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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과 경영

게임으로 엿보는 ‘이미 와 있는 미래’

이경혁 | 305호 (2020년 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게임은 상상력의 한계가 없다. 그래서 게임 속에는 역사 속에 존재했던 산업 발전의 과정이나 우리가 상상하는 가장 이상적인 미래의 생산 시스템이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구현됐을 때의 모습 등이 담겨 있다. 1차 산업혁명의 이상적 모습을 그린 게임 ‘룸’부터 2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대량 생산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는 ‘문명’, 자동 생산 시스템을 게임에서 구현한 ‘팩토리오’까지 지난 게임에는 산업 발전 과정이 담겨 있다. 또한 최근 출시되고 있는 게임들에는 드론, 로봇,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들이 바꿔놓은 미래가 자주 등장한다. 이들 게임은 특유의 상상력을 통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상황과 다양한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관심은 현재진행형이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을 접목하기 위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고 실제 성공적으로 도입한 사례들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4차산업혁명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는 이미 많은 곳에서 다룬 바 있어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하기에는 진부해 보인다. 그러나 디지털 게임 매체가 1차, 2차, 3차, 4차 산업혁명 전반에 걸친 변화의 의미들을 어떻게 다뤄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각각의 변화 지점들이 갖는 의미를 보다 색다른 관점에서 두드러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산업 발전의 과정이나 우리가 상상하는 가장 이상적인 미래가 게임이라는 가상공간에서 구현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디지털 게임이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생산 시스템의 변화 과정이 갖는 특성들을 어떻게 게임 속 세계에서 펼쳐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8세기 후반에 이뤄진 산업혁명기에 보여준 기계의 도입,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이뤄진 대량 생산 시스템의 성립, 20세기 중·후반에 갖춰지기 시작한 자동화 시스템과 다가오는 미래의 생산 구조로 각광받는 인공지능, IoT에 기반한 4차 산업혁명 시스템까지 이어지는 생산 과정의 여러 장면을 디지털 게임은 생동감 있게 포착하며 현실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지점들을 제시한다. 생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들이 담고 있는 은유를 새로운 시공간에서 풀어내며 그 의미를 되짚는 게임 속 산업혁명의 이야기들을 따라가 보자.

1차 산업혁명: 자동 베틀의 판타지, LOOM

아직 PC가 대중화되기 이전인 1980년대 ‘인디아나존스’ ‘스타워즈’ 등의 인기 영화를 만들어 이름을 날리고 있던 루카스필름은 자회사 루카스아츠를 통해 게임도 만들어 판매했다. 특히 전투나 액션보다는 이야기와 퍼즐을 중심에 두는 ‘어드벤처 게임’ 장르의 작품들을 출시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루카스아츠는 1990년 ‘룸(LOOM)’이라는 이름의 어드벤처 게임을 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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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은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다. 이 세계에서는 직업공들의 모임인 길드가 국가보다도 강력한 사회 조직이다. 양치기, 유리 장인, 목수, 옷감을 짜는 직조공 등 직업별로 강력한 길드를 형성하고, 길드는 소속된 개인들의 삶과 일자리를 책임진다. 국가의 빈자리를 채우는 게임 속의 길드들은 서로 간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전쟁도 불사할 정도로 강력했고, 이른바 ‘위대한 길드의 시대’라고 불리는 역사를 만들어 냈다.

게임의 주인공(플레이어)은 직조공 길드 소속이다. 직조공 길드는 여러 길드 중에서도 특히 신비롭다. 이들은 아름다운 천을 짜는 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 외부인과의 교류를 끊은 채 섬에 틀어박혀 오로지 직조기술만 연구하며 살아가는 집단이었다. 기술에 대한 집착은 놀라운 성과를 이끌어냈다. 어느 순간부터 직조 길드는 빛과 음악만으로 옷감을 만들어내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렇게 만들어낸 옷감에는 마법적 힘마저 깃들기 시작했다. 직조공 길드는 더욱 발전한 기술을 지키기 위해 더 깊이 은둔한다. 주인공의 이야기는 이런 배경 속에 시작된다.

섬유와 염료 없이도 천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마법의 힘마저 깃든다는 전형적인 판타지스러운 배경 설정이지만 의외로 게임 ‘룸’은 역사적 사실로부터 많은 모티프를 가져왔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제목에 들어 있는 룸이라는 단어다.

룸은 베틀이라는 뜻의 영단어다. 직조공 길드 마을에서는 가장 큰 천막 안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베틀을 볼 수 있다. 사람이 굳이 손대지 않아도 알아서 빛과 음악을 모아 씨실과 날실 삼아 마법의 옷감을 만들어내는 베틀은 직조공 길드의 상징이자 직조 산업의 심장으로 게임 속에서 그려진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베틀이라는 게임 속 존재는 실제 역사에서도 산업혁명과 깊은 관계를 지닌다. 산업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기계 장치에는 자동화된 베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베틀은 섬유를 세로 방향(날실)과 가로 방향(씨실)으로 교차해 선(線)으로서의 섬유를 면(面)으로 바꿔내는 작업을 한다. 가느다란 실 가닥을 계속 얽어내며 넓은 면의 직물로 만드는 작업은 베틀이라는 수공구가 있더라도 고되고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게 된 계기가 산업혁명 시기에 등장한 ‘플라잉 셔틀(Flying shuttle)’이다. 셔틀은 세로로 고정된 날실 사이를 손으로 들고 가로지르도록 만들어진 장치다. 우리말로는 이를 ‘북’이라고 부르는데, 이 북의 가로 운동을 자동화할 수 있도록 스프링 장치가 추가된 것이 플라잉 셔틀이다.

1733년 발명된 플라잉 셔틀은 노동자에게 가장 고되고 오랜 작업이었던 북의 가로 운동을 자동화하면서 방직 산업의 생산량을 크게 늘렸다. 직물의 생산량이 늘자 원료인 실이 부족해지고, 이에 따라 1767년 개발된 자동 기계가 ‘제니 방적기’다. 이처럼 신기술이 적용된 베틀 한 대가 만들어내는 생산량 확대는 방직 산업 전반의 연이은 기계화를 촉발했다. 여기에 증기기관과 수력 같은 외부 동력이 추가되면서 본격적으로 기계화된 공업 시대가 열리고 역사에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폭발적인 발전의 순간이 기록되기에 이른다.

어드벤처 게임 ‘룸’에서 직조공 길드의 한복판에 놓인 자동 베틀의 의미는 그래서 산업혁명이라는 생산기술의 혁신적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폭발적인 생산력 향상, 그리고 기계로 만들어진 균일한 품질은 이전까지 기계화된 양산 체제를 겪어보지 못했던 18세기 사람들에겐 마치 마법과 같은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룸’에서 직조공 길드가 만들어내는 고도화된 직조 기술의 산물 또한 마법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정은 그래서 자동화된 베틀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생산품을 받아들이는 일반 시민들의 입장이기도 하다.

동시에 게임 ‘룸’의 설정 중 한 축을 이루는 이야기, 즉 길드의 시대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게임 속 배경 또한 우리 역사 속 자동 베틀의 이야기와 엮인다. 증기 발전과 기계의 도입이라는 1차 산업혁명기를 맞으며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들에 의해 이뤄졌던 공장제 수공업 시대는 저물기 시작했다. 기계화된 생산 과정은 과거보다 훨씬 낮은 숙련도로도 동일한 생산 품질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에 고숙련 수공업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익 보호를 위해 결성했던 길드의 힘도 점차 약화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새로 도입된 기계화된 생산 시스템은 위기감을 느낀 고숙련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다가왔고, 기계를 부수거나 고장 내는 방식의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룸’의 판타지적 설정은 1차 산업혁명기의 생산 현장을 둘러싼 상황들을 가상의 세계로 오마주해낸 것이다. 마법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발전한 산업기술, 그리고 그와 함께 점차 몰락해 가는 숙련공들의 길드 이야기는 동화 같은 판타지 공간에서 1차 산업혁명기의 변화들에 대한 색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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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혁grolmarsh@gmail.com

    현)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게임문화 연구, 게임연구자
    현)시사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 게임 관련 패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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