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국내 금융회사들은 대규모 합병 및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합병 바람을 주도한 곳은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었다. 2001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은 ‘대등 합병’을 통해 총 자산 규모가 173조 원에 달하는 공룡 은행으로 탈바꿈했다.
지금은 3대 은행인 국민·신한·우리은행 간에 자산 격차가 거의 없지만, 당시에는 자산 규모가 100조 원이 넘는 은행은 국민은행뿐이었다.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은 물론 하나·외환·한미·조흥은행 등은 규모로 경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이후 한미은행과 조흥은행은 각각 씨티은행과 신한은행에 합병됐다.
이 대형 합병(mega merger)을 주도한 사람은 김정태 주택은행장이었다. 김정태 행장은 1998년 8월 동원증권 사장에서 주택은행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당시만 해도 은행업계, 즉 제1 금융권 종사자들은 증권회사, 투자신탁회사, 보험회사, 신용카드회사 등 제2 금융권 인사들을 한 수 아래로 폄하하곤 했다. 관가 못지않게 보수적인 은행업계에 겨우 51세의 증권회사 사장이 행장으로 등장했으니 금융권이 발칵 뒤집혔다. 게다가 김정태 행장은 스스로를 ‘장사꾼’이라 부르며 은행권의 보수적 문화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밝혔다.
당시 김 행장의 등장이 더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독특한 연봉 계약 때문이었다. 그는 외환위기라는 어려운 경제 사정을 감안해 “연봉을 단 1원만 받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경영 성과에 대한 스톡옵션만을 요구했다.
취임 후 김 행장은 부실의 나락에 빠지고 있던 대우그룹 여신 1조9000억 원 중 무려 1조5000억 원을 신속히 회수해 주택은행의 재무 건전성을 높였다. 이는 주택은행이 훗날 국민은행과 대등 합병을 이뤄내고, 그 자신이 통합 은행의 초대 행장으로 뽑히는 발판이 됐다. 김 행장이 최고경영자(CEO)라는 이유로 주택은행 주가는 금융시장 상황이 안 좋을 때에도 다른 은행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소위 한국식 ‘CEO 주가’의 원조라 평가할 만하다.
김 행장이 스톡옵션을 받았을 때, 스톡옵션의 행사 가격은 당시 국민은행 주가보다 상당히 높게 정해져 있었다. 즉 국민은행 영업 실적이 좋지 않았다면 해당 스톡옵션은 휴지 조각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국민은행은 합병 당시의 우려를 깨고 ‘규모의 우위’를 바탕으로 실적 개선을 이뤄냈다. 국민은행 주가도 꾸준히 올라갔다. 결국 김정태 행장은 2006년 스톡옵션으로 받았던 주식을 매각해 110억 원의 이익을 얻었다. 그간의 ‘연봉 1원’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 수준이었다.
김정태 행장의 ‘연봉 1원+스톡옵션’ 조건을 먼저 활용한 경영자도 있다. 1980년대 초반 미국 3위 자동차 업체 크라이슬러가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투수로 등판한 포드 출신의 아이아코카 회장도 연봉 1달러와 스톡옵션을 받기로 하고 CEO에 취임했다. 크라이슬러는 부활했고, 아이아코카도 스톡옵션을 행사해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3대 자동차 업체의 CEO들도 올해 초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당분간 연봉 1달러만을 받기로 약속했다.
한국은 왜 스톡옵션 사용이 미미했나
한국에 스톡옵션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이후다. 특히 2000년대 초반 잠시 벤처 붐이 일어났을 때, 기업공개(IPO)를 통해 엄청난 부자가 된 벤처 기업 경영자들의 이야기는 신문지상에 단골로 오르내렸다. 벤처 붐이 너무 빨리 꺼지는 바람에 재빨리 스톡옵션을 행사한 소수의 임직원들만이 짭짤한 수익을 올렸지만 말이다.
현재 스톡옵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그 이유를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을 주면 더욱 열심히 일할 동기가 생기고, 이는 미국인 특유의 개척 정신과 잘 맞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스톡옵션이 특히 미국에서 유행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간 스톡옵션 부여에 관한 비용을 회계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봉 20만 달러를 받는 기술자에게 연봉을 15만 달러로 줄이는 대신 15만 달러의 가치를 지닌 스톡옵션을 지급하겠다고 말하면 어떨까. 이를 마다할 기술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스톡옵션을 지급한다고 해서 회사가 지금 당장 현금을 지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래의 특정 시점에 해당 기술자가 스톡옵션을 행사한다면 회사는 15만 달러의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회계학은 비용을 ‘현재 발생한 사건의 결과로 현재 또는 미래에 현금 등의 순자산이 희생될 때 그 순자산의 현재 가치’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이 15만 달러는 비용이 분명하다. 즉 스톡옵션 부여 시점에 반드시 비용으로 처리해야만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를 비용 처리하지 않았다. 때문에 단기 업적으로 평가받는 경영자들은 현재의 인건비를 아끼면서 유능한 인재들을 스카우트하거나 회사에 붙잡아두기 위해 스톡옵션을 물 쓰듯 나눠줬다.
그 결과 경영자는 실제보다 높은 실적을 올리고, 두둑한 보너스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내부 사정을 모르는 외부인이 보면 해당 기업의 상황이 좋아 보이니 그 기업의 주가는 당연히 올라갔다. 마이크로소프트(MS)도 1995년 상장 당시까지 스톡옵션을 전혀 비용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엄청난 규모의 스톡옵션을 종업원들에게 지급했지만, 그 지급액을 전혀 비용 처리하지 않았으니 MS의 순이익이 급증하는 듯 보였다.
MS는 바로 이 시기에 주식시장에 입성했다. MS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당시 MS가 스톡옵션을 비용으로 처리했더라면 주가가 결코 그렇게 높은 수준을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때 스톡옵션을 비용 처리했다면 MS는 상장 전까지 단 한 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다시 기술자 얘기로 돌아가보자. 시간이 흘러 그 기술자가 스톡옵션을 행사하면 기업은 몇 년 전 절약했던 연봉 5만 달러보다 훨씬 많은 15만 달러를 지출해야 한다. 하지만 경영자에게 이는 먼 미래의 일일 뿐이다. 그 기술자가 스톡옵션을 행사하려면 최소 몇 년이 필요한데, 그때는 자신이 이 회사에 남아 있을 가능성보다 은퇴하거나 다른 회사로 옮겼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