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00만 개씩 팔리던 장수식품 새우깡에서 이물질이 발견되자 수십 년간 힘겹게 쌓아왔던 브랜드 가치는 순식간에 증발하고 ‘생쥐깡’이란 오명만 남게 됐습니다. 대공황과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왔던 미국 투자은행 베어스턴스는 위기설이 제기된 지 불과 나흘 만에 본사건물값의 5분의 1도안되는 헐값에 팔리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무려 610년을 버텨왔던 국보 1호 숭례문은 한 순간 화마에 휩쓸려 사라졌습니다. 어떤 기업에도 치명적 위기는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관리하고 대비하면 위기가 닥쳐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전사적 위기관리(ERM)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최고의 전문가들과 함께 진행한 사례분석을 통해 리스크 관리를 위한 실용적 솔루션을 제시합니다.
“위기를 위기로 직감하면 헤어날 방법은 반드시 있다. 그러나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멸문(滅門)의 길로 가게 된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그때가 위험한 고비일 수 있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商道)’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위기 불감증이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아직도 한국 기업의 위기관리 수준은 낙제점이다. 특히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다가 한 순간 위기가 닥치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기업도 무너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국내외 기업과 공공기관에 대한 광범위한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위기관리 능력 향상을 위한 실용적 교훈을 제시한다.
위기 식별과 사전 대비가 열쇠
리스크 관리의 첫 출발점은 사전에 위기를 ‘식별(identify)’하는 것이다. 발생 빈도가 높으면서도 회사에 치명적일 수 있는 위험이 무엇인지부터 미리 파악해야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지하철 운영 관리를 담당하는 기관의 책임자라면 어떤 위험 요인을 생각할 수 있을까. 화재나 운행사고, 침수, 정전, 테러, 지진, 누전, 전동차 충돌, 총기사고 등 수없이 많다. 이 가운데 한국적 상황에서 지진이나 총기 사고 등은 상대적으로 발생 가능성이 낮다. 또 운행 사고나 전동차 충돌은 시스템 개선으로 발생 가능성을 낮춰가고 있으며 누전도 그 자체보다는 이로 인한 화재가 더 큰 위협이다. 특히 지하철은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며 폐쇄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있다. 따라서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으며 화재 발생 시 대형 인명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조금만 고민하면 누구라도 쉽게 이 정도 판단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3년 2월 192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 지하철 화재가 발생하기 전 대구지하철과 소방당국은 이런 가능성에 대해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화재를 지하철의 중대한 위험으로 생각했다면 적어도 몇 차례의 화재 진압 훈련은 실시해야 했다. 하지만 대구에서는 단 한차례도 이런 훈련이 없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불이 나면 무엇보다 유독가스가 치명적이다. 따라서 유독가스를 일으키지 않는 건축 자재나 내장재를 사용해야 했다. 그렇지만 대구 지하철은 고온에 취약한 재료를 썼다.
또 객차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승객들의 신속한 대피가 최우선 과제다. 안타깝게도 대구 지하철에서 비상시 차량 문을 여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지하 공간이란 특징 때문에 비상구도 더 확충하고 정전 시 비상구 위치를 잘 확인할 수 있도록 대비책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전혀 이런 대책은 없었다. 결국 수많은 사람이 불길과 화염에 고통 받다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