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Highlight : 과학적 관점에서 본 지구의 기후

탄소는 죄가 없다. 인간이 문제다

316호 (2021년 03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정부, 기업, 개인 차원에서 탄소배출량을 감축해야 한다는 정치적 수사가 넘쳐나지만 과연 탄소를 줄이는 것이 최선일까. 기후변화로 인해 인간은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고 걱정하지만 영겁의 시간 변화를 견뎌 왔던 지구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문명과 발전에 역행하면서까지 탄소를 줄이는 것은 인류를 위한 이성적인 접근 방식이 아닐 수 있다. 대표적인 ‘탈탄소 산업’으로 인식되는 태양광•전기차•수소차 등이 탄소중립의 꿈을 이뤄줄 것이라는 기대도 과학적으로는 오류투성이다. 설령 사실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배출한 탄소가 지구온난화를 초래했다고 해서, 탄소를 감축한다고 온난화를 막을 수 있을지도 분명치 않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탄소를 배척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태도는 위험하며 비이성적이다.



편집자주
이 글은 『철학과 현실』 2020년 겨울 호에 필자가 기고한 ‘기후변화로 무너지는 탄소문화’를 참고했습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지구를 서둘러 구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절박하게 들린다. 실제로 지구 환경의 위기 수준을 나타내는 시계는 ‘매우 불안함’을 뜻하는 오후 9시47분을 가리키고 있다.1 2020년 여름 초대형 산불과 슈퍼 허리케인으로 몸살을 앓았던 미국이 올해는 100년 만에 찾아온 강력한 북극한파로 꽁꽁 얼어붙었다. 특히 미국의 에너지 자원이 집중된 텍사스에서 대정전으로 주민들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까지 벌어졌다. 인류의 무분별한 행동이 만들어낸 재앙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2100년까지 지구의 온도가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상 상승하면 지구는 인류가 더는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된다고 한다. 2018년 인천 송도에서 개최된 IPCC(정부 간 기후변화협의체) 제48차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에 따른 예상이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는 것이 당장 발등에 떨어진 최우선 과제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기후변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탄소’는 화학자들이 알고 있는 ‘탄소’가 아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탄소’는 수없이 다양한 탄소 화합물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에너지 상태에 해당하는 ‘이산화탄소’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런 이산화탄소는 함부로 탓할 수 없는 존재다. 우리가 함부로 버리고 있다고 지탄받는 이산화탄소가 사실 녹색식물과 녹조류(綠藻類)에게는 생존에 꼭 필요한 식량이기 때문이다. 자칫 탄소에 대한 과도한 거부감은 우리의 생물학적 생존은 물론 문화적 생존까지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후변화가 시대의 화두가 된 오늘날, 이산화탄소 배출을 무조건 줄이는 것이 답일까? 탄소를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과학의 정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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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변화하는 지구의 기후

세월이 흐르면 인걸(人傑)은 간데없지만 산천(山川)은 유구(悠久)하다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이다. 이는 자연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했을 때에 시작된 인간의 왜곡된 인식이다. 그런데 사실은 세월에 따라 인간만 진화하는 게 아니라 자연도 변한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와 티베트고원도 먼 옛날에는 깊은 바닷속에 잠겨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 울창하게 우거진 숲도 초원으로 변하고, 거대한 강줄기의 흐름도 바뀌기 마련이다. 과학의 눈을 통해서 어렵게 알아낸 오늘날 우리의 상식이다. 다만 인간의 진화와 자연의 변화는 그 속도가 매우 느릴 뿐이다.

기후 환경도 예외가 아니다. 45억 년 전 뜨거운 ‘불덩어리(fire ball)’로 탄생한 지구의 역사에서 기후변화는 일상(日常)이었다. 적도까지 꽁꽁 얼어붙어서 ‘얼음덩어리(snow ball)’로 변했던 대(大)빙하기가 적어도 5차례나 있었다. 지구상에 번성하던 생물종의 90% 이상이 멸종하는 재앙도 있었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마지막 대빙하기 끝자락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만2000년 전에 시작한 인류의 문명 생활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소빙하기와 간빙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석가모니•예수•마호메트도 소빙하기로 인류의 삶이 몹시 어려웠던 시기에 등장했고, 17세기 르네상스는 오랜 소빙하기 후에 모처럼 찾아온 따스한 간빙기(間氷期)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류의 과거도 절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우리가 지구온난화를 걱정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였다. 오늘날 기후변화 논란을 주도하고 있는 UN의 IPCC가 활동을 시작한 것도 1988년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는 정반대로 지구가 얼어붙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서울의 겨울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웠고, 폭설•가뭄•홍수가 잦았다. 1987년에는 태풍 셀마가 1959년 태풍 사라호의 기록을 갈아 치우며 ‘역대급 태풍’의 자리를 꿰차기도 했다. 지난 30년 동안의 온난화 덕분에 아득하게 잊혀 가고 있는 기억이다.

물론 기후변화의 속도가 최근 들어 빨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봄과 가을이 확연하게 짧아졌고, 겨울이 따뜻해졌다. 중위도 지역 대륙의 동쪽 가장자리, 반도에 자리 잡은 우리의 가장 독특한 기후 특징이었던 삼한사온도 혼란스러워져 버렸다. 대구 이남에서만 재배할 수 있었던 사과가 이제는 철원의 특산물이 돼버렸다. 열대성 과일로 알려진 바나나•파인애플•망고를 남해안 지역에서도 재배한다. 명태나 대구 같은 한류성 어종은 자취를 감췄고, 그 대신 난류성 어종인 오징어가 늘어나고 있다. 아열대 어종인 대형 가오리도 등장했다.

지구온난화는 한반도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전 세계에서 빙하가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다. 얼음에 덮여 있던 북극과 아이슬란드에서는 맨땅이 드러나고 있고, 남극에서도 걱정스러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히말라야의 거대한 빙하 조각이 떨어지면서 계곡 속의 빙하 호수가 넘쳐서 하류의 댐이 무너지고, 마을이 토사에 묻혀버리는 끔찍한 일도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북극의 냉기가 남쪽으로 번져 나타나는 북극한파도 온난화의 결과라고 한다. 평소 북극의 냉기를 가둬두는 역할을 하고 있던 제트기류의 세력이 지구온난화로 약해지면서 생기는 일이다.

극지방의 빙하와 고산지대의 만년설이 녹으면서 해수면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연안의 저지대나 섬 지역이 바닷속으로 잠기고 있다. 태평양의 투발루는 바다 밑으로 사라지는 중이다. 태평양과 대서양의 표층수가 뜨거워지면서 태풍과 허리케인의 규모도 커지고, 빈도도 잦아지고 있다. 2100년까지 지구의 온도 상승이 1.5도를 넘어서면 수천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식량과 물 부족에 허덕이게 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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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절망적인 미래 전망

기후변화에 대한 IPCC의 전망은 절망적이다. 그러나 미래를 불안하게 전망하는 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언제나 암울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에게 미래는 무섭고 두려운 것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인류가 주술사•신관(神官)•재사(才士)들의 어설픈 억지에 자신들의 미래를 맡겨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알렉산더대왕도 신관의 허락을 받아야만 정벌에 나설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인류의 미래를 알려주겠다며 나서는 어쭙잖은 미래학자들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통계를 이용한 미래 예측이 가능해진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세기의 토머스 맬서스는 인구와 식량 생산에 대한 통계를 근거로 암울한 관측을 내놓았다.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문제였다. 인류가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멸망하게 된다는 맬서스의 주장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맬서스의 예언은 적중하지 않았다. 경제학자였던 맬서스는 1920년대의 화학비료 개발과 1960년대의 녹색혁명을 예상하지 못했다. 화학비료•농약•농기계•육종(育種) 기술의 등장으로 맬서스가 걱정하던 식량 생산도 산술급수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지구상의 인구는 10억 명에서 78억 명을 넘어서게 됐다.

마찬가지로 기후변화에 따른 IPCC의 종말론적 전망에 대한 과학계의 반론이 없는 건 아니다. IPCC의 전망은 뉴턴의 운동법칙과 같은 제1 원리(first principle)에서 직접 유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관측 자료와 복잡한 이론적 모델을 이용한 통계 분석의 결과에는 언제나 상당한 수준의 불확실성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인류가 지구환경에 대한 정확한 관측 기록을 확보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매우 새로운 경험이다. 17세기 근대 과학혁명과 18세기 산업혁명, 19세기의 현대 과학혁명을 통해서 어렵사리 가능해진 일이다. 결국, IPCC의 전망은 고작 한 세기의 관찰을 근거로 한 제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미래를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드넓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지구에만 생명이 번성하게 된 것은 기적이며, 지구에서 생명의 번성은 절대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니다. 지구의 환경은 언제나 위태롭다. 태양의 활동, 지구의 공전 궤도, 지구 자전축의 기울어짐, 지구 자기장의 변화, 지각판 움직임, 대형 화산과 산불, 해류의 변화 등이 모두 지구의 기후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과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다만 그런 효과들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제는 인간까지 나서서 지구의 환경과 기후를 변화시키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우리가 배출한 온실가스의 양이 산업혁명 이전에 지구가 65만 년 동안 배출한 양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은 몹시 불편한 진실이다. 산업혁명으로 인류가 무분별하게 온실가스를 내뿜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IPCC의 경고는 엄중하다. 이에 더해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석유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에 온실가스의 배출량을 줄이는 노력은 어차피 필요한 것이었다. 20세기처럼 자원과 에너지를 무분별하게 낭비하는 관행은 이제 용납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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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아니라 ‘인간’이 문제다

지구온난화를 흔히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완전한 착각이다. 반지름이 6300㎞에 이르는 지구는 쉽게 뜨거워지지 않는다. 더욱이 지구의 중심에는 핵분열을 일으키는 거대한 원자로가 자리 잡고 있다. 지구 중심의 온도는 태양의 표면 온도에 버금가는 섭씨 6000도에 이른다. 수십 ㎞ 두께를 가진 지각(地殼)의 밑에는 모든 것이 시뻘겋게 녹아 있는 마그마가 존재한다. 화산이 폭발할 때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용암(鎔巖)이 바로 그런 것이다. 지하 세계의 연옥(煉獄)을 지배하는 하데스의 전설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러나 온실가스 배출 때문에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지구온난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대기 중의 온실가스가 늘어난다고 지구가 뜨거워지지는 않는다. 지구 표면을 덮고 있는 ‘대기’가 뜨거워질 뿐이다. 지구의 대기 온도가 몇 도 올라간다고 지구가 몸살을 앓을 이유도 없다. 지구 표면에서 힘겹게 생존하고 있는 인간을 비롯한 생물들에게만 문제일 뿐이다. 제한된 적응력을 가진 인간에게 대기의 온도 상승에 의한 기후변화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우리 능력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IPCC의 주장처럼 인간이 심각한 온난화의 원인을 제공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 온난화를 초래했다고 해서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시계를 망가뜨리는 일과 고장 난 시계를 고치는 일은 별개다. 어린아이가 정돈된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순 있지만 어지러운 방에서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다고 방이 정돈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 당장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도 온난화가 쉽게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IPCC조차 인정하는 진실이다. 온실가스 배출 감축이 필요한 일이지만 기후변화를 바로잡기 위한 효과적인 대안인지는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냉정한 대응이 필요하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변화하는 기후를 원래 상태로 돌리기 위해 기온의 상승을 억제하는 길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지구의 변화를 인간이 원하는 쪽으로 유도하겠다는 것으로, 위험한 환상일 수 있다. 자연을 우리의 힘으로 정복하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온실가스 배출만 줄이면 해결되는 문제라 해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온실가스 배출 총량을 산업혁명 이전의 수준으로 낮추려면 한 사람이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양을 90% 이상 줄여야만 한다.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석탄 화력과 LNG 화력은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우리가 에너지(전력) 생산에 사용하는 화석연료의 양은 전체 소비량의 20%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석유 대부분은 우리 생활에 필요한 플라스틱•섬유•합성고무•염료•의약품 등의 생산에 사용된다. 전력 생산을 줄이는 데만 매달려서는 온실가스 배출 감축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결국, 기후변화를 막을 정도의 규모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려면 에너지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명 생활을 송두리째 포기해야만 한다.

두 번째는 우리 스스로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하는 길이다. 유전자를 바꿔서 더운 기후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생물학적 진화(biological evolution)’는 함부로 시도할 수 없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결국은 ‘기술적 적응(technological adaptation)’을 시도해야 한다는 의미다. 더운 기후에서 잘 자라는 작물과 가축을 개발해야 한다. 인간이 쾌적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생활환경을 조성하는 기술도 필요하다.

물론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하려면 에너지를 생산하는 기술도 개발해야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태양광•풍력•조력(潮力)의 간헐성은 쉽게 극복하기 어렵고, 생산이 쉽지 않은 수소도 대안이라고 보기 어렵다. 현재의 기술 수준에서는 핵분열과 핵융합이 가장 가능성 있는 선택으로 보인다. 물론 위험하지만 아예 포기할 수는 없다. 안전을 강화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 대안이다.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생존이 힘든 상황에서는 ‘아름답고 따뜻한 자연’은 무의미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생명의 원소, 만물의 ‘아르케’

탄소가 없으면 생명 현상 자체가 불가능하다. 생명체의 조직과 기관을 구성하고, 복잡하고 정교한 생리 현상을 가능하게 해주고, 자식에게 유전 정보를 전달해주는 모든 일에 탄소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외계 생명도 역시 탄소에 의존할 수 있다. 현대 화학과 생명과학이 밝혀낸 엄중한 과학적 진실이다. 지금까지 존재가 확인된 118종의 원소 중 생명 현상에 필요한 수준의 화학적 다양성을 제공해줄 수 있는 원소는 탄소뿐이다.

‘물’이 생명의 근원이고 만물의 아르케(原質)라는 탈레스의 주장은 탄소의 존재와 가치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의 순진한 상상이었다. 물론 액체 상태의 물이 없는 곳에서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우주에서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골디락스 행성’을 찾는 일도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물만으로는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고, 생명에 필요한 생리 작용이나 유전(遺傳) 현상도 일어날 수 없다. 물이 생명에게 꼭 필요한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물이 생명의 아르케라는 주장은 용납할 수 없다.

탄소는 세상에서 6번째로 가볍고 작은 원소다. 그런 탄소의 화학적 다양성은 놀라운 수준이다. 지금까지 화학적으로 확인된 1억 종이 넘는 화합물의 70%가 탄소의 화합물이다. 대부분의 탄소 화합물은 생명과 직접 관련돼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생명 현상과 직접 관련된 단백질과 DNA의 종류만 해도 6000만 종이 넘는다. 모두가 탄소의 독특한 양자역학적 성질 덕분이다.

실제로 탄소는 다양한 화학적 상태로 존재한다. 2개의 산소와 결합한 ‘이산화탄소’가 산화 상태 +4의 낮은 에너지를 가진 화학적으로 가장 안정한 상태이다. 모든 탄소의 화합물은 궁극적으로 산소와 결합하는 ‘산화(酸化)’ 과정을 통해서 가장 안정한 이산화탄소로 전환된다. 실제로 생명이 존재하지 않은 행성의 대기에 남아 있는 탄소는 대부분 이산화탄소로 존재한다. 수성과 금성의 대기가 그렇다. 지구의 대기 중에 들어 있는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도 이산화탄소의 에너지 안전성 때문이다.

지구상의 생태계는 다양한 산화 상태의 탄소 화합물을 만들어낸다. 녹색식물이 햇빛을 이용해서 공기 중 이산화탄소를 부분적으로 환원시켜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탄수화물과 메탄을 비롯한 탄화수소가 대표적인 예다. 동물은 식물이 만들어준 탄수화물을 다시 이산화탄소로 산화하는 과정에서 얻은 에너지로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자연 생태계에 숨겨져 있는 생명에 의한 ‘탄소 순환(carbon cycle)’이다. 결국, 이산화탄소는 지구 생태계를 떠받쳐주는 핵심 물질이다.

탄소가 우주 공간이나 지구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은 아니다. 탄소는 우주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별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에서 만들어지는 원소이다. 태양보다 큰 별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초신성(超新星) 폭발에서도 만들어진다. 그런 탄소가 태양보다 큰 별에서 일어나는 핵융합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촉매(觸媒) 역할을 한다. 탄소•질소 순환과정(C-N cycle)을 밝혀낸 한스 베테는 196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태양에 존재하는 탄소의 양은 전체 질량의 0.29%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의 지각에서도 탄소는 산소, 규소(실리콘), 알루미늄, 철 등에 이어 17번째로 흔한 원소일 뿐이다. 그런데 생명체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우리 몸의 18%가 탄소이다. 우리 몸무게의 70%를 차지하는 물을 구성하는 산소를 빼고 나면 탄소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원소다. 탄소가 생명의 진정한 아르케라는 또 다른 근거이다.

생명체는 음식으로 섭취한, 부분적으로 환원된 탄소 화합물을 이용해서 조직과 기관을 만들고, 그 에너지를 이용해서 생명 현상을 이어간다. 실제로 우리 몸을 구성하는 60조 개의 세포가 모두 탄소의 화합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생리 작용을 정교하게 통제해주는 효소와 호르몬과 같은 단백질도 탄소의 화합물이다.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데 필요한 생리적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탄수화물이나 지방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생명의 연속성에 꼭 필요한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DNA와 유전 정보로부터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RNA도 탄소 화합물이다. 탄소 화합물이 ‘유기물(有機物)’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유도 생명을 가진 유기체의 전유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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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문명은 탄소 문명

육체적으로 연약한 인간이 거칠고 위험한 야생에서 살아남아 문명을 꽃피운 것은 ‘기술(technology)’ 덕분이다. 50만 년 전에 불을 사용했고, 1만2000년 전에 농경과 목축을 시작했다. 인류가 처음 사용한 불은 셀룰로스라는 탄소 유기물을 주성분으로 하는 임산(林産) 연료를 화학적으로 연소하는 과정이다. 그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과 빛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농경과 목축도 식물과 동물이 가지고 있는 탄소 유기물의 생물학적 합성 능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안정적인 식량 확보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창조적인 시도였다.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곡류와 육류는 모두 농작물과 가축이 만들어내는 탄소 유기물이다. 다시 말해, 인류 문명의 핵심은 자연 생태계에 의존하던 탄소 유기물을 농경과 목축 기술을 이용해서 스스로 자급하겠다는 노력의 결과였다.

생명의 원소인 탄소는 인류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이었다. 인류 문명은 흔히 청동이나 철과 같은 소재를 근거로 구분한다. 그러나 그런 시대적 구분도 탄소로 구성된 식량, 섬유, 염료, 의약품, 목재, 종이의 생산이 전제돼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청동기와 철기 시대는 임산 연료를 가공한 탄소 덩어리인 ‘숯’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가능해졌다. 18세기의 산업혁명은 석탄을 안전하게 연소시키는 화로(보일러)를 이용하는 증기기관 덕분에 시작됐다. 20세기의 인류 문명도 ‘석유’의 등장으로 가능해졌다. 정보화 시대를 가능하게 만들어준 전기도 대부분 석탄과 같은 탄소를 이용해서 생산했다. 탄소를 이용해서 생산하는 에너지가 인류 문명의 급속한 발전을 가능하게 만들어줬다는 뜻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인류의 탄소 의존도는 더욱 빠르게 심화됐다. 천연물에 의존하던 염료, 섬유, 의약품을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효율적인 화학 기술이 등장했다. 20세기에는 탄소를 기반으로 하는 고분자 합성 기술이 등장했고, 이제는 미래의 소재로 전망되는 탄소 기반의 첨단 나노 소재가 개발되고 있다. 탄소의 다양성을 활용하는 기술은 앞으로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것이 분명하다. 탄소의 활용을 포기해버리면 인류의 삶은 야생의 짐승들 수준의 수렵 채취 시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야생의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수렵 채취 시대의 인간은 하루 2000kcal의 에너지로 생명을 유지했다. 농경 목축 시대의 인간은 하루 5000kcal의 에너지를 활용했고, 18세기 산업혁명 이후에는 하루 2만 kcal가 넘는 에너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하루에 4만 kcal를 사용한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기후 환경을 극복하거나 적응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한다.

1인당 에너지 소비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지구상의 인구도 가파르게 늘어났다. 인구가 27억 명이었던 1955년의 전 세계 에너지 총소비량은 33억 톤(석탄 환산량)이었다. 인구가 50억 명을 넘었던 1995년의 에너지 소비는 3.3배나 늘어난 110억 톤이 됐다. 1.2톤이었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40년 만에 75%나 늘어난 것이다. 인구가 80억 명에 이르게 될 것으로 전망되는 2025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무려 170억 톤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이제 와서 에너지 소비를 포기하고 짐승처럼 살 수는 없다.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는 일은 만만치 않다. 연료를 생산하고, 운반하고, 소비하는 일에 비용과 노력, 그리고 상당한 수준의 첨단 기술력이 필요하다. 이제는 자원의 고갈도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도 에너지 수급에 영향을 미친다. 중동(中東)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촉발된 1970년대의 석유파동은 전 세계의 경제를 휘청이게 했다. 최근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오는 셰일 가스가 에너지 시장의 상황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에너지 소비의 양극화도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다. 누구나 에너지를 풍족하게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이 선진국의 20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은 저개발국들의 사정은 만만치 않다. 삶의 질 개선을 위해서 더 많은 에너지의 소비가 절실한 것이 후진국의 현실이다. 그런 후진국을 상대로 재앙적인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주문하는 선진국의 일방적인 주장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탈원전•탈석탄은 잘사는 나라의 무분별한 사치(奢侈)일 수 있다. 한국은 원전과 석탄을 포기하는 대신 훨씬 더 비싼 LNG를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을 비롯한 저개발국가의 형편은 전혀 다르다. 탈석탄을 핑계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첨단의 석탄 발전기 제작 기술까지 폐기해버리면 저개발국가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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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이성적 노력

탄소를 현대 인류 문명을 위협하는 악(惡)의 상징으로 인식하는 분위기는 매우 걱정스럽다. 지구의 대기가 뜨거워지고 있고, 우리의 화석연료 소비가 과도할 수는 있다. 지구온난화가 우리의 과도한 화석연료 소비 때문이라는 지적도 마찬가지로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경제, 사회, 정치, 문화적 문제가 탄소 때문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턱없이 부족한 억지다.

더욱이 화석연료의 소비를 줄이고,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줄이면 반드시 지구온난화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화석연료의 사용을 포기한다고 지구가 다시 식어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환경 문제를 소홀히 여기고 화석연료를 마구 써버린 우리의 실수를 엉뚱하게 탄소의 탓으로 돌려버리려는 자세는 비겁하다.

사실 우리에게 변화하는 기후를 되돌릴 수 있는 초월적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거대한 자연의 변화를 막아낼 수 있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이고 기술만능주의에 기반을 둔 착각에 불과하다. 인간이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당면한 가장 절박한 과제가 도도한 자연의 변화를 바꾸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며, 탄소에 대한 공연한 거부감이 자칫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절박한 노력에 독(毒)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탄소는 우리가 거부해야 할 악(惡)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선(善)으로 규정할 수 있다. ‘탄소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화학을 포함한 현대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정체성 확인과 문명의 견인차가 돼 왔고,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 과학이 인간의 문제를 고민하는 인문•사회•문화•예술과의 적극적인 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국도 기후변화 이슈를 외면해 오지는 않았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통해 경제적 성장까지 추구하는 일석이조의 ‘녹색성장’을 핵심 국정과제로 밀어붙인 정권도 있었다. 국제사회에 자발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환경과 경제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녹색성장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12년의 갑작스러운 정전 경험은 우리의 생각이 순진했음을 일깨워줬다.

2017년 이후 느닷없이 시작된 탈원전•탈석탄도 역시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노력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2030년까지 배출량 기준으로 37%를 감축하겠다고 약속했던 온실가스 배출량이 오히려 15% 증가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평가다. 이로 인해 한국은 국제사회로부터 ‘기후 악당’이라는 누명을 쓰게 됐다. 말만 요란했지 정작 지구촌을 위해서 해내야만 하는 책무는 철저하게 외면하는 3류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최근 발표된 ‘탄소중립의 비전’도 공허하긴 마찬가지다. 30년 전의 ‘더 늦기 전에’라는 유행가를 앞세운 비전 선포 연설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탄소중립의 목표가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석탄발전소를 없애고 재생에너지를 확대한다고 탄소중립이 실현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간헐성과 효율성을 극복할 수 없는 재생에너지의 확대에는 반드시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내뿜는 LNG 발전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상식은 가볍게 무시됐다. 소재 생산과 가공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내뿜을 수밖에 없는 태양광•전기차•수소차 산업을 ‘대표적인 탈탄소 산업’으로 인식하는 황당한 오류도 바로잡지 못했다.

탄소를 쓰지 않는다고 무조건 친환경적 선(善)이라는 인식은 매우 위험하다. 신재생에너지에 의한 환경 파괴, 감당하기 어려운 대형 사고, 식량 생산과의 경쟁으로 촉발되는 윤리 문제도 화석연료의 오남용에 못지않을 정도로 심각하다. 에너지 전달 수단에 불과한 수소를 친환경적인 청정에너지라고 주장하는 것도 황당하고 무책임하다. 친환경을 앞세운 화려한 정치적 수사(修辭)에 현혹돼 어설프게 탄소를 거부하다가는 자칫 더 큰 재앙을 자초할 수도 있다. 단순히 이산화탄소의 배출만 줄이는 노력보다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기술이 훨씬 더 중요하다. 녹색식물의 광합성을 흉내 내는 인공 광합성 기술도 놓쳐서는 안 된다.

탄소의 진정한 가치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지혜롭게 활용하는 ‘탄소 문화’의 창달을 시대적 당위로 인식해야만 한다.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탄소 문화의 핵심이다. 2000년 전의 낡은 세계관과 생명관으로는 현대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 현대 과학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거부감을 최소화해야 한다. 친(親)탄소, 친(親)과학적인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탄소가 인간의 존재와 인류 문명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었고, 탄소의 그런 역할은 앞으로도 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과학 정신’이 필요하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이덕환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 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프린스턴대 화학과 연구원을 거쳐 현재 서강대 화학과 및 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비선형 분광학, 양자화학, 과학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으며 대한화학회장, 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 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4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2006년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상을 받았고, 과학기술훈장 웅비장(2008)을 수상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1호 Data Privacy in Marketing 2021년 10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