한계를 무시할 경우 체르노빌과 같은 원전사고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아닌 게 아니라 10년 만에 일본에서 유사한 참사가 벌어지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 지진과 쓰나미의 발생 가능성을 학문적 측면에서 혹은 예술적 상상력으로 예측한 사람들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예측하기 힘든 부분이 두 가지 있다. 타이밍과 규모다. 이번 일본에서 발생한 ‘3.11 지진’은 일본 정부의 매뉴얼이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였고, 여기에서부터 일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위기대응에 대한 준비는 예측 가능한 선까지 이뤄지기 때문이다. 일본은 전 세계에서 지진 상황에 역사적으로 가장 잘 학습돼 있고 대응 체계에서도 최고 수준이지만 이번 지진과 쓰나미 규모는 예측을 넘어서는 것으로 일본도 이 정도까지는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21세기 들어 심화되는 이상 기후, 기술의 복잡성 증가 등은 위기의 예측을 점차 힘들게 만들고 있다.
위기관리의 세 가지 문제
위기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드는 21세기에 우리는 위기관리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효과적인 위기관리를 위해 위기의 발생 원인과 범주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둘째, 기업이나 정부의 ‘제대로 된’ 위기관리 능력이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셋째, 예측과 대응 준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그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다시 건강한 상태로 복원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를 짚어봐야 한다.
이 세 가지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위기의 원인을 밝히고 예방과 회복을 위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분야가 있다. 바로 의학이다. 오랜 역사 동안 의학은 원인을 찾기 힘든 감염병 등 각종 질환과 싸워오면서 나름의 예방과 치료 해결 프레임을 만들어왔다. 기업의 위기관리 및 질병 예방과 치료에 대해 연구해온 필자들은 이번 일본 사태를 놓고 논의하던 중 의학이 21세기형 위기관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질병과 위기
위기(crisis)는 질병(disease)이다. 서양에서 위기란 단어의 어원은 사실상 의학 용어였다. 그리스 어원인 ‘크라이시스(krisis)’는 ‘질병의 터닝 포인트에서 의사의 판단력(judgment)’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동양은 어떨까?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1959년 4월 12일 인디애나폴리스 연설 중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어에서 위기란 단어는 두 개의 글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하나는 위험을 뜻하고, 또 하나는 기회를 뜻합니다.” 이는 우리가 위기에 대해 논의할 때 흔히 인용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중국문학을 가르치는 빅토르 메어 교수는 다른 견해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중국어에서 위기(危機)란 단어가 위험과 기회를 뜻하는 요소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위기에서 기(機)란 사실상 ‘시초의 순간, 중대한 시점(무엇인가 시작하거나 변화하는 때)’을 의미한다… 기(機)는 중립적이다. 기(機)는 더 좋은 방향으로 혹은 나쁜 방향으로 풀려갈 수도 있다….” 위기에 대한 동서양의 시각을 종합하면, 위기는 결국 ‘터닝 포인트’이며, 여기에서는 타이밍과 판단력이 중요하다. 응급실에서 환자를 맞이한 의사처럼 말이다.
위기 발생의 세 가지 요인
질병을 관리하려면 질병의 원인과 메커니즘을 먼저 알아야 하듯 위기관리에서는 위기 발생의 요인을 먼저 알아야 한다. 예방의학에서 질병 발생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모델로 역학적 삼각형 모델이 있다. 이 모델은 주로 감염병에 적용되는 모델로, 병인(agent), 숙주적 요인(host factors), 환경적 요인(environmental factors) 등 3가지 생태학적 요인을 주 요소로 보고 있다. 이 역학적 삼각형 모델은 기업의 위기관리에도 매우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다.
우선 병인은 질병이 발생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로 생물학적(세균이나 바이러스), 화학적(독성물질), 물리적(기압) 요인 등이 있다. 기업 위기에서도 동인(crisis agent)이 있는데, 이는 위기 발생의 핵심적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리콜이라는 위기는 제품 불량이라는 위기 동인을 갖고 있다. 횡령 사건이나 고객 정보 유출에서의 위기 동인은 관련 직원의 실수나 부정행위다.
숙주 요인은 인체 내부 요인(intrinsic factors)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유전적 요인이나 과거 감염병에 걸린 후 획득한 면역력 등이 이에 해당한다. 기업 위기에서의 숙주 요인이란 대표적으로 오랫동안 형성돼 온 조직 내부 문화를 들 수 있다.
환경적 요인은 외부적 요인(extrinsic factors)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숙주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기업에서 위기발생의 환경적 요인이란 주가 등 경제 상태에서부터 국제적으로는 환율, 유가, 정부의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 지진이나 화산폭발, 기후 변화 등 환경적인 모든 것을 포함한다. 질병과 위기는 결국 이 세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