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상황을 다스리는 ‘사과의 기술’

38호 (2009년 8월 Issue 1)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일본 기업인들이 ‘사과의 기술’을 배운다는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위기 상황에서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는지 컨설턴트로부터 배우고 있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 37호에서 다룬 ‘노출의 기술’과 함께 ‘사과의 기술’은 기업의 위기 커뮤니케이션에서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매우 중요한 기술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제대로 ‘사과의 기술’을 발휘한 기업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사례 1 법정에서 이기고 여론에서 지는 우를 범하지 말라
 
법정과 여론은 전혀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한 회사가 어떤 사고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고 하자. 법정에서는 이 회사가 유죄임이 밝혀지기 전까지 무죄 상태다. 하지만 여론은 이 기업이 스스로 무죄임을 증명할 때까지 ‘유죄’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사건이 일어나면 법정에서의 승리에만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 이 과정에서 여론이 악화되곤 한다.
 
삼성중공업은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 얼마 전 한 유명 기업인이 다보스포럼에 다녀온 후 자신의 블로그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렇게 꼬집었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봉사 활동에 적극적인 기업의 제품을 살까요? 아니면 유출 사고 관련자인데도 법적인 판결이 나올 때까지 공식적 입장을 발표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발언만 한 기업의 제품을 살까요?” 이는 적절한 비판이었다. 실제로 삼성중공업은 사고가 난 뒤 무려 47일이 지나서야 일간지 등을 통해 형식적인 사과를 하여 오히려 더 큰 분노를 일으켰다. 그 정도의 유감 표명은 사건 직후에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뒤늦게 나온 사과로는 너무 엉성했고, 결국 여론은 더 나빠졌다. 삼성중공업은 법적인 위기관리에 집중해 유한책임이라는 결정을 이끌어냈을지 모르지만, 대기업으로서 신뢰에 큰 흠집을 남겼다. 위기가 발생하면 법정과 여론을 모두 고려하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사례 2
사과 및 대응에는 신속한 타이밍이 중요하다
 
위기 상황에서 공개 사과를 할 때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자신들의 실수나 잘못을 발견했다면 언론의 비판이 거세지기 전에 사과할 필요가 있다. 사과란 여론에 ‘떠밀려’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책임감 있는 여론을 만들어가기 위해 하는 것이다.
 
2008년 GS칼텍스 자회사의 직원이 1000만 명이 넘는 고객 정보를 유출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 보도가 9월 5일 오전에 나왔고, 그날 오후 나완배 GS칼텍스 사장이 직접 나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경위와 대책을 발표했다. 물론 사과도 빼놓지 않았다. 이 회사의 발 빠른 대응은 공개 사과의 타이밍으로서 매우 적절했다. 만약 당시 GS칼텍스가 ‘직원 한 명의 범죄’라는 이유로 사과를 늦췄다면 여론은 더욱 악화됐을 것이다.
 
사례 3 사과는 해명과 다르다
 
토머스 허버드 전 주한 미국 대사는 2002년 미군 장갑차 사고로 여중생들이 사망한 사건에 대해 당시 백악관으로부터 사과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을 가장 크게 후회한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같은 시기 주한미군 2사단장이었던 러셀 아너레이도 최근 <생존>이라는 책에서 당시 미군이 ‘사죄’가 아닌 ‘해명’의 자세를 취했고, 이는 결국 전국적인 반미 시위를 불러일으켰다고 후회했다.
 
인터넷전화 업체 스카이프는 2007년 8월 중순 이틀 동안 인터넷전화가 작동되지 않는 사고를 냈다. 스카이프는 사업 목적의 통화로도 많이 활용되기 때문에 이는 큰 사고였다. 그런데 스카이프 PR팀에서 일하는 빌루 아락이라는 직원이 블로그에 ‘(사건이 발생한) 8월 16일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방어적인 글을 올렸다. 이 글은 소비자에 대한 사과보다는 해명이 주를 이뤘다. 또 앞으로의 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도 없이 ‘테크놀로지와 통신 네트워크는 다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라는 투로 말해 빈축을 샀다.
 
사과는 단지 지난 일에 대한 해명이 아니라 실수나 잘못에 대한 인정이 전제돼야 한다. 기업이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미 벌어진 사태에 대한 해명에 집중할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떤 대책을 마련해 실행할 것인지에 대해 커뮤니케이션하는 게 중요하다.
 
사례 4 사과와 함께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하라
 
2007년 6월 29일 애플사(社)가 아이폰을 출시하자 얼리어답터들은 밤새워 기다려 제품을 살 정도였다. 하지만 불과 68일이 지나자 애플은 원래 599달러에 선보였던 아이폰 가격을 200달러나 내린다고 발표했다. 두 달 전에 밤새워 아이폰을 구매했던 소비자들은 불만을 쏟아부었다.
 
애플은 뒤늦게나마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스티브 잡스 최고경영자(CEO)가 소비자들에게 직접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대응했다. 이 편지에서 스티브 잡스는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소비자들의 불만에 답하기 위해 애초에 비싸게 샀던 소비자들에게 애플스토어에서 쓸 수 있는 100달러짜리 쿠폰을 줘서 사태를 마무리했다. 소비자 보호주의 트렌드가 강해질수록 기업의 사과에는 구체적인 보상책이 함께 따라야 더 효과적이다.
  


사례 5
뉴 미디어를 통한 사과 방법도 고려하라
 
소비자들의 손수제작물(UCC)은 기업의 사과 채널로도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진다.
 
2007년 2월 14일 미국 동부에 진눈깨비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쳤을 때, 대부분의 항공사들은 운항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미리 판단하고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제트블루사(社)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가 5일 동안 무려 1000여 편의 항공기 운항을 취소하고, 승객을 가득 태운 9대의 비행기를 6시간 이상 활주로에서 기다리게 만들었다. 사건 발생 6일째에 당시 CEO였던 데이비드 닐먼은 유튜브에 동영상으로 사과 메시지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대책을 내놓았다. 이 영상은 사건과는 별개로 CEO가 동영상을 통해 효과적으로 사과한 대표 사례로 주목을 끌었다.
 
2007년 8월 세계 최대 완구업체인 마텔은 제품에서 납 성분이 발견돼 무려 2000만 개 가까운 제품을 리콜했다. 이때 밥 에커트 CEO가 자사의 홈페이지에 올린 동영상을 통해 사과했다. 미국의 리서치업체인 HCD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리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마텔의 제품을 계속 구매하겠다는 소비자들의 비율이 71%였는데 에커트 사장의 동영상 사과를 본 후 76%로 늘어났다. 또 마텔이 리콜을 포함해 소비자 안전을 위해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해나갈 것이라는 신뢰도가 기존의 75%에서 84%로 늘어났다.
 
이처럼 기업이 자체 제작한 동영상 사과는 몇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첫째, 동영상 사과는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전파될 수 있으며, 발표 시점을 기업이 결정할 수 있다. 둘째, CEO의 입장에서는 언론사 카메라 앞에서 진땀 흘리는 것보다 더 쉽게 사과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셋째, 사과 내용에 대해 기업의 입장에서 편집할 수 있다.
 
사과문 작성의 필수: 3가지 ‘A’
 
무늬만 사과인 사과문은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킨다. 사과문을 작성할 때는 필수적으로 다음 3가지를 포함해야 한다.
 
첫째, 실수나 잘못에 대한 ‘인정(Acceptance)과 사과(Apology)’다.사과를 한다는 것은 자사의 실수나 잘못을 일정 부분 인정한다는 뜻이며, 그렇지 않다면 사과할 필요가 없다. 사과의 수위에는 “죄송합니다”라는 ‘유감’의 수준과 “이번 사건의 책임은 저희에게 있습니다”라는 ‘책임 인정’의 수준이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법적 책임을 가리느라 유감 표명조차 늦춰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건 초기에 유감 표명과 함께, 책임 소재에 대해서는 투명하게 조사해 발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게 좋다.
 
둘째, 소비자가 인정할 만한 ‘해명(Apologia)’이다.영어의 ‘apologia’는 사과에 해당하는 ‘apology’와는 달리 좀더 큰 범위에서의 해명을 뜻한다. 사건이 일어나면 실제와는 달리 소비자나 언론이 오해하고 있는 내용이 생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증거를 들어 기업의 입장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셋째, 위기 사건에 대응하는 기업의 ‘조치(Actions)’다.막연하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와 같은 틀에 박힌 문구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정부의 조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며, 기업 내부에서는 재발 방지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지 밝혀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피해 소비자에 대한 보상책도 내놓는 게 바람직하다.
 
사과 리더십의 새로운 기준: 버락 오바마
 CEO들은 사과를 ‘패자의 언어’라고 오해한다. 사실 사과는 당당한 ‘리더의 언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취임 초 그의 정치적 대부로 알려진 톰 대슐 보건부 장관 내정자와 백악관 최고성과책임자로 임명된 낸시 킬리퍼 등의 탈세 의혹으로 비난을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직접 나서서 “내가 일을 망쳐놓았다” “나는 나 자신과 우리 팀에 대해 좌절감을 느낀다”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써가며 자신의 실수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과하고 후속 조치를 취해 위기를 넘겼다.
 
세계적인 리더십 대가인 제임스 오툴과 워렌 베니스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2009년 6월 호에 기고한 글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사례를 제시했다. 그들은 리더들이 자신의 실수나 잘못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새로운 기준을 오바마 대통령이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새 시대에 위기를 리드하는 ‘사과의 기술’에 대해 기업인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이 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책임의 시대에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다.”

편집자주 위기는재수 없는 일이 아니라 어느 기업에서나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위기관리 시스템을 철저히 정립해놓고 비상시에 현명하게 활용하는 기업은 아직 드뭅니다. 위기관리 전문가인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가 실제 사례들을 중심으로 기업의 위기관리 노하우를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직접 겪은 위기관리 사례를 공유하고 싶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김 대표의 e메일로 보내주십시오. 좋은 사례를 골라 본 글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85호 AI on the Rise 2019년 11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