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학 연구
편집자주
과거의 실패는 미래의 성공을 위한 소중한 자산입니다. 하지만 성공에 대한 연구에 비해 실패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약합니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 포럼에서 실패 경영 관련 포럼을 운영하고 있는 심형석 교수가 실패 경영에 대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실패학이란 실패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아직 학문으로서의 체계를 갖추지는 못하고 있지만 연구의 대상은 실패 그 자체다. 실패의 사전적 정의는 ‘일을 잘못해 뜻한 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그르침(백과사전)’ ‘어떤 일에서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거나 완성하지 못함(국어사전)’ ‘일에 성공하지 못하고 망함(한자사전)’ 등이다. 즉 어떤 목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달성하지 못하고 처음 세웠던 목표와 다른 결과물이 발생했을 때를 실패라고 본다. 하지만 학문적 연구를 위한 실패의 정의는 이렇게 간단하게 봐선 안 된다. 실패는 상대적 개념으로 판단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조직이나 개인에 따라 설정하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실패에 대한 판단이 다를 수밖에 없다.
실패를 판단하는 기준
실패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2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바로 기간 개념과 실패 판단 기준의 다양화다. 우선 실패는 특정 시점(point of time)이 아닌 일정 기간(period of time)을 놓고 판단해야 한다. 개인이라면 길게는 한평생, 기업이라면 전(全) 영업활동 기간을 놓고 실패 여부를 가늠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종종 단기적 관점에서 실패를 판단하곤 한다. ‘빨리빨리’라는 말로 대변되는 우리 국민들의 조급성이 작용한 탓이다. 하지만 실패를 특정 시점만 놓고 판단한다면 현재 IT업계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부도났던 회사가 다시 회생하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고, 한때 실패했던 개인이 화려하게 재기하는 케이스도 부지기수다. 실패를 판단할 때 특정 시점이 아니라 일정 기간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다.
실패를 판단하는 기준도 층위를 달리해야 한다. 크게 기술적, 경제적, 관리적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기술적 기준은 기술개발의 성공 여부를, 경제적 기준은 사업화의 성공 여부를, 관리적 기준은 운영이나 관리의 지속성 여부를 뜻한다. 기업 경영을 하다 보면 기술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사업화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예: R&D 기획 역량 부족)도 있고, 기술 개발과 사업화에는 성공했지만 회사 관리 및 운영상 지속성 여부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예: 경영권 승계 실패)도 있다. 이를 모두 똑같은 실패로 간주한다면, 이는 스티브 잡스를 실패자로 성급히 낙인찍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요약하면, ‘진정한 실패’는 상당한 장기 기간을 적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경제적, 관리적 기준에서 모두 실패했을 때로만 국한해야 한다.
‘진정한 실패’에 대한 명확한 판단 기준은 좋은 실패를 구분해내기 위해 우선적으로 갖춰야 할 태도다. 실패학이 궁극적으로 성공을 지향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실패를 연구·분석하는 이유는 실패를 자산으로 삼아 향후 성공을 위한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기간 개념과 다양한 기준 없이 모든 실패를 ‘진정한 실패’라고 규정한다면 수많은 실패 사례 중 향후 성공을 위해 자산화할 수 있는 ‘좋은 실패’를 분간해내기 어려워진다. 이는 궁극적으로 실패를 반복하고 실패를 배울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실패의 유형
조직 측면에서 볼 때 실패는 크게 △성장단계별 △업종별 △시기별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표1) 우선 기업의 성장 단계별로 실패는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신규 기업은 경험과 자금력 부족으로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성장기업은 종종 과도한 경험과 복잡한 기업시스템으로 인해 실패하곤 한다. 기업의 산업수명주기(industry life cycle) 측면에서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도입기 때는 자금이나 시장 진입, 품질 확보에서 실패를 경험한다. 성장기에는 새로운 차원의 과제들이 부상하게 된다. 인재 확보와 글로벌 경쟁력이 중요해지며, 경쟁 격화와 규모 확대에 따라 경영의 시스템화 니즈도 커진다. 이에 따라 성장기는 기업경영에 가장 좋은 시기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실패를 잉태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술 금융, R&D 투자, 생산구조 개선 등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면 실패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성숙기에는 기존 운영의 효율 극대화를 통한 원가절감과 신규 사업 및 시장을 모색하게 된다. 경영 안정에 중점을 두면서 비용 절감에 주력해야 하는 시기인데,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실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재성장기는 기업이 새로운 목표와 비전을 설정하는 단계인데, 이에 실패할 경우 인재 유출, 회사 분위기 침체 등을 통해 쇠퇴기로 접어들게 된다.
업종별로 나타나는 실패의 양상도 차이가 있다. 제조업은 시스템적인 문제로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서비스업은 비(非)시스템적인 문제, 즉 고객접점인 MOT(moment of truth) 관리에서 실패한 경우가 상당수다. 궁극적으로 기업은 시장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제조업 또한 서비스업화 되는 것이 실패를 예방하고 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서비스업 또한 본질적으로 제조업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한계가 있으므로 생산성 향상을 통해 실패 발생률을 낮출 수 있다.
시기별로는, 과거에는 주로 자원의 부족으로 실패한 경우가 많은데 반해 현재는 소통의 부재나 감성적 요인의 문제로 실패하는 사례가 많다. 물론 조직 실패의 주요 원인이 소통부재는 아니지만 대다수는 소통의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게 일반적이다. 소통은 포괄적인 개념이다. 단순히 언어만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상호배려와 이해, 협력 등이 전제돼야 한다. 조직차원에서는 소통구조를 개선하고 경로를 다양화하며, 방식 또한 유연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주요 실패 요인
국내외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실패 관련 연구는 대개 실패 기업에 대한 사례 분석이다. 필자가 국내외 대표적인 실패분석 연구 9가지(표 1)를 비교 분석한 결과, 이 중 3가지 이상의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요인들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이는 △변화에 저항 △무리한 확장 전략 △기술에 대한 맹신 △시장 실체 파악 실패 등 4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1) 변화에 저항 사회나 경영환경은 개인이나 조직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를 거부해 궁극적으로 실패에 이르는 경우다. 허츠(Hertz)는 렌터카 시장에서 부동의 1위였다. 그러나 허츠는 고객을 여행자로만 한정하고 정비소에 차를 맡긴 후 렌터카를 필요로 하는 도심의 렌터카 수요를 간과했다. 그 결과 엔터프라이즈(Enterprise)에 추월당하는 뼈아픈 실책을 저질렀다. 코닥(Kodak) 역시 기존 사업에 대한 미련 때문에 큰 화를 맞게 된 대표적 사례다. 코닥은 일찍이 1981년도에 디지털 사진이 100년 전통의 필름, 종이, 화학약품사업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변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코닥은 회사의 기존 사업을 확대하는 데 디지털 기술을 역이용할 수 있다고 보고 기존 사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지속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새로운 시장과 경쟁자의 부상 가능성을 간과하거나 과거의 성공에서 비롯된 지나친 자신감으로 변화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면 경쟁 우위를 상실하게 된다. 런던 비즈니스스쿨의 도널드 설 교수는 이를 ‘활동적 타성(active inertia)’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활동적 타성이란 기업이 시장의 변화를 무시하고 과거 성공의 발자취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성향을 말하는데 잘 나가는 기업일수록 이 활동적 타성의 덫에 빠질 위험이 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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