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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IMI· 스탠퍼드 AMP 강의

진정성, 모방할 수 없는 감동

글렌 캐롤 | 49호 (2010년 1월 Issue 2)
특정 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들면 신규 소비자를 발굴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혁신 기회, 특히 규모가 작은 기업의 혁신 기회가 급격히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때로는 성숙 시장에서 더 많은 혁신 기회를 발굴할 수 있다. 성숙 시장에서 성공한 기업들은 대개 규모가 크고, 소비자들에게 광범위한 호소력을 지니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들이다. 이들은 특정 계층을 핵심 고객 집단으로 설정하기보다는 다양한 세대의 광범위한 소비자들을 아우른다. 이 제너럴리스트들은 최선의 성과를 위해 시장의 ‘중심’에 집중하면서도 경쟁사와의 정면 경쟁을 피하기 위해 차별화 전략을 쓴다.
 
몇몇 제너럴리스트들의 경쟁이 심해짐에 따라 시장 내 ‘규모의 경제’ 현상은 더욱 뚜렷해진다. 소규모 기업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성공한 극소수의 기업만이 규모를 더욱 키울 수 있다. 혁신의 기회는 여기서 생긴다. 시장의 중심에 대한 집중도가 극대화됨에 따라 시장 주변 영역에 많은 열린 공간들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고객층 자체는 넓어졌지만 고객들의 충성도는 낮아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장을 장악한 이들 대기업은 이 주변 영역을 인식하는 데 소홀하다. 설사 인식한다 해도 이 주변 영역에 진입하기를 포기하거나, 쉽게 진입할 수 없다. 주변 영역으로의 확장은 비용이 많이 들고, 이들 대기업의 성공 비결이었던 ‘규모의 경제’ 가 지닌 이점도 저해하기 때문이다.
 
이 주변 영역을 파고드는 주체가 바로 대기업에 비해 규모가 작고, 확실한 핵심 고객 집단을 가진 몇몇 전문 기업들이다. 전문 기업들이 자리를 잡고, 이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틈새 시장의 규모가 더욱 커진다. 미국 프리미엄 초콜릿업체 샤펜버거(Scharffen Berger)나 코코아 피트(Cocoa Pete’s) 등은 성숙 산업의 주변 영역을 잘 공략해 성공한 전문 기업의 대표적 예다. 이중 샤펜버거가 어떤 식으로 주변 영역을 침투했는지 살펴보자.
 

 

프리미엄 초콜릿 시장이라는 주변 영역을 개척한 샤펜버거
세계 초콜릿 산업은 대표적인 성숙 산업이며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초콜릿 시장은 2002년 기준으로 각각 35%, 31%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허시(Hershey’s)와 마스(Mars)가 양분하고 있었다. 유럽의 명가 네슬레 또한 상당한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어 소규모 기업이 이들 대기업을 뚫고 미국 초콜릿 시장에 새롭게 정착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시장 점유율을 늘리려면 생산 라인을 대폭 늘리고, 집중적인 광고를 내보내며, 생산 원가를 대폭 낮추는 일밖에 없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하지만 샤펜버거는 이 3개 대기업이 주목하지 않은 주변 영역, 즉 프리미엄 초콜릿 시장에 주목했다. 고디바가 장악하고 있는 유럽 프리미엄 초콜릿 시장과 달리 1990년대 중반까지 미국 내에는 전국적 인지도를 지닌 프리미엄 초콜릿 생산자가 없었다. 허시, 마스, 네슬레 등은 파운드당 5달러 미만이나 5∼10달러 가격대에서는 다양한 대량 생산 제품을 선보이며 치열한 경쟁을 펼쳤으나 파운드당 20달러 이상의 프리미엄 초콜릿 시장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었다.
 
1997년 설립된 샤펜버거는 미국 내에서 지난 50년간 처음으로 등장한 신규 초콜릿업체다. 소수의 대형 회사들이 지배했던 미국 초콜릿 시장에서 샤펜버거는 유럽 초콜릿 장인들의 생산 방식을 통해 유례없는 성공을 거뒀다. 샤펜버거의 공동 창업자는 오랜 친구였던 로버트 스타인버그와 존 샤펜버거다. 내과 의사였던 로버트 스타인버그는 암 환자가 된 후 의사직을 포기했다. 그는 무작정 암 치료에만 매달리느니 평소 관심이 많았던 음식 공부를 해보겠다며 프랑스 리옹으로 떠났다. 리옹의 초콜릿 전문기업 베르나숑에 ‘인턴으로 뽑아달라’고 편지를 보낸 스타인버그는 베르나숑에서 초콜릿 생산 기법들을 배웠고, 미국에 돌아와서도 초콜릿 탐구에 열을 올렸다. 스타인버그는 ‘미국에서는 왜 어느 누구도 유럽에서 맛본 고급 초콜릿을 만들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가졌고 자신의 친구였던 존 샤펜버거를 끌어들였다. 양조장을 소유했던 와인 사업자 존 샤펜버거는 스타인버그의 제안에 매력을 느꼈고, 곧 양조장을 팔고 본격적으로 초콜릿 사업에 뛰어들었다.
 
농업과 음식 분야에서 뛰어난 사업 능력을 보유한 존 샤펜버거와 초콜릿 장인 로버트 스타인버그는 카카오 콩을 선택하는 일부터 커피 콩 볶기(로스팅), 섞기(블렌딩) 등 초콜릿 생산의 전 과정을 직접 담당하는 가내 수공업 방식을 고수하며 프리미엄 초콜릿 업체로의 이미지를 굳혔다. 유통업자나 중간 바이어가 개입해 최대한 싼 가격에 카카오 콩을 조달받는 대형 초콜릿 업체와 달리 샤펜버거의 두 창업자는 베네수엘라, 가나 등 제3세계 커피 생산국에서 직접 원두를 선택하고 조달했다. 각각의 원두 종류에 따라 로스팅 과정도 엄격하게 분리했고 고가의 독일제 장비를 썼다. 다양한 종류의 카카오를 각각 로스팅하는 작업은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었기에 대형 제조회사들은 아무도 이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샤펜버거는 설립 초기부터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고급 식당 및 제과점을 뚫는 데 주력했다. 미식가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진지하고 전문적인 초콜릿 업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주효한 전략이었다. 이 콘셉트에 따라 생산하는 초콜릿의 형태도 바(bar) 형태의 다크 초컬릿만 주로 생산했다. 생산량을 늘리지도 않았다. 샤펜버거는 설립 10년이 지난 지금도 1년에 불과 200톤의 초콜릿만을 생산한다. 샤펜버거 초콜릿의 고급스런 맛과 향은 곧 미국 소비자들을 사로잡았고, 회사는 성장을 거듭했다. 2003년 샤펜버거의 매출은 850만 달러를 기록했다. 200톤의 초콜릿을 생산하는 회사가 이 정도의 매출을 거둔 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샤펜버거의 독특한 문화와 성장성을 눈여겨본 허시는 결국 2005년 당시 샤펜버거 매출의 5배를 주고 이 회사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허시가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샤펜버거를 인수한 건 미국 프리미엄 초콜릿 시장의 빠른 성장세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 전체 초콜릿 시장 규모는 불과 2.5% 늘었지만, 프리미엄 초콜릿 시장은 17%가 늘었다. 

 

 

진정성으로 소비자를 공략하라
샤펜버거의 또 다른 성공 비결은 전통적인 소규모 생산 방식과 엄격한 품질 관리로 소비자들에게 진정성(authenticity) 있는 기업이라는 의미를 확실하게 쌓았다는 점이다. 진정성은 정체성(identity)의 한 형태다. 그렇다면 과연 정체성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과 브랜드를 혼동한다. 하지만 둘은 완전히 다르다. 브랜드는 단순하고 부분적이다. 회사가 통제할 수 있고, 사고팔 수도 있다. 브랜드를 규정하는 대상도 소비자일 때가 많다. 하지만 정체성은 복잡하고 전체적이다. 회사가 통제할 수도 없고 사고팔 수도 없다.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상은 단지 소비자가 아니라 소비자, 비평가, 공급업체, 고용인, 투자자 등 광범위한 이해관계자들이다.
 
프리미엄 제품 시장, 특히 프리미엄 식품 시장에서는 정체성 혹은 진정성이 판매를 좌우한다. 대형 초콜릿업체, 대형 와인업체, 대형 맥주업체도 물론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의 정체성이 판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소비자들은 대형업체의 정체성 때문에 이들 제품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가격 대비 효용이 높기 때문에 대량 생산 제품을 구매한다. 소비자들은 합리적이지 않다. 대형 맥주업체에서도 소규모 숙련공들이 생산한 전통 방식의 맥주와 동일한 품질과 특징을 가진 맥주를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맥주의 맛을 아는 미식가들은 설사 품질이 동일해도 두 제품의 진정성을 똑같이 취급하지 않는다. 중국산 식재료의 오염 문제로 전 세계가 홍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고급 식품 시장에서 차지하는 진정성의 비중이란 그야말로 엄청나다.
 
앞서 말했듯 진정성은 생산자, 혹은 소비자라는 하나의 집단이 규정하는 게 아니다. 또한 진정성은 매우 주관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이다. 브랜드와 달리 진정성에 객관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구성원들이 해석하고 인식하기 나름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설사 품질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소비자들이 해당 제품이나 회사를 진정성 있는 기업이나 제품으로 인식하면 프리미엄 제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해석하기 나름이다.
 
진정성의 핵심 콘셉트는 생산자가 제시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를 게이트키핑(gate-keeping)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샤펜버거가 설립 초기 일반 소비자가 아닌 고급 식당의 전문 요리사에게 먼저 납품하며 프리미엄 초콜릿의 명성을 얻은 일 또한 신뢰할 만한 제3자의 증명을 거쳐 진정성을 쌓은 과정이다. 공장을 개방해 품질에 자신감을 보인 일이나 소형업체가 감당하기에 비싼 고가의 독일제 장비를 여러 대 구입해 각각의 원두에 사용한 일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초콜릿, 맥주, 와인, 예술 등 비밀스런 기법을 가진 문화 상품 생산자들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도는 매우 높다. 소비자들은 이 생산자들이 지닌 진정성을 품질과 세련미와 동일하게 여긴다. 또한 자신이 이 제품을 소비하며 자신의 신분이 높아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현대 소비자들이 진정성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고급 제품 시장에서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진정성을 기준으로 상품을 선택한다. 소비자들은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는 화장품 회사 바디샵의 진정성이 사회적 임무, 애플의 진정성은 독창성과 뛰어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성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모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업체가 샤펜버거가 사용한 전통 방식의 초콜릿 생산법을 택했다고 가정해보자. 하지만 소비자들은 샤펜버거에 부여하는 가치를 해당 업체에게 부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바디샵과 똑같은 재료로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가 있다 해도 소비자들은 이 회사가 사회적 임무에 충실한 기업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미 다른 방식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대형 업체들은 다른 업체의 진정성을 모방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성숙 시장의 소형 업체가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편집자주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부설 국제경영원(IMI)과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이 공동 주최하는 경영자 교육 과정 ‘스탠퍼드 AMP(Advanced Management Program)’ 과정의 일부 강의 내용을 요약해드립니다. 이번 호에는 글렌 캐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가 강의한 ‘진정성, 미국 초콜릿업체 샤펜버거의 성공 비결’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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