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ve Minds
Article at a Glance
픽사애니메이션의 성공을 이끌고 있는 존 래스터는 디즈니의 ‘칼 아츠’를 다니면서 애니메이션계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1981년 컴퓨터그래픽에 꽂힌 이후 평생을 ‘비주류’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비주류성’이 혁신과 창의성을 낳았고 픽사의 대성공을 만들어냈다.
픽사는 창조의 원천인 다양성을 확보하고 아이디어 창출을 돕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다.
1) 직원들에게 충분한 권한을 준다
2) 아이디어가 불어나도록 자극한다.
3) 직원들이 교류하도록 한다. |
“존, 그런데 그 큰 전등은 엄마야? 아니면 아빠야?”
‘룩소 주니어’ 시사회를 보고 컴퓨터그래픽 전문가인 엔지니어 친구가 존 래스터(John Lasseter)에게 와서 물었다. 래스터는 그 친구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다가올 때, 그림자 효과를 만드는 알고리즘이나 난해한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그 순간 래스터는 자기가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2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룩소 주니어’는 1986년 8월 텍사스 주의 댈러스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컴퓨터그래픽 콘퍼런스인 시그래프(SIGGRAPH) 총회에서 상영됐다. 몇 달 전 루카스필름 컴퓨터사업부에서 스티브 잡스에게 인수돼 독립한 픽사가 야심 차게 만든 작품으로, 지금은 픽사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된 애니메이터, 존 래스터가 감독했다. 시그래프 총회에 참석한 6000명의 관객들은 대부분 컴퓨터그래픽 종사자였는데, 이들조차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이야기에 빠져서 영화를 봤던 것이다.
처음 ‘룩소 주니어’를 만들었을 때, 래스터는 어떻게 하면 캐릭터를 생동감 있게 표현할지만 생각했다. 이야기의 구성 같은 건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브뤼셀에서 열린 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초기 테스트용 화면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그것을 보고 벨기에의 존경 받는 애니메이터 라울 세르베(Raul Servais)가 이렇게 조언해줬다.
“아무리 짧은 영화라고 하더라도 시작과 전개가 있고 또 결말이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 전개를 놓쳐버리면 안 됩니다.”
래스터는 분량이 너무 짧아서 스토리를 담아낼 수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세르베가 이렇게 말했다.
“10초짜리 영화에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어요.”
이 한마디가 래스터의 뇌리에 강력히 박혔다. 이후 그는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스토리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최종 완성한 ‘룩소 주니어’는 최첨단 기술을 적용했지만 이 기술로 캐릭터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픽사의 성공은 여기서부터 잉태되기 시작했다. 픽사는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부터 최근 히트하고 있는 ‘인사이드 아웃’까지 15개의 개봉 작품을 100% 히트시키고 있다. 이런 픽사의 창작을 이끌어온 래스터. 그는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주고, 예술은 기술을 변모시킨다(Technology inspires art, and art challenges the technology)”라는 명언을 했다. 이것은 어릴 때부터의 생각이었다.
기술에서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본 래스터
래스터는 1957년 캘리포니아 주의 할리우드에서 자동차 판매상으로 일하던 아버지와 고등학교 미술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하고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래스터는 고등학생이 됐을 때도 만화영화를 끊지 못했다. 심지어 어린이 프로그램 편성 시간에 TV에서 나오는 ‘벅스 버니’를 보려고 고등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에까지 죽어라 뛰어가곤 했다. 친구들은 만화영화란 초등학생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몰래 이런 취미를 즐겼다. 그래서 디즈니 만화영화를 보러 갈 때는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어머니의 차를 얻어 타고 극장에 다녔다. 어느 날 디즈니 영화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어머니가 데리러 왔을 때, 래스터는 어머니에게 그동안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했다. 바로 디즈니에 취직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존, 정말 멋진 목표를 세웠구나”라며 격려해줬다.
어머니의 응원에 용기를 얻은 래스터는 디즈니에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편지에 넣어 보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그림 실력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고, 학급 친구들은 그를 ‘최고의 화가’로 뽑았다.
3학년 때 월트 디즈니가 세운 캘리포니아예술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Arts, 칼아츠)로부터 한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에 참가하라는 초대장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결국 1975년 칼아츠에 입학했다. 래스터는 훗날 유명한 감독이 될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20명 급우 중에는 ‘인어공주’를 감독한 존 머스커(John Musker)나 픽사의 ‘인크레더블’과 ‘라따뚜이’를 만든 브래드 버드(Brad Bird)도 있었다. 괴짜 감독 팀 버튼(Tim Burton)은 래스터보다 1년 뒤에 들어왔다. 래스터는 애니메이션에 미쳐 있는 학생들이 모인 곳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이곳 학생들은 졸업 전에 디즈니에 취직하곤 했는데, 래스터는 학사 학위를 받으려고 디즈니의 입사 제안을 거절했다. 그가 학창 시절에 만든 두 편의 작품 ‘숙녀와 램프’ ‘악몽’은 각각 1979년과 1980년에 애니메이션 부문 학생 아카데미상을 연이어 받았다. 칼아츠 시절 이미 화려한 경력을 쌓은 래스터는 졸업 후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은근한 경계 속에 1979년 디즈니에 입사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건 당시가 디즈니의 암흑기였다는 사실이다. 한때 최고 인기를 누리던 TV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떨어졌고 작업 중인 애니메이션은 시시한 것들뿐이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애니메이션의 보조 작업은 래스터가 꿈꾸었던 일이 아니었다. 답답함을 느끼던 래스터는 잠시 디즈니를 떠나 다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옮겨봤지만 거기서도 성취감을 맛보지 못하고 1년도 안 돼 다시 디즈니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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