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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양극체제 때, 한국은?

곽동원 | 9호 (2008년 5월 Issue 2)
시나리오 플래닝의 가장 큰 목적은 미래에 발생 가능한 모든 현상을 염두에 두고 불확실성에 대한 대응력을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기업이 미래 불확실성에 대해 염려하면서도 사실상 ‘대세’라고 믿어지는 현재의 현상 그대로, 그것도 지금까지 지속돼온 방향성이 미래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전제 아래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래 불확실성을 단순히 걱정만 하는 기업과, 다양한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여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기업의 경영성과는 매우 큰 차이가 난다. 또 결정적인 순간에는 정반대의 운명을 맞이할 수도 있다.
 
따라서 기업의 책임 있는 경영자라면 이른바 ‘대세 (mega-trend)’를 좇는 것이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항상 대세를 ‘뒤집어’ 생각해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이와 관련, 최근 한국 경제계에서 가장 큰 메가 트렌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국과 인도의 경제 발전이 주는 시사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1990년대 이후, 특히 21세기 들어 신흥 경제대국인 중국과 인도는 세계 경제의 핵심 성장 엔진으로 부상했다. 이 두 국가는 공통적으로 거대한 영토와 천연자원, 막대한 인구와 거대 시장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의 새로운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AT커니가 조사한 2007년 해외직접투자(FDI) 매력도에서 나란히 1, 2위를 차지하는 등 무서운 속도로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제 성장의 결과가 다시 이들 나라 소비자의 구매력 증대로 연계되는 선순환 구조도 형성돼있다.
 
중국과 인도 경제의 부상에 관련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대세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 베이징 올림픽 이후 경기 침체에 대한 일부의 우려에도 중국은 고속성장을 지속할 것이며, 2020년경 미국 경제규모를 추월해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 인도 역시 그 동안 전 세계 서비스, IT 산업 공급기지로서의 경쟁력에 제조업 경쟁력까지 강화돼 중국과 더불어 세계 경제의 핵심 축으로 대두됨. 이를 위해 인도는 미국, EU, 중국 등 다양한 경제 파트너들과의 협력을 한층 증진시켜 나아갈 것이다.
- 이러한 경제 발전 과정에 수십 년간 지속돼온 중국과 인도 양국간 정치적 긴장은 양국의 경제적 필요에 따라 완화되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이 대세론의 예측대로만 전개된다면 중국과 인도에 이미 진출한 기업은 비즈니스 규모를 키워야 한다. 아직 진출하지 않은 기업이라면 하루빨리 반드시 이 지역을 공략해야 할 것이다. 또 대세론을 따라 한국 기업들이 중국과 인도에서 각 나라별로 사업 기회만 잘 파악한다면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대세론에 미처 반영되지 않은 가능성이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대세론을 믿고 여기에 맞춰 전략을 수립한 기업들은 재앙을 경험할 수도 있다. 사실 필자는 얼마나 많은 기업이 대세론과 다른 방향의 시나리오 발생 가능성을 심도 깊게 고민하고, 그에 기초해 전략적 의사결정을 하고 있는지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신흥 경제대국의 갑작스러운 부상에 따른 세계 경제 역학관계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기업이 과연 한국에 몇이나 있을까?
 
우선 현 대세론의 허점부터 찾아보자. 위의 대세론에는 중국과 인도 외에 다른 국가들의 존재, 그리고 다자 국가의 입체적 역학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 등이 빠져있다. 그중에서도 현실적 영향력이나 역학관계 측면에서 그 비중에 비해 가장 간과되고 있는 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한국전쟁 이후 아시아 경제의 확고한 맹주로 군림해왔고, 1980년대에는 세계 경제의 차기 리더로 거론되던 일본 경제가 1990년대의 장기 침체와 중국 경제의 부상에 가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지고 말았다.
 
만약 일본을 고려한다면, 어떤 새로운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을까? 중국 경제규모가 올해 일본을 앞설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아시아 경제권 맹주의 자리를 위협받고 있는 일본은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일본의 관점에서 최선의 선택은 공동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믿을 만한 파트너를 찾는 것이다. 일본이 보기에 현재 최대 동맹국인 미국은 지리적으로 멀 뿐 아니라, 힘에 부치는 일방외교를 펼치다 국제사회에서의 스스로 리더십을 약화시켜버린 파트너라는 단점이 있다. 또 EU 주요국들도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기 쉽지 않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여러 나라 가운데 인도가 매우 매력적인 경제·정치적 동맹국이 될 수 있다.
 
만약 일본이 인도와의 적극적 경제관계를 기반으로 대(對)중국 대응 세력을 결집한다면, 향후 아시아 경제권은 중국의 일극 체제가 아닌 양극 체제로 변화해갈 수 있다. 즉 일본-인도 동맹이 중국을 견제하는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일본과 인도의 협력은 ‘사무라이-스와미 동맹(Samurai-Swami Partnership)’으로 불린다. 스와미(Swami)는 인도의 성(姓) 가운데 하나이며 성인 혹은 연장자를 부를 때에도 사용하는 단어다.
 
이 가정의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다음과 같은 여러 관점을 통해 점검해볼 수 있다.
 
1. 규모
우선 규모를 살펴보자. ‘사무라이-스와미 동맹’의 경제 및 인구 규모는 양 측면에서 중국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우월할 수 있다.
- 경제 규모(2007년 GDP 기준, 달러): 중국 약 3.2조 vs. 인도+일본 약 5.3조
- 인구 규모: 중국 약 12억 명 vs. 인도+일본 약 11억 명 이상
 
2. 중국의 저원가 생산력을 대체할 능력
인도가 제조기지로서의 경쟁력 확보에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미 친(親)일본 성향을 갖고 있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을 끌어들인다면 향후 중국을 대체할 저원가 생산기지가 될 수 있다. 이미 베트남 등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런 현상이 가시화하고 있다. 만약 ASEAN이 ‘사무라이-스와미 동맹’의 한 축을 형성한다면 이 잠재적인 동맹은 약 1조 달러의 GDP와 5억 명의 인구를 추가 자산으로 확보하게 된다.
 
3. 인도 입장에서의 매력도
인도 경제의 현안은 인프라의 개발 및 에너지, 환경 문제 해결, 그리고 제조업의 발전이다. 이런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원 효율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갖고 있는 일본을 최적의 파트너로 고려할 수 있다. 또 인도는 ASEAN에서 실질적인 경제적 리더십을 가진 싱가포르에 대해 매력적인 조건으로 경제 협력을 맺은 바 있다. 이와 같거나 좀 더 나은 조건을 일본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본다면 ‘사무라이-스와미 동맹’은 일본과 인도 양국에 모두 무척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대안은 발생 가능한 시나리오로 채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시나리오가 한국 경제 및 기업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이 시나리오의 발생을 전제로 할 때, 일단 개별 국가 간 또는 기업 차원에서 이뤄지는 중국과 인도 시장 진출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 21세기 한일 양국의 산업구조는 유사성이 높아지고 있다. 일례로 상위 10대 수출 품목 중 9개가 중복되고, 상위 3대 수출 품목(자동차, 전자 및 기계류)은 양국이 완전히 똑같다. 더욱이 한일 양국은 모두 중국과 인도 시장을 향후 가장 중요한 성장 거점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 자원 및 인프라 개발도 양국의 주요 관심사다.
 
인도와 일본의 동맹 시나리오 발생을 전제로 할 때 양국의 동일 산업이 중국과 인도를 놓고 경쟁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한국 기업들이 대거 진출해있는 중국의 동부 연안지역은 이미 저원가 생산기지로서의 매력을 빠르게 상실해가고 있다. 이에 따라 제3의 생산기지 확보가 한국 기업의 핵심 당면 과제가 됐다. 더욱이 중국 현지 기업의 추격으로 인해 과거 ‘Mid-tech’와 마케팅 능력을 기반으로 중국시장에서 고성장을 구가하던 한국 기업들도 새로운 고성장시장으로 진출을 추진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한국 기업들은 중국시장에서의 지배력을 힘겹게 유지하면서 인도 및 동남아 시장으로 적극적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사무라이-스와미 동맹’ 체제하에서 한국 기업들은 인도 시장에서 일본 기업에 비해 차별적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ASEAN 국가에서도 일본 기업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특히 한국 정부 또는 기업의 정책이 중국을 견제하는 ‘사무라이-스와미 동맹’과 밀착하는 관계로 비칠 경우 외교적·정치적 영향력이 취약한 한국 기업들은 중국 시장에서도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요약하면 대세론을 따라 각자 성장하는 거대 시장인 중국과 인도 양국에 대해 개별적이고 단순화한 접근을 할 경우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에서 큰 판을 예상하는 시나리오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논의를 진전시켜, 바뀐 시나리오에 따라서 한국 기업들이 취할 수 있는 대응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알아보자. 우선 업종에 따라 중국과 ‘사무라이-스와미 동맹’ 지역의 장단점을 면밀히 살펴 장기적인 생산 거점 및 판매 시장에 대해 선택과 집중을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해 양 지역에 공히 대규모 생산 거점을 운영할 수 없는 업종이나 기업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들 중 특정 국가에 대규모 생산 거점을 확보하고 있는 기업의 경우 ‘사무라이-스와미 동맹’의 가시화 이후 생산 거점을 이동시킨다면 해당 국가 정부와의 관계 악화 및 불매운동 등으로 인해 추가적인 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새로운 지역에 맹목적으로 진출하거나 이미 진출한 지역에서 성급히 철수하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니다. 일례로 중국 서부 내륙 지방에는 아직도 월 10001500위안(한화 약 14만21만 원) 의 봉급으로 숙련된 종업원을 구할 수 있는 도시가 상당수 존재하며, 이곳 지방 정부의 해외 투자자에 대한 지원은 아직도 매력적이다. 또 이들 지역에서는 자원 및 인프라 개발 등 성장의 동인들이 상당수 잠재해있다. 인도나 ASEAN 국가들에 있어서도 지역 특성에 따라 이러한 기회를 새롭게 발굴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좀 더 거시적 차원에서 보자면 중국을 비롯한 인도, ASEAN 및 일본과의 경제 협정 체결 등 국가 차원에서의 내실있는 관계 구축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경제적 파급효과가 매우 클것으로 예상되는 한-중, 한-일 FTA는 논외로 하더라도, 단기적으로 큰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일부의 비판을 받고 있는 한-ASEAN FTA 추진은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의미 있는 포석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도와의 CEPA(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 협상을 중국 및 일본에 앞서 시작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협력 관계가 확대되면 아시아 지역 주요 주체들은 한국과의 관계를 ‘너무나 가치 있어 파괴할 수 없는(too valuable to destroy)’ 관계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INSEAD 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했다. 다수의 국내외 기업을 대상으로 시나리오 기반의 경영전략 수립 및 환경 변화에 대응한 조직 개편 작업을 담당했다. 창조경영의 화두를 제시한 <Creative Korea - 창조성 기반의 국가경제 발전방안>, 인프라 서비스와 Mid-tech 기반의 글로벌 시장 개척 등을 강조한 <2015 산업발전 비전과 전략> 프로젝트 등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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