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업 또봇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김문경(건국대 경제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또 나왔네. 또 사줘야 되네. 그래서 또봇인가?”
취학 전 어린 아들을 가진 모든 부모들의 비명이 대한민국에 울려 퍼지고 있다. 두세 살 때까지 뽀로로에 푹 빠져 있던 남녀 아이들은 3∼4세가 되면 각자 자신의 취향과 성별에 따라 새로운 캐릭터와 장난감을 찾아 나선다. 이 연령대 남자 아이들에게 현재 대세는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콘셉트의 ‘또봇’이다. 심지어 또봇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자동차는 기아차의 실존 모델들이다. 애니메이션을 본 아이들의 마음을 가라앉힌 뒤 길거리를 나서도 아이들 눈에는 또봇이 사방을 굴러다니고 있는 셈이다. 그런 뒤에 마트에서 ‘또봇 장난감’을 본 아이들이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다. 대형마트 완구 매대 근처에서 벌어지는 ‘뗑깡’과 ‘부모의 당황한 표정’의 근원은 바로 이 또봇에 있다.
말 그대로 ‘대성공’이다. 조금 성급한 감이 있지만 일부에서는 국내 완구업계 역사상 최고 성공사례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통의 국내 완구업체 영실업의 ‘또봇’의 성공요인을 분석해봤다.
1. ‘또봇’으로 국내 완구계의 숙원, ‘남아 완구시장 성공작’을 만들어내기까지
1) ‘파워레인저’가 아니라 ‘또봇’?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남자아이들이 열광하는 변신로봇 장난감은 오직 ‘파워레인저’였다. 수십 년의 역사를 가진 실사영화 콘텐츠와 다양한 로봇이 합체하며 ‘거대한 로봇’으로 변신한다는 설정.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장난감을 통해 구현되는 과정은 취학 전 남자어린이들의 ‘로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매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파워레인저의 전 시리즈 완구는 수요를 공급이 따라잡지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인터넷 판매업자들은 아예 가격을 올려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지난해, 완구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표 1) 홈플러스 완구판매 순위에서 ‘3단합체 또봇트라이탄’이 매출액 기준으로 1위에 오른 것이다. 1위는 또봇 시리즈, 2위는 파워레인저 시리즈, 다시 3위는 또봇, 4위는 파워레인저순으로 나타났다. 매출 10위 안에 무려 7개의 또봇 시리즈가 포함됐다. 명실상부한 남아 완구시장의 ‘투톱’이자 ‘선도자’로 자리매김했다. 놀라운 성장세는 올해에 더욱 두드러졌다. (표 2) 2013년 1월부터 11월까지 매출 1위는 또봇C, 2위는 또봇W 쉴드온, 3위는 또봇R 등이었다. 1위부터 5위까지는 모두 또봇 시리즈이고 8·9위 역시 또봇 시리즈 제품들이다. 이 같은 또봇의 ‘대히트’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사이트에 나타난 또봇 제작·판매사 영실업의 매출성장세와 EBIT(세전 영업이익)의 상승세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그림 1)
영실업 또봇의 이 같은 성공 배경에는 지난 15년간의 좌절과 노력이 그대로 배어 있다. 사실 영실업은 오랜 세월 전 세계 시장은 물론 한국에서도 남아 완구시장 ‘왕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파워레인저의 유통사였다. 현지화된 제품 구성과 광고를 기획했고 파워레인저 애니메이션의 영상배급에도 참여했다. 마케팅 파트너의 역할까지 맡았다. 10여 년간의 경험은 ‘모든 연령대와 성별을 커버하는 종합완구회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운 영실업에 ‘완구회사란 어떠해야 하고 남아 완구시장1 의 특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도를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됐다. 파워레인저 시리즈를 만드는 일본 반다이사는 10여 년간 영실업에 유통과 마케팅, 현지화를 위탁했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결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실업 역시 이를 예측했다. 어느 정도 현지시장에 적응하고 나면 직접 배급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게 반다이사의 오래된 전략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실업이 2000년대 초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자체 캐릭터와 브랜드, 완구시장에서는 반드시 완구 출시와 동반돼야 하는 애니메이션이나 특수촬영물2 등의 제작을 준비했던 이유다. 1990년대 중후반 출시한 변신합체 로봇 ‘카신’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음에도 영실업은 2000년대 초부터 다양한 로봇 애니메이션 제작위원회에 참여해왔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왔다. 거듭된 실패를 겪었고, 애니메이션이나 특촬물을 만들어놓고도 전혀 반응을 얻지 못하거나 애초에 제작되지도 못하는 사태도 자주 겪었다. 당연히 완구는 제대로 판매해보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이때의 거듭된 실패는 이후에 큰 약이 됐다.
2) 제작위원회 방식에서 ‘수익모델 우선’ 방식으로
반다이사와의 결별이 공식화되기 시작하던 시점인 2007년 말부터 영실업은 그간의 실패이유를 집중 분석했다. 그리고 답을 얻었다. 이전까지의 모든 취학 전 남아용 애니메이션이나 실사영화(특촬물)의 기획은 일본의 ‘제작위원회’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제작비를 모으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방송국, 대형 자본, 투자자와 완구회사들을 중심으로 제작위원회가 구성되고 위원회에서 애니메이션이나 특촬물을 만들 제작사를 선정하는 방식이다. 이미 1960년대부터 이 같은 방식의 성공모델을 반복해왔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전 연령대에 완구시장이 만들어져 있는 일본에서는 이러한 제작위원회 모델이 효과적이었지만 ‘수요를 만들어내야 하는’ 한국에서는 잘 통하지 않았다. 특히 완구회사, 애니메이션 제작사들 자체도 일본에 비해 매우 영세한 상황에서는 시장상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타깃팅을 하기보다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무난한 콘셉트’의 애니메이션 제작과 완구 출시만 이뤄질 수 있었다.3 참여자가 많기 때문에 수익구조를 다변화해야 했다. 또한 일본과 달리 완구회사의 규모가 작고 파워가 약하다 보니 제작사에 이런저런 요구를 하기에는 더더욱 힘든 상황이 계속 펼쳐졌다.
사례를 들어 설명해보면 2000년대 중반 100억 원의 자금이 모여 어린이용 실사영화가 하나 만들어졌다. 제작위원회가 펀딩을 끝내고 나자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완구회사와 협력하지 않고 모든 역량을 오직 방송물 제작에 쏟았다. 전체적인 완구시장과 연결한 수익구조, 캐릭터 사업 수익구조에 신경을 쓸 수 있도록 하는 유인이 없었다. 당연히 화려한 색감과 스토리에만 집중했고 정작 완구를 팔아야 하는 완구업체를 위한 ‘로봇 변신장면’ 등에 소홀했다. 실사영화의 방송이 완구판매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여기서 악순환이 시작된다. 완구 판매가 저조하면 아이들이 계속해서 완구를 가지고 놀면서 친구들과 애니메이션이나 실사영화의 다음 편을 기다리게 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지 않는다. 결국 당장의 방송물 제작에만 집중한 결과, 후속 완구판매는 물론 지속적인 방송제작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제작위원회 방식이 완구회사의 힘이 약한 한국에 적용될 때에는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완구 제작사와 협의하지 않고 만화영화를 제작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장면도 남발됐다. 즉 만화영화에서나 실사영화 컴퓨터그래픽에서는 멋있는 변신합체 장면이 나오지만 완구제작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해당 장면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직접 완구를 사서 손으로 완구를 조작해 변신시킬 때에는 방송에서 본 것과 다른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아이들의 실망감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또 제작위원회 방식에서는 완구업체가 실제 제품을 만들기도 전에 향후 방송될 로봇의 캐릭터를 결정하는 경우도 많았다. 약 6개월에 걸쳐 실제 완구회사에서 해당 캐릭터를 만들어낼 때에는 방송된 지 한참이 지난 후여서 판매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결국 한국에서 뽀로로 등 3∼4세 미만 아동을 위한 캐릭터와 완구가 아닌 4∼5세 이상 아동을 위한 ‘변신로봇’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영실업은 2008년부터 한국에서 최초로 ‘수익모델 정립과 로봇 완구 기획’부터 한 뒤에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방식을 도입한다. 먼저 수익모델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서 콘텐츠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제작방식에 일대 변화가 일었다. 우선 로봇 완구들을 애니메이션 제작에 앞서 설계했다. 캐릭터를 부여했고 디자인하고 시제품을 만들었다. 여아용 완구에서 어느 정도 수익을 내면서 유동자금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투자가 가능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로봇 중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레트로봇이 마치 배우를 캐스팅하듯 로봇을 캐스팅해 방송물 제작에 들어가도록 했다. 완구회사가 주도권을 쥐되 철저한 협업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긴밀히 협의하면서 캐릭터 노출 빈도를 조절하고 완구 성격을 함께 부여하면서 제품의 가치를 올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처음에 ‘외주제작사’ 개념으로 시작됐던 레트로봇과의 협력은 ‘인센티브 구조’ 등 다양한 측면에서 공동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방식을 만들면서 완벽한 ‘협업’ 체제로 변했다. 다만 향후 해외 진출을 위해 저작권 등 법률적인 권리는 영실업이 갖는 방식을 택했다. 지상파 방송사가 처음부터 ‘제작위원회’의 일원으로 들어오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양한 케이블 채널 방송사를 찾아가 완구 제작 상황과 애니메이션 기획 방향, 진행상태를 설명하고 설득해 방영될 수 있는 시간대를 얻었다. 마침 지상파에서는 ‘키즈 타임’이라 불리던 만화영화 등의 방영시간대가 사라지고 있었고 케이블채널·IPTV 등의 ‘키즈 채널’은 활성화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광고주이기도 한 영실업이 또봇 애니메이션 방영을 요청하는 문제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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