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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꿈을 팝니다” 인문학, 기업을 살리다

문권모 | 8호 (2008년 5월 Issue 1)
人文經營
경영계에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세파에 시달린 경영자들의 단순한 호기심 때문일까요? 전문가들은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없으면 결코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또 철학과 윤리적 기반이 없는 기업은 지속 성장이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효율성과 생산성에 매달리면서 앞만 보고 내달려온 한국 기업들이 급변하는 경쟁 환경에서 최근 인문학으로 눈을 돌린 것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필연적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과 함께 인문학이 경영에 주는 통찰이 무엇인지를 집중 분석했습니다.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김아연 정보검색사 aykim@donga.com
도움말 김호인 포스코경영연구소 연구위원 dortiz@posri.re.kr

일본에서 ‘CEO가 존경하는 리더’로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는 1959년 27세의 나이로 ‘교토세라믹(훗날의 교세라)’을 창업했다. 그가 애초에 기업을 세운 목적은 ‘이나모리 가즈오의 기술을 세상에 내놓아 심판받기 위해서’였다. 창업 3년째의 어느 날 고졸사원 11명이 혈서를 들고 그에게 찾아와 임금과 장래 보장을 요구했다.
 
이나모리는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마당에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직원들을 집으로 데려가 “자네들을 배반하면 그때는 나를 죽여도 좋다”고 3일동안 설득했다.
 
이 과정에서 이나모리는 기업 경영은 단순히 자신의 기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직원과 사회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몇 주간의 고민 끝에 ‘물심양면에 걸친 전 직원의 행복을 추구하고 인류사회의 발전에 공헌한다’는 기업의 사명(使命)을 발표했다. 이후 기회가 되는 대로 “기업에는 고매한 목적, 즉 대의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교세라의 기업 이념은 불교(자비·慈悲)와 유교(경천애인·敬天愛人)에 기반을 둔 것으로, 종교와 철학사상을 경영에 반영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최근 국내외 경영계에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그 관심은 철학, 종교, 심리학, 문학, 역사학을 비롯해 예술까지 다양한 분야에 미치고 있다.
 
서울대가 지난해 가을 개설한 인문학 과정 AFP(Ad Fontes Program)는 기업 CEO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2기 모집에서 경쟁률이 너무 높아 쟁쟁한 기업을 이끄는 기업인도 탈락했을 정도다.
 
또 삼성경제연구소의 월례조찬 특강인 ‘메디치21’에는 매달 600명 이상이 참석해 역사, 문화, 미술을 배운다. 3년 전 처음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수강생이 1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인문학 열풍은 해외에서도 거세다. 미국 대학의 인문학 계열 홈페이지는 ‘인문학이 경영학에 도움이 되는 이유’와 같은 게시물로 도배되다시피 한 상태. 세계적 명성의 스페인 엠프레사(Empresa) 경영대학원은 신입생들에게 의무적으로 인문학 강의를 듣게 한다. 또 구글은 지난해 학부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하버드 경영대학원 졸업생을 특별 채용하기로 했다.
 
인문학이 각광 받는 이유
인문학이 이렇게 각광을 받는 이유는 기업의 경영 환경이 급속히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기업을 둘러싼 환경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으며, 글로벌화도 급속히 추진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기업이 이런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갈수록 단편적 지식보다는 인문학이 가진 종합적인 사고력과 문제해결 능력, 국제적 감각을 가진 인재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루 거스너 IBM 회장은 “기업은 직원들에게 기계의 조작법이나 마케팅 플랜 만드는 법을 손쉽게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정말 골치 아픈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문학은 상상력의 원천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기술적 차별화가 어려워지고, 어디서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오늘날의 환경에서는 지식을 서로 연결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상상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인문학은 창의적 발상을 이끌어내는 직관력의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칼리 피오리나, 역사에서 디지털 태동 예견
현재의 ‘인문학 열풍’을 살펴보면 인문학적 지식을 경영에 응용하는 것이 마치 새로운 트렌드인 것처럼 보인다. 얼마 전만 해도 ‘인문학의 위기’가 이슈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세의 사례에서 보듯 인문학적 지식과 가치를 이용해 성공을 이뤄낸 기업이나 기업인의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칼리 피오리나 전 HP 회장은 대학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그는 경제학이 아니라 중세 철학에서 비즈니스에 대한 분석력을 키운 것으로 유명하다. 또 기회가 될 때마다 “중세가 르네상스 시대로 이행한 것에서 디지털 시대의 도래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이야기했다.


무료 접속 디스켓을 ‘살포’하는 창의적 마케팅으로 인터넷 시대를 여는 데 지대하게 공헌한 스티브 케이스 AOL 창립자. 그는 윌스엄스 칼리지에서 정치학을 전공할 때 컴퓨터 과목을 가장 싫어했다. 이런 그를 인터넷 업계의 거인으로 만든 것은 폭넓은 시야와 여러 시각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정치학적 사고였다.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칼 아이칸은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경험주의 철학에 관한 그의 학사학위 논문은 우수 졸업논문에 뽑히기도 했다. “어떤 이론이건 실제 세계에서 증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으며, 지식은 관찰한 사실에서 나온다”는 것이 주요 내용. 이런 그의 생각과 철학적 분석력은 투자와 기업지배권 관련 활동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세계적인 투자자 조지 소로스 역시 “펀드매니저가 되지 않았다면 철학자가 됐을지 모른다”며 철학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인문학 없이는 나도, 컴퓨터도 있을 수 없다”며 기업경영에 있어 인문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스티브 잡스 애플 CEO는 젊은 시절 인도에서 수행했으며, 그의 창의력 중 많은 부분이 종교적 직관에서 나왔다고 한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서울대 공대와 MIT 대학원을 나왔지만, 인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문가들을 초빙해 문화사 등의 강의를 듣고 사업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는다.
 
제품과 경영에 직접 반영
인문학적 지식을 제품에 직접 반영해서 좋은 효과를 얻는 사례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제품이나 브랜드에 멋진 이야기를 입히는 ‘스토리텔링’ 기법이다. 스토리텔링은 상품이나 브랜드에 담긴 꿈과 이야기를 강조해 고객의 감성을 만족시키는 ‘드림 마케팅’과도 일맥상통한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멋진 디자인이나 품질보다 훨씬 매력적인 속성이 될 수 있다. 롤프 얀센 코펜하겐 미래학연구소장은 “정보시대 이후에는 상품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상품에 든 꿈을 사고 파는 시대가 올 것이다. 꿈은 이야기이며, 문화다”라고 강조했다.
 
삼성전자가 만든 ‘애니밴드’ 뮤직비디오는 한 편의 단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뮤직비디오는 소설 ‘1984년’을 연상케 하는 통제사회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불가리(Bvlgari)는 아예 유명 소설가인 페이 웰던에게 ‘불가리 커넥션’이란 소설을 쓰게 했다. 책 표지에는 불가리 목걸이가 인쇄돼 있고, 이 목걸이는 소설의 전개에서 중요한 소재이다. 아모레퍼시픽은 그리스 여신 헤라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목욕을 했다는 샘물의 이름을 딴 ‘카타노 크림’을 내놓기도 했다.
 
흑백논리가 아니라 상반된 존재들의 공존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조직에 적용하려는 시도도 이미 몇 년 전부터 활발하다. 포스코경영연구소의 김찬모 박사는 “현장조직에서는 비용을 절감하면서, 비용 증가를 수반하는 미래 트렌드 연구소와 같은 혁신조직을 함께 운영하는 ‘양손잡이형(ambidextrous) 조직’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존경받는 기업 만드는 인문학적 가치
소비자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기업은 장수한다. 일본을 대표하는 세 명의 기업가인 고(故)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마쓰시타 회장, 고(故)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혼다 회장,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회적 사명을 중시하는 경영철학으로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3대 기업을 만들었다.
 
마쓰시타 회장은 1932년 아무런 경제적 대가도 받지 않으면서 헌신적이고 행복하게 일하는 천리교 신자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기업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직원이 보람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사회적 사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좋은 물건을 싼 가격에 수돗물처럼 무진장 공급함으로써, 세상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풍요를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경영 철학을 천명했다. 그는 1946년 PHP(Peace and Happiness through Prosperity) 연구소를 설립, 기업 활동을 통해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상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이런 경영정신은 이후 마쓰시타의 경영에서 나침반 구실을 했다.
 
혼다 회장은 ‘일벌레 왕국’인 일본에서 놀이와 즐거움을 중시한 ‘괴팍한 한량’이었다. 그는 “애사심 따위는 필요없으니 자기 자신의 발전과 즐거움을 위해 일하라”고 즐겨 말했으며, 자유분방한 기질대로 학벌, 파벌, 직급과 같은 겉치레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경영관은 개인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그의 사상에서 나왔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자비와 경천애인을 바탕으로 한 경영철학을 실현하며 종업원과 일본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1985년 공공의 이익을 위해 통신요금을 인하하자는 취지에서 DDI(현재의 KDDI)를 설립했다. 또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가의 그릇’이라며 세이와주쿠(盛和塾)를 세우고 젊은 기업가들에게 경영이념과 노하우를 가르쳤다.
이병철 회장, 손자에 역사 전공 권해
인문학은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지식의 집합이며, 문화 그 자체이기도 하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친숙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지식을 전달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많은 기업이 역사적 인물이나 사실에 빗대 직원들을 교육하는 이유다.
 
LG화학은 최근 ‘칭기즈칸 배우기’ 캠페인을 전사적으로 펼치고 있다. 칭기즈칸의 비전 제시 능력과 빠른 전략 전개, 수평적 조직운영 등을 경영에 접목하기 위해서다. 4월 10일에는 서울 본사 임직원 모임에 칭기즈칸 전문가인 김종래 씨를 초청해 특강을 열었다. 이에 앞서 김반석 부회장은 임원과 팀장 600여 명에게 30부작 칭기즈칸 DVD를 나눠주기도 했다.
 
후세들이 인류의 지혜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도록 역사학 등의 인문학을 공부하게 하는 CEO들도 많다.
 
삼성그룹의 창업자 고(故) 이병철 회장이 손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에게 역사학 전공을 권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 회장은 손자가 대학 전공 선택을 놓고 고민하자 “경영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며 “교양을 쌓는 학부에서는 사학이나 문학을 전공하고 경영학은 나중에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충고했다.
 
마이클 아이스너 전 월트디즈니 CEO는 “어떤 비즈니스를 하든 인문학적 지식은 도움이 된다”며 세 아들에게 인문학을 전공하게 했다.
 
사교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
인문학적 지식은 화려하고 흡인력 있는 언변과 부드러운 대화를 도와주는 커뮤니케이션 도구이기도 하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역사적 사례로 연설을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울대 AFP 과정을 수강한 기업인들도 인문학적 지식을 가미해 말하는 솜씨가 엄청나게 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은 역사학 지식을 바탕으로 비즈니스 상담에서 이익을 본 케이스다. 그는 중국콜마의 공장 설립 담당자와 공장 부지의 지명(중국 베이징 회유구)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상담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회유구(懷柔區)는 중국 왕조가 만주의 여진족을 회유한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중견 건설회사인 우림건설은 ‘독서경영’을 경영자와 직원 간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회사의 심영섭 회장은 매달 700권의 책을 자신의 서평과 함께 직원들에게 전달한다. 직원들은 매달 월례조회에서 독후감을 발표하며,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상은 물론 회사나 동료, 선후배에게 하고 싶은 얘기까지 전달한다.
한편 해외에 비해 국내 기업들의 인문학적 지식 활용이 아직은 뒤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의 경우 인문학을 전공한 주요기업 CEO의 비율이 조사에 따라 1538%나 되는 데 비해, 국내 500대 기업 CEO 512명 중 인문학 전공자는 24명밖에 되지 않는다.(월간 CEO 2007년 8월호)
 
배보경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업들은 서구 기업들을 따라잡느라 근원적인 것들을 연구할 여유가 없었다”며 “벤치마크 대상이 없어진 이제는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 등에서 나온 혜안과 통찰력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성과가 좋은 기업의 CEO들은 인문학적 내공이 매우 깊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며, 인문학적 경영을 위한 토대는 이미 상당 부분 갖춰진 듯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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