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여/가서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해 주오/우리는 그들의 명령을 이행하고 여기에 누워 있다오.”
이 시는 테르모필레에서 전사한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을 애도하는 비문이다. 스파르타 병사들의 군인정신을 간결하면서도 멋지게 묘사한 명문으로 전쟁사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로 꼽힌다.
2차 페르시아전쟁
이 이야기의 무대는 기원전 480년에 벌어진 2차 페르시아전쟁이다. 페르시아의 황제 크레르크세스는 사상 최고의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마라톤 전투로 유명한 1차 페르시아전쟁에서 그리스는 페르시아를 무찔렀다. 그러나 이때의 침공규모는 2차 페르시아전쟁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병력이 100만 또는 300만이라고 했다. 그것은 지나친 과장이지만 최소한 그리스 군의 10배가 넘는 것은 분명했다.
페르시아는 육군과 해군이 동시에 진격하는 수륙 병진책을 사용했다. 대군이 바다를 건너오고 보급품을 계속 조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연합군을 결성하고 페르시아군의 전술에 맞춰서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페르시아군을 저지하기로 한다. 그리고 육군은 스파르타가, 해군은 아테네가 각각 지휘하기로 했다.
그리스가 방어지점으로 선택한 곳은 아르테미시온 해협과 테르모필레 협곡이었다. 아르테미시온 해협은 좁고 일기가 불순한 해협이어서 병력면에서 불리한 그리스군에게 유리했다. 테르모필레는 해협을 쳐다보고 있는 상륙지점이다. 오늘날 이곳은 해변이 크게 늘어서 옛날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옛날에는 해변이 좁고 산이 벽처럼 해변 앞을 막고 있었다. 이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수레 한 대가 지나갈 만한 좁은 협곡이었다. 이곳은 옛날부터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그리스로 들어오는 통로로서 이곳에 정착한 포키스인들이 북방민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세운 방벽도 있었다. 다만 이때 방벽은 거의 허물어지고 성문도 사라진 상태였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8월에서 9월 사이에 벌어졌다. 이때는 마침 평화의 제전인 올림피아 제전이 열렸다. 스파르타와 많은 폴리스들은 이 기간에는 군대를 동원할 수가 없었다. 정말 축제 때문이라고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페르시아전쟁 때까지만 해도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여차하면 축제를 핑계로 병력 동원을 거부하기 일쑤였다. 그리스인들은 언어가 다른 이방인들은 야만족으로 간주하며 경멸했지만 이 차별의식을 공동체 의식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세계 유일의 문명인을 자처하는 그들은 의외로 국가의식이 없었다. 페르시아의 침공 때마다 일부 폴리스는 페르시아 편에 가담했다. 그리스가 가망이 없다고 보고 페르시아에 붙은 폴리스도 있지만 일부는 다른 폴리스에 대한 원한, 지역 이익을 위해 페르시아에 붙었다. 유서 깊은 폴리스인 아르고스는 숙적인 스파르타에 대한 원한 때문에 늘 페르시아 편에 섰다. 아르고스는 자신들의 건국 영웅인 페르세우스와 페르시아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데 착안해서 “페르시아가 페르세우스의 후손이기 때문에”라고 핑계를 댔는데 이 궤변에는 페르시아인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북방의 맹주인 테베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대한 라이벌 의식으로 페르시아에 붙었다. 테베의 배신으로 그리스의 3분의 1인 북쪽 지역이 거의 페르시아에 넘어갔다. 덕분에 그리스 연합군은 한번도 제대로 된 병력을 가지고 일사불란한 작전을 펼쳐보지 못했다.
레오니다스가 이끈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군
하지만 그리스 육군은 스파르타가 지휘해야 했다. 스파르타가 출전하지 않는다고 소문이 나면 다른 폴리스들이 페르시아로 넘어갈 우려가 있었다. 또 스파르타는 그리스 폴리스의 맹주라는 지위도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스파르타의 젊은 왕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병사만을 선발해서 선발대를 꾸렸다. 꼼수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죽을 각오를 했다. 레오니다스는 대를 이어줄 아들이 있는 병사만 300명의 특공대에 선발했다고 한다.
이 300명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테르모필레의 그리스군이 300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스파르타 외에 4900명의 여러 폴리스군이 합세해서 총 병력은 5200명이었다(7400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군이 200만이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믿기 어렵다. 현대의 학자들은 10만에서 2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처음부터 이렇게 비장한 분위기가 도는 상황은 아니었다. 페르시아 병력에 대한 후대의 과장과 달리 당시에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의 병력을 과소평가했다. 그래서 비록 소수 병력의 선발대라도 테르모필레의 협곡이라면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페르시아군을 충분히 저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라톤 전투 이후로 그리스 중장보병은 경장보병이 중심인 페르시아군과의 일대일 전투에서는 자신이 넘쳤다. 유일하게 무서운 것이 페르시아 기병의 측면공격인데 이 좁은 협곡에서는 기병을 풀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페르시아군이 나타나자 그리스군은 그 병력에 압도돼 버렸다. 각 폴리스의 지휘관들은 퇴각을 주장했다. 그러자 테르모필레 부근에 살던 포키스와 로크리스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레오니다스는 그들의 주장에 동조해 후퇴를 거부했다. 그리고 첫 전투는 스파르타인들이 모범을 보이기로 한다.
페르시아군은 바로 그리스군을 공격하지 않고 4일을 머뭇거렸다.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인들이 겁을 먹고 도망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믿기 어렵다. 페르시아가 꾸물거린 이유는 그들도 병력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군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연합군대였다. 이들은 민족단위로 움직인 탓에 늘 효율성이 떨어졌다. 페르시아의 이 비효율성과 꾸물거림은 중대한 오판이 될 수 있었다. 레오니다스는 원군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고 주변 폴리스에 병력을 재촉하는 사자들을 보낸 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의 원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5일째 되던 날 페르시아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첫 전투에 투입된 군대는 현재의 이란 지역에 있던 메디아와 킷시아인 부대였다. 원래의 페르시아는 지금의 시리아 지방에 있던 작은 나라였다. 메디아는 페르시아의 동맹국이자 사돈국가였다. 그 권위를 받아 메디아와 킷시아인은 페르시아군과 복장이 같았다. 스파르타가 첫 전투에 임했듯이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복장을 한 군대를 내세우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메디아나 킷시아 부대는 원래가 기병 중심의 군대로 보병은 경장보병이었다. 창은 짧고 투구 대신 천으로 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방패를 들고 부딪치는 백병전에서 방패 위로 드러나는 제일 유력한 공격 부위가 머리다. 그러므로 투구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백병전에서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이란 지역의 주민은 중앙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강골에 거구들이었고 아무리 희생이 커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정신이 있었다. 하지만 맨 머리로 창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싸웠지만 큰 피해를 입었다.
메디아군이 패배했지만 하루 종일 전투를 치른 스파르타군도 지쳤음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교대해 줄 병력도 없다. 크세르크세스는 불사인이라고 불리는 페르시아 최강의 부대를 투입했다. 정원이 1만 명인 이 부대는 결원이 생기면 딱 그 결원만큼 보충해서 늘 1만을 유지했기 때문에 불사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이들도 좁은 협곡에서는 메디아인과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용감하게 싸웠지만 전투 기술과 팀워크에서 스파르타인을 당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은 그리스의 각 폴리스가 스파르타와 교대하며 돌아가면서 싸웠고 페르시아는 똑같은 패배를 맛보았다. 3일째 되던 날 에피알테스라는 멜리스인이 찾아와 그리스군의 방어선을 우회할 수 있는 오솔길을 알려주었다. 이 오솔길의 존재는 스파르타군도 몰랐는데 테르모필레에 와서야 포키스군으로부터 그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위험한 길이었기 때문에 그리스 연합군은 포키스군 1000명을 배치했다. 이곳이 그들의 홈그라운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키스군은 방심하고 있다가 페르시아군의 기습을 허용했다. 더 나빴던 것은 통로를 사수하지 않고 산 정상으로 도망친 것이다. 그들은 페르시아군이 자기를 공격하는 줄 알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진을 쳤다고 변명했지만 페르시아군은 포키스군은 거들떠보지 않고 테르모필레로 진입했다.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그리스 연합군은 붕괴했다. 하지만 레오니다스는 후퇴를 거부했다. 진지를 포기하는 것은 스파르타인에게는 죽음보다 못한 불명예였다. 실제로 스파르타는 전투에서 도망친 병사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처벌하지 않아도 살아 있는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으며 심각하게 ‘왕따’를 시켰다. 심지어 테르모필레에서도 두 명의 병사가 국왕의 전령으로 임명돼 귀환했는데 죄가 없음에도 이들마저 ‘무시’를 당했다. 결국 한 병사는 자살했고, 한 병사는 다음 전투에서 적진에 돌격해 전사했다.
스파르타의 용기에 700명의 테스페이아 병사들도 자원해서 남았다. 따라서 실제 이 전투에 참전한 사람은 1000명이었다. 그들은 최후까지 장렬하게 싸웠다. 전투는 처절해서 크세르크세스의 동생 2명도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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