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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n Case Study

‘돈 잡아먹는 벌레‘ 비난 뚫고 50년 연구 도레이, 탄소섬유를 황금알로 바꿨다

이우광 | 170호 (2015년 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전략

 

사양산업으로 치부되는 섬유를 주력 사업으로 삼고 있는 일본 섬유회사 도레이가 지난해 역대 최고 실적을 내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도레이는 다른 기업들도 철수하는저무는 시장에서 글로벌화, 새로운 소재 개발 등으로잔존자 이익을 향유하고 있다. 특히 유니클로와의 협업은 상상치 못한 시너지 효과를 내며오픈 이노베이션의 베스트 프랙티스로 남게 됐다. 도레이의 또 다른승리 방정식은 탄소섬유의 개발 과정에서 읽을 수 있다. ‘돈 잡아먹는 벌레라는 사내 비난 속에서도 50년 이상 개발을 지속하면서 경쟁사가 넘보기 어려울 정도의 원천기술을 축적했다. 그동안 규모의 경제, 자본의 논리로 달려온 우리 기업들에 도레이의 승리 방정식은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세계 최대 섬유회사는 도레이

최근 일본에서는 섬유회사 도레이(TORAY)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이 업체는 사양산업인 섬유를 주력사업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14년도 역대 최고의 매출과 이익을 거뒀다. 뿐만 아니다. 2014 11월에는 미국 보잉사와도 1조 엔 규모의 항공기용 탄소섬유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 소재개발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또 도레이 회장인 사카키바라 사다유키(原定征) 씨는 현재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게이단렌(經團連) 회장을 맡고 있다. 일본의 주력산업인 자동차·전기·철강 출신이 아니라 섬유산업 출신이 이 단체의 회장을 맡게 된 것은 사상 초유의 사건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정작 도레이가 세간의 주목받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사양산업인 섬유 회사가 어떻게 세계 초일류기업이 됐는가 하는 점이다. 또 어떻게 꿈의 소재라 불리는 탄소섬유의 선도 기업이 됐는지도 관심사다. 도레이의 탄소섬유는 50여 년 동안 묵묵히 개발에 매진한 결정체라 할 만하다. 이것이 많은 기업들이 도레이의 연구개발 시스템에 주목하는 배경이다. 뿐만 아니다. 타 업종기업인 유니클로와의 협업으로 섬유회사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한 것도 높게 평가할 만하다. 이는 경영학 교과서에 실릴 만한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레이는 최근 한국 진출에도 적극적이다. 탄소섬유를 한국에서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첨단기술이 한국으로 유출될 것이라는 일본 국내의 부정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내린 과감한 결단이다.

 

게다가 미래의 먹거리인 분리막 사업 확대를 위해 웅진케미컬도 인수했다. 도레이의 글로벌 전략은 다른 일본 기업과는 좀 다르다. 과연 도레이는 사양산업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승승장구하는 것일까?

 

도레이는 이익기준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 섬유회사다. 도레이는 항공기용 탄소섬유 등 첨단 소재를 만드는 회사라는 인식이 퍼져 있으나 주력은 여전히 섬유 분야다.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섬유 비중이 41.1%나 된다. 아직도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 등 대부분의 섬유소재를 생산하고 있다. 도레이와 비견할 만한 섬유 제조업체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의 듀퐁, 독일의 BASF 등은 이미 합섬사업을 매각한 지 오래다. 한국, 인도, 중국 등지 섬유업체들도 생산능력으로는 도레이를 능가하기 어렵다.

 

사실 도레이는 생산능력만 놓고 보면 세계 10위권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익은 단연 톱이다. 아사히카세이, 도요보, 테이진 등 일본 섬유회사의 이익을 다 합쳐도 도레이의 절반 이하다. 도레이는 20143, 매출 18377억 엔, 영업이익 1052억 엔을 돌파하며 역대 최고 실적을 거뒀다. 무엇이 사양산업인 섬유를 주력사업으로 삼고 있는 도레이의 실적을 견인했을까. 도레이의 승리 방정식이 무엇인지 이 회사의 발전사에서 힌트를 찾고자 한다.

 

나이론 특허침해 사건이 전화위복  

도레이의 시초는 1926, 인류 최초의 합성섬유인 레이온을 영국으로부터 수입하던 미쓰이물산이 국내 생산을 위해 세운 회사동양레이온이다. 독일의 오스카 코헨사로부터 기술 원조를 받아 1927 8월부터 시가현에 위치한 공장에서 레이온 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전쟁 전에 미쓰이(三井) 재벌이 세운 회사이니 회사명에미쓰이가 들어가는 것이 관례지만 사업이 잘될지 자신할 수 없어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1년 마지막 외국인 기술자가 귀국한 후 도레이는 독자 기술로 생산성과 품질을 향상시켜 나갔다. 2차 세계대전 등을 배경으로 한 군() 특수로 사업은 순조롭게 성장했다. 그리고 2차 대전 패전 후인 1946년에는 미쓰이물산과 총대리점 계약을 종료하고 독립적으로 사업을 전개한다.

 

첫 번째 시련은 1951년에 찾아왔다. 나일론 때문이었다. 나일론(나일론 66)은 미국 듀퐁사가 1935년에 발명해 1938년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1940년경 미국에서 나일론 스타킹이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도레이도 1942년에 독자적인 기술로 나일론(나일론 6) 개발에 성공했다. 아미란(Amilan)이란 제품명으로 일본에 특허 출원했고 1951년에는 독자 생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듀퐁사는 도레이를 특허권 침해로 제소했다. 도레이는 독자 기술로 생산한 것이기 때문에 특허 침해는 아니라고 주장했고 조사를 벌인 후 듀퐁사도 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대량 생산에는 시간이 걸렸고 듀퐁사가 일본 이외 지역에서 특허를 선점하고 있었던 터라 수출을 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스타킹 제작용으로 쓸 극세사 생산 기계조차 듀퐁사 허락 없이 도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도레이는 특허료를 지불해서라도 나일론 사업을 확대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당시 도레이는 특허료 108000만 엔을 지불했고 연간 생산량 500 t 이상에 대해서는 매출액의 3%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나일론 생산을 허락받았다. 당시 도레이의 자본금은 75000만 엔이었다. 자본금보다 더 많은 특허료를 지불하는통 큰결단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2번째 경쟁자가 진입한 1955년에는 이미 거액의 기술도입투자비를 회수했고 3번째 경쟁기업이 진입한 1963년에는 매출이익률을 10% 이상 끌어올릴 수 있었다. 당시 도레이는일본은행 다음으로 수익이 많은 회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대학생이 꼽는 인기 직장 랭킹 1위 기업이 됐다. 판매라기보다는 배급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제품도 잘 팔렸다. 경영자의 과감한 결단이 도레이를 전화위복으로 이끈 것이다. 도레이는 이를 계기로 창업 이후의 라이벌이었던 테이진(帝人)을 능가하면서 일본 화학섬유업계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국내뿐 아니라 수출 시장도 호조를 보였다. 1964년의 아크릴 섬유 생산을 계기로 나이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 등 3대 합성섬유를 생산하는 종합 합성섬유회사 체제를 구축했다.

 

 
다각화와 해외 진출로 위기에 대처

1960년대 이후 도레이는 또다시 고난의 시대로 들어선다. 경쟁사들이 대거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후발업체들이 최신 설비를 증설하자 일본 국내 시장은 포화상태에 달했다. 합성섬유 산업의 성숙화가 시작된 것이다. 1970년에는 사명을도레이로 변경하는 등으로 활로를 모색했지만 고난은 계속됐다. 섬유제품을 둘러싼 미일 무역마찰 문제도 부각됐다. 당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수상은 오키나와 반환의 대가로 섬유 수출 규제를 수락했다.

 

‘실과 밧줄의 교환(오키나와()나와는 일본어로 밧줄이란 뜻)’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게다가 일본의 변동환율제 도입의 계기가 된닉슨 쇼크에 의한 엔고로 수출경쟁력도 급격히 저하했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원료비도 급등했다. 수출비율이 40%를 상회했던 도레이의 실적은 급락하고 말았다.

 

도레이는 이런 역경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불황이 도래하자 도레이도 여느 일본 기업들처럼 단기적으로 경비 절감, 설비투자 연기, 직원의 자회사 파견 등을 실시했다. 하지만 해고는 하지 않았다. 고용을 지킨다는 철칙은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도레이의 기업문화다. 하지만 1975년에는 적자로 전환되고 말았다.

 

장기적으로는 사업구조 개혁에 전력을 다했다. 사업 다각화와 신사업 창출, 그리고 해외 진출이다. 도레이는 1960년대 들어 처음 플라스틱 사업으로 다각화를 시작했다.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인 나일론 수지, ABS수지, 폴리에스테르 필름 등으로 다각화했다. 특히 비디오테이프 소재인 폴리에스테르 필름은 1970년대 후반 불황인 섬유사업을 대신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한편 섬유의 해외 생산을 가속화했다. 도레이는 일본의 제조기업으로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국제화에 눈을 돌린 회사다. 1963년 해외사업으로는 최초로 태국에 진출했다. 1960년대에는 주로 구미로의 우회 수출을 위해 동남아시아에 방적·직포 회사를 설립했다. 1970년대에는 현지의 공업화와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합섬의 기술 이전, 현지 생산을 추진했다. 1980년대에는 비섬유 사업인 필름이나 탄소섬유 등의 첨단소재 사업을 구미지역에서 전개했으며 1990년대에는 중국에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등 글로벌화를 추진했다.

 

다각화와 해외 진출 등의 구조개혁 성과로 도레이는 어느 정도 바닥에서 헤쳐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시련이 또 닥쳤다. 미국과의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해 엔화를 인위적으로 절상하기로 한플라자합의’(1985)에 따른 급격한 엔고 사태였다. 이러한 역경에 구세주로 나타난 경영자가도레이 중흥의 할아버지로 불리는 마에다 가쓰노스케(前田勝之介) () 회장이다. 당시 그는 임원이 된 지 2년밖에 안 되는 상무였으나 위로 선임 14명을 제치고 사장으로 발탁되며 화제를 모았다.

 

 

마에다 사장의 자조 노력 경영

그는 1987년에 사장에 취임하자마자세계적으로 보면 섬유는 성장산업이다라고 주장하며 도레이가 침체한 배경을회사 전체가()섬유를 표방하며 신규 사업에 과도한 경영자원을 투입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전년부터 실행해온신창업 운동을 끝내고 모태 산업인 섬유산업을 중시하겠다는 경영방침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는 임원 시절부터 추진했던 원가절감 운동인자조(自助)노력경영을 강조했다. 자조노력이란 경기나 환율 등 외부 요인을 탓하기 전에 사원들이 자신의 책임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개선에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다. 즉 자조노력으로 원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항상 노력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경영이라는 뜻이다. 업적 악화를 환율 등 외부 요인 때문이라고 변명하지 말라는 뜻도 된다. 이때부터 도레이 사내에서는 외부 요인과 내부 요인을 구별하는 의식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자조노력에 의한 원가관리라는 원가요소를 분석해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관리가능원가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관리불능원가를 구분했다. 그 다음 관리가능원가에 대해 개선목표치를 설정하고 전기 대비로자조노력성과를 측정하며 개선을 거듭하게 한 것이다.

 

마에다는 자조노력 경영과 더불어 섬유산업은 사양산업이 아니라는 신념으로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생산거점 투자를 강화했다. 설비를 고도화해 동남아 각지를 구미로의 수출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 국내와 해외 거점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그룹 전체로 생산·판매의 최적화를 도모하는글로벌 오퍼레이션체제도 구축했다. 글로벌 오퍼레이션이란 ① 원료나 노동력 등 경영자원이 가장 경쟁력이 있는 곳에 생산 거점을 구축마켓 니즈에 대응하기 위한 해외 진출(구미 각지의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필름 등) ③ 국제적 협조·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진출(프랑스의 탄소섬유)을 말한다. 이를 통해 환율 변동의 영향을 최소화했을 뿐만 아니라 자조노력 경영을 해외 거점에도 적용해 효율을 끌어올렸다. 예를 들어 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각지의 동업공장에서도 자조노력 성과를 서로 비교 분석하게 해 공장 간의 경쟁의식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서로 노하우를 공유해 그룹 전체의 관리수준 향상도 꾀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이른바글로벌 서플라이 체인을 구축했다. 자조노력 경영을 해외 공장에다 적용하면서 의식개혁을 통해 국제 경쟁력을 재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도레이에 따르면 자조노력의 성과는 1995년까지 9년 동안 누계 928억 엔으로 당시 경상이익(4072억엔) 23%에 달한다. 도레이의 해외사업 비중은 1990 9%에서 1997 22%로 뛰었다.

 

탄소섬유의 개발 과정은 도레이의승리방정식을 읽게 한다. “돈 잡아먹는 벌레라는 비난 속에서도 50년 이상 지독한 집념의 산물인 것이다.

 

50년 개발 역사를 가진 탄소섬유

마에다 전 회장의 업적은 경영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은 것 외에도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것이 도레이 탄소섬유 사업화의 원조다. 최근도레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탄소섬유다. 탄소섬유의 개발 과정을 보면 도레이의승리방정식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탄소섬유는 철과 비교할 때 무게가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강도는 10배 이상이다. 따라서 그 용도는 무궁무진해 항공기, 자동차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도레이의 탄소섬유 시장점유율은 31%로 세계 최대 수준이다. 그러나 매출은 아직 1100억 엔에 불과하다. 도레이는 1조 엔 매출을 목표로 달리고 있다. 그러나 도레이가 여기까지 오는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돈 잡아먹는 벌레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50년 이상 개발을 지속해 온 집념의 산물이다.

 

사실 아크릴로부터 탄소섬유를 만들어 사업화로 연계할 수 있다는 발상을 처음으로 한 것도 마에다 전 회장이다. 1959년 그는 각 공장과 연구소를 돌며아크릴을 구워서 탄소섬유를 만들어 보자라고 주장하며 약 20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팀을 결성했다. 팀원 각자는 기존 조직에 몸담으면서 연구를 분담하는 체제였고 이후에는 중앙연구소에 개발거점이 설치됐다. 1961년 오사카공업기술시험소(현 산업기술총합연구소)의 신도 아키오(進藤昭男) 박사가 아크릴 섬유로 탄소섬유를 발명하자 도레이는 신도 박사 연구실에 기술자를 파견해 양산화 연구를 시작했다.

 

가볍고 강건한 소재의 용도는 무궁무진할 것이라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러나 탄소섬유 양산화 개발이 최종 단계를 맞을 무렵인 1962, 회사는 개발 중지 명령을 내렸다. 비용은 막대하게 들어가지만 장래성이 불투명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마에다는 계속해서 경영진에게 탄소섬유를 다시 개발할 것을 호소했다. 당시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탄소섬유 개발에 열중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개발을 중단하면 미국에 탄소섬유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회사로서는 번복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당시 후지요시(藤吉) 생산본부장이좋다. 해보자라고 생각을 바꾸었고 모리 사장도 개발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회사가 개발을 중단하라고 했을 때도 몇몇 사원들은 물밑에서 탄소섬유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마에다 전 회장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탄소섬유 개발자들은전 세계에 검은 비행기를 날리자는 비전을 공유하며 개발을 계속해나갔다.

 

탄소섬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크릴을 섭씨 200도에 가열해 전() 처리를 한 다음 고온·소성해 타지 않게 해야 한다. 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소성해 2000도 이상에서 탄화시킨다. 섬유용 아크릴로는 고온처리에서 물성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전용 원사를 개발해야 한다. 3000∼4000가닥의 실을 1㎝ 전후 너비의 테이프에 펼쳐 한 가닥 한 가닥 끊어지지 않게 굽는 기술은 그야말로 장인의 영역이다.

 

1971년에는 탄소섬유 사업의 싹이 겨우 트기 시작했다. 소재개발도 문제였지만 먼저 시장수요를 창출하지 않으면 사업을 지속할 수가 없다. 시장이 없으면 연구개발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낚싯대, 골프채, 라켓 등을 탄소섬유로 샘플을 만들어 조금씩 수요를 창출해 나가기 시작했다. ‘토레카브랜드의 탄생이다. 그래도 사업은 여전히 적자였다. 다른 회사들은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해 탄소섬유 사업에서 손을 떼기도 했다. 마에다는 기술부장, 제조부장으로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탄소섬유의 생산기술 확립에 매진했다. 그리고 탄소섬유 개발과 관련된 기본 특허를 취득해 1982년 양산설비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전 세계가 도레이의 탄소섬유 사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듀퐁도 개발이 난항을 거듭하자도레이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듀퐁은 도레이와의 합작 사업을 거절했다. 듀퐁은 아직도 탄소섬유 분야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탄소섬유 사업의 숨통이 트인 것은 2006년이다. 스포츠 관련 제품에 적용해 실적을 올려 온 도레이 제품이 안전기준이 엄격한 보잉사의 눈에 들어 온 것이다. 보잉사는 도레이와 탄소섬유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연구개발을 시작한 뒤 반세기가 흘러서야 겨우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탄소섬유가 항공기 재료로 적용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시장이 완전 본격화한 단계는 아니다. 대량 수요가 예상되는 자동차에서 적용하기에는 초보 단계다. 탄소섬유가 아직 철강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탄소섬유의 강도가 철강보다는 10배라고 하지만 철강도 기술발전이 계속되고 있다. 철강 관계자들은 30% 정도 강도를 올릴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또한 탄소섬유는 철강보다 가격이 비싸다. 아울러 자동차 생산용으로 충분한 공급량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과제다. 이에 도레이는 적극적인 인수합병(M&A) 전략과 해외 생산 전략으로 나서고 있다. 2013년에는 풍력발전용 풍차 관련 제품에 강점을 보이는 세계 3위 규모의 탄소섬유 제조업체인 미국 조르텍사를 58000만 달러에 매수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원가 경쟁력은 해외 생산으로 대비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해 태국 등에 양산체제를 구축해 원가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전략이다. 지금 도레이는 본격적인 자동차용 제품 생산 시대에 대비한 전략 구축에 나서고 있다. 도레이 탄소사업의 2013년도 영업이익은 169억 엔에 불과하다. 그러나 도레이는 2014 11월 미국 보잉사로부터 항공기용 탄소섬유 복합재료 1조 엔어치를 수주했다고 발표하는 등 높은 성장성을 기대하고 있다. 향후 몇 년이 탄소섬유 사업을 판가름할 갈림길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유니클로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유통혁명

1999년 일본섬유산업연맹회장에 취임한 마에다는 섬유산업의 유통구조 개혁을 강조하며신섬유비전을 제시했다. 섬유산업 활성화를 위해 유통구조를 개혁해야 하고 해외 진출도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소재 메이커가 기술혁신으로 원가를 절감해도 복잡한 유통구조로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유통구조 개혁이 필수라는 것이다. 마에다의 이러한 의견에 동조한 유니클로 야나이(柳井正) 사장은 2000 4, 마에다 회장을 찾아갔다. 야나이는소재로 세상을 바꾸려는 도레이와 옷이 변하면 세상도 바뀐다고 생각하는 유니클로의 생각의 본질은 같으므로 협업해 섬유산업을 한번 바꾸어 보자라고 제안했다. 서로의 기술과 지식을 개방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이다. 그러면서 도래이 내에유니클로 전담부서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마에다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제조가 소매와 직결되면 유통구조가 간결해져 양쪽 모두의 이익이 늘어나고 소비자에게 좋은 제품을 싸게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유니클로의 매출은 2200억 엔 정도로 도레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유니클로는 당시이단아로 통했다. 일부 임원은 기존 거래선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마에다 회장은 유니클로의 요구에 응하는 결단을 내렸다. 도레이가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마에다에게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유니클로와 협업을 하면 도레이로서는 원사에서부터 고급 가공에 이르기까지 계획생산을 할 수 있게 된다. 또 소매단계의 소비자 정보를 신속하게 수집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또한 유니클로는 다양한 기능 소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양질의 캐주얼 의류 시장을 세계 시장에 개척하려는 유니클로와의 협업은 도레이로서는 섬유산업의 상류인 원사에서, 중류인 텍스타일, 하류인 봉제까지 전체 서플라이 체인을 지배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2003년 겨울, 유니클로는 도레이의 보온소재를 채용한 새로운 기능성 내의히트텍을 시장에 내놓아 최근까지 3억 장 이상을 판매했다. 또한 고밀도 직물로 제작하고 가지고 다니기 편한울트라 라이트 다운도 승승장구했다. 두 회사의 관계는단순한 파트너에서 점점더 나은(better) 파트너로 변해갔고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은최고(best)의 파트너가 됐다. 현재 양사의 거래액은 1000억 엔을 넘는다. 하지만 양사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도레이는 2014년 유니클로와 공동사업을 담당하는글로벌 오퍼레이션 추진실을 사업부로 승격했다. 유니클로의 원가 삭감 요구에 대응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양사는 판매자와 고객 관계다. 그럼에도 양사는 일심동체가 돼 서로의 기술과 지식을 공유해 전혀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도레이와 유니클로의 협업은 최근오픈 이노베이션이란 관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도레이의 R&D 시스템은 연구자의 이상향

사업을 본궤도에 올리기 위해 긴 세월 동안 연구개발을 하며 준비하는 것이 도레이의승리 방정식이다. 이를 지탱하는 것이 도레이의 독자적인 연구개발 체제다. 일류 연구자들도도레이에 들어가고 싶었다라고 할 정도로 도레이 연구실은 연구자의 이상향으로 일컬어진다. 근무시간의 20% 이내에서언더그라운드(자유재량)’ 연구를 할 수 있다. 지금은 구글이나 3M 등도 채용하고 있지만 도레이는 88년 전인 창업 당시부터 적용해 온 제도다. 언더그라운드 연구로 사업화에 성공한 것도 많다. 탄소섬유가 대표적인 사례다. 스마트폰용 정밀 컬러 필터, 정전기를 발생시키지 않는 전자재료, 안경을 깨끗하게 닦을 수 있는 초미세섬유토레시도 언더그라운드 연구의 산물이다. 언더그라운드 연구에서 유망하다고 인정받으면탐색연구로 지정받을 수 있다. 3년에 한 번 연구의 진척 상황이나 시장 동향을 철저하게 분석해 먼저 회사가 기본 특허를 취득한다. 또한 핵심기술을 블랙박스화할 수 있는 기술의 씨앗은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사업화의 싹으로 연계한다. 역으로 10년이 지나도 싹이 트지 않은 기술의 개발은 중지되고 다시 언더그라운드로 들어간다. 연구와 개발단계에서 철저하게 장래성을 검토하기 때문에 사업화한 후에 철수하는 경우는 적다고 한다. 도레이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는 3% 정도로 다른 소재 메이커에 비해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투자효율이 좋다. 2003년에 설립한도레이첨단융합연구소에는 섬유나 수지 연구자뿐 아니라 케미컬, 의료 등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

 

최근 이곳에서 개발하고 있는()처리막은 미세한 불순물까지 제거해 미생물의 발효 효율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는 장치다. , 바이오, 전자재료 등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협력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섬유와 의료를 조합한 인공 신장이나 사진용 내수(耐水) 시트를 전용한 액정 TV용 반사필름 등 복수 분야의 기술을 융합한 신소재가 이곳에서 탄생하고 있다.단기에 성과가 나오는 테마만 집중하면 곧 한계에 부닥친다. 적어도 50년 앞을 시야에 넣고 연구개발해야 한다고 아베 부사장은 말한다. 자유로운 연구환경 조성과 기술융합 촉진이 도레이가 지속적으로 새로운 소재를 탄생시키는 비결인 것 같다.

 

 

 

도레이의 한국 비즈니스

도레이는 한국에 가장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일본 기업 아니 외국 기업이다. 1963년에 한국나이론㈜에 나일론 제조기술을 이전한 것을 시초로 일찍부터 한국에 진출했다. 현재 도레이는 주력사업인 섬유·필름·수지는 물론 첨단소재인 탄소섬유·수처리막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분야에 걸쳐 한국에 투자하고 있다. 한국에미니 도레이를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삼성의 창업자인 이병철 전() 회장은잠잘 때 도레이가 있는 쪽으로 발을 뻗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도레이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다. 1972년 도레이는 섬유사업을 강화하려는 삼성그룹과 협력해 폴리에스테르 섬유를 생산하는 제일합섬을 설립했다. 도레이는 출자는 물론 합섬의 기본 기술과 생산설비를 제공했다. 이후 제일합섬은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해 새한그룹이 됐다. 1999년 외환위기로 새한이 경영난을 겪자 도레이는 새한에 출자해도레이새한을 설립했다. 이때 마에다 전 회장은어려울 때 신규 투자를 해야 한다며 사내의 신중론을 물리치고 결단을 내렸다. 판단은 정확했다. 스마트폰 등을 필두로 한 삼성전자, LG전자의 성장과 더불어 새한의 매출은 급증했다. 2008년 도레이는 새한그룹으로부터 지분을 추가 취득해 완전히 자회사로 만들었다. 또 마에다 전 회장은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2005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2011 1, 도레이의 니카쿠(日覺昭廣) 현 사장은한국에 탄소섬유 생산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한일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시기인 만큼 일본에서의 반대여론이 거셌다. 첨단기술이 한국으로 유출된다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주장이었다. 심지어 매국기업이라는 소리도 나왔다. 도레이 사내에서마저 신중론이 제기됐다. 심지어 마에다 전 회장조차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니카쿠 사장은 계획을 번복하지 않았다. 니카쿠 사장은 “‘친한이니혐한이니 하는 것은 우리와는 상관없다. 한국에서 만드는 것은 도레이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탄소섬유는 고기능 아크릴 섬유를 고온에서 소성하고 탄화해 생산한다. 한국 공장에는 소성 공정을 설치하고 원료인 아크릴 섬유는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겠다는 것이다. 독자기술의 덩어리라 할 수 있는 탄소섬유용 아크릴 섬유의 생산 공정은 한국으로 이전하지 않기 때문에 핵심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 니카쿠 사장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여론의 비판은 실상을 모르는 감정론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도레이는 40년에 걸쳐 인재를 육성해 왔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사원에게 맡기면 기술 유출 리스크도 적다고 했다. 게다가 한국 정부가 공장 부지, 법인세 등에서 우대를 해줬고 전기·수도 등의 이점도 많다. 이 때문에 한국에다 투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레이는 2013, 도레이새한 설립 시 분리됐던 웅진화학을 인수했다. 주력사업은 직물과 수()처리막이다. 또 도레이는 2018년까지 새만금에 3000억 원을 투자해 슈퍼플라스틱의 원료인 PPS 수지 생산 공장을 설립할 예정이다. 도레이 측은 한국을 도레이의 기술을 이전하는 생산지로서 활용할 뿐 아니라 역으로 한국 현지에서 개발한 독자기술을 도레이 전체의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포부까지 갖고 있다. 새한그룹으로부터 이전한 종이 기저귀용 부직포 생산기술이 그 예 중 하나다.

 

사카키바라 회장이 게이단렌 회장으로 추대된 데는 한일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전경련·게이단렌과의 정기 회의가 7년 만에 재개된 데도 사카키바라 회장의 공이 클 것이다. 그러나 도레이와 한국과의 관계가 좋다고 해서 한국에 맹목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 모든 답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니카쿠 사장의 한국 인식은 그만큼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도레이의소재 경쟁력을 배우자

도레이가 사양산업인 섬유에서 높은 이익을 내는 비결이 분명하다. 첫째는 잔존자 이익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양 산업이라 간주하고 다른 기업들이 대부분 철수하는 시장에서 경영합리화(자조노력 경영)와 글로벌화, 새로운 소재의 지속적인 투입으로 생존은 물론 잔존자 이익까지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사양 산업에서도 가격으로 승부하지 않고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승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경에는 도레이의 연구개발 역량이 뒷받침하고 있다. 셋째는 유니클로와의 협력으로 섬유의 서플라이 체인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제사에서 봉제까지 서플라이 체인을 장악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시장 규모가 위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레이는 독자적인 방정식으로 성숙산업에서 고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이 정작 도레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도레이의소재 경쟁력이라고 생각한다. 소재 분야에서의 경쟁력이 약한 우리 기업들의 약점을 도레이는 탄탄히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소재 사업은규모의 경제가 아니라범위의 경제가 중요한 사업이라 한다. 자본의 논리보다는시간의 논리가 필요하다고도 한다. 그동안 규모의 경제, 자본의 논리로 달려온 우리 기업들에 도레이의 승리 방정식은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특히 앞으로는물리의 시대’가 아니라화학의 시대라고도 한다. 철강, 전자, 자동차가 물리 기술이 중요했다면 전지, 에너지, 환경 등은 화학 기술이 중요하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레이가 우리 기업에 주는 시사점은 더 커진다. 최근 우리 기업들도 소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이 분야에서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하고 있다. 도레이가 좋은 벤치마킹 기업이 될 것이다.

 

필자는 중앙대 통계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 경제학연구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삼성경제연구소에 입사해 주로 일본 경제와 산업·기업 등을 연구했고 일본연구팀장, 해외연구실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일본재발견> <일본시장 진출의 성공비결, 비즈니스 신뢰> <도요타: 존경받는 국민기업이 되는 길> 등이 있다.

 

 

  • 이우광 | -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연구위원
    - <일본재발견>, <일본시장 진출의 성공비결,비즈니스 신뢰>, <도요타 : 존경받는 국민기업이 되는 길> 저자
    wklee@kj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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