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13년→4년→3년→2년’
라디오가 처음 발명되고 5000만 명이 사용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38년이다. TV는 시장에 나온 지 13년 만에 5000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했다. 기술의 확산 속도 측면에서 TV가 라디오보다 3배 정도 빨랐던 것. 사용자 5000만 명을 넘어서는 데 인터넷은 4년, 아이팟(iPod)은 3년, 페이스북은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혁신(innovation)의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21세기 정보기술(IT·Information Technology) 사회에서 혁신은 사업 성공의 필수요소다. 한국 기업들에도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혁신을 가로 막는 장애물을 뛰어넘고 빠른 혁신으로 성공 고지에 신속하게 오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혁신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살펴보고 혁신을 가로막는 장벽을 뛰어넘는 신속한 혁신의 비결을 소개한다.
똑똑한 사람이 더 창조적이다?
액센츄어는 혁신과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몇 가지 이야기들을 간추려봤다. 첫째, ‘똑똑할수록 창의적’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능지수(IQ)와 창의성의 상관관계는 IQ 120 정도까지는 유의미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면 큰 의미가 없다고 한다. 120 이상의 IQ를 갖고 있다고 해서 더 창의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다.
둘째, ‘젊을수록 더 창의적이다’는 주장도 맞지 않다. 나이와 창의력은 큰 상관성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정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많이 갖고 있는 전문가일수록 창의적인 생각을 해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전문적인 만큼 기존 틀이나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는 ‘지식의 저주(The curse of knowledge)’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셋째, 혁신이 몇몇 전문가나 창조적인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상당수의 ‘위대한’ 혁신이 제품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근로자나 고객과 같이 혁신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아이디어나 제안에서 시작했다.
넷째, 혁신은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전과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혁신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 실패하기 쉽다.
마지막으로 ‘모든 혁신은 좋다’는 생각이다. 꽤 많은 혁신 아이디어가 시장에 얼굴도 내밀지 못하고 사라졌다. 고객이 아닌 기업이나 생산자의 눈에서 내놓은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혁신에는 나이도, 지능지수도, 전문성도 크게 중요치 않다. 기존의 제품이나 아이디어와 완전히 달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고객의 눈높이에서 조금이라도 새롭고 편리하고 눈에 띄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면 훌륭한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혁신이 이렇게 간편하고 단순하다면 유익한 혁신 아이디어나 제품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액센츄어가 북미와 유럽 기업의 고위간부 600명을 대상으로 혁신을 가로막는 장벽에 대해 물었더니 응답자의 45.1%가 ‘기존 제품 생산 고수’를 꼽았다. 42.8%는 ‘단기 성과에 대한 집착이 혁신’을 가로막는 전형적인 장벽이라고 답했다.
많은 기업들이 새로운 사업 모델보다는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존 제품의 생산 라인을 확장하는 데 투자한다. 혁신 아이디어에 따라 장기계획을 세워 투자하느니 짧은 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곳에 투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어떨까.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시장을 개척하기보다 성공한 제품이나 아이디어를 발 빠르게 따라가며 이익을 남기는 데 익숙했던 한국 기업의 성장 역사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 보수적인 동양 문화와 위계질서, 수동적인 태도, 부실한 보상체계 등도 혁신의 걸림돌이다. 혁신을 통해 성공궤도에 오르려면 이런 근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빨라지고 다양해지는 혁신 VS 갈수록 목소리 커지는 고객
기원전 시대에 ‘혁신’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은 철이나 유리 개발, 계산기 발명 등 12가지에 불과했다. 이후 1000년경까지는 종이, 증기, 도자기 등 8가지, 1600∼1700년 사이에는 망원경, 현미경, 진공펌프 등 17가지 정도가 혁신적인 아이디어나 발명에 포함됐다. 1800∼1900년 사이에는 60가지, 1900∼2000년 사이에는 수백 가지의 혁신적인 제품이 등장했다. 앞서 살펴본 라디오, TV, 인터넷, 페이스북 등의 사례처럼 혁신적인 발명품의 숫자만큼이나 혁신 기술을 이용하는 확산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용자의 목소리도 갈수록 중요해져 혁신 과정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 예로 미국의 산악 자전거를 들 수 있다. 산악 자전거는 큰 기업에서 만든 제품이 아니다. 1980년대에 자전거 타기를 즐기던 한 아마추어가 몇 년에 걸쳐 산악 자전거를 만든 뒤 직접 자전거 제작 사업에 뛰어든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10년 뒤 대기업이 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산악자전거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현재 미국 사람들이 타는 자전거의 65%가 산악 자전거다. 개인 컴퓨터용 공개 운영체제(OS)인 리눅스 역시 사용자들이 함께 만들어 간 대표적인 혁신 제품 가운데 하나다. 수천 명이 리눅스 개발에 참여했다.
대기업들도 혁신 과정에서 고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고객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심하고 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IBM 등 앞서가는 혁신 기업들은 이미 고객과 더불어 혁신을 만들어가고 있다.
구글은 2002년 문을 연 ‘구글 랩(google labs)’을 혁신의 산실로 활용하고 있다. 구글 랩을 통해 사용자들이 다양한 제안과 불만을 내놓으면 구글은 고객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구글 맵도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구글의 서비스 가운데 18가지가 구글 랩에 올라온 사용자 아이디어에서 발전한 것이다. 구글은 지금도 ‘가능성 있는’ 아이디어를 발견하면 시험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켜 상용화 가능성이 있는지 따져보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2005년부터 고객과 소통하기 위한 인터넷 사이트를 열어놓고 있다. 이 사이트(the Microsoft Connect site)를 통해 올라온 의견을 참조해 9만여 가지의 제품 결함을 수정했고 7000가지가 넘는 아이디어를 제품 제작에 활용했다. 이 밖에도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고객의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다양한 혁신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제품 생산과 서비스 과정을 개선하는 데 고객이 직접 참여하는 ‘크라우드소싱(crowdsourcing)’ 시대가 열린 것. 크라우드소싱은 군중(crowd)과 아웃소싱(outsourcing)의 합성어로 군중에게 제품이나 서비스 개발을 아웃소싱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도 이런 추세에 발맞춰 고객 눈높이에 맞춘 혁신을 일궈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삼성의 기업 인터넷 블로그(corporate web blog)나 LG전자의 고객 대상 블로그, 현대자동차의 커뮤니케이션 도구(communications tool) 등이 그 예다. BC카드는 신용카드 서비스에 대한 고객의 의견을 듣기 위해 고객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연다. 현대백화점은 고객들의 최신 유행을 따라잡기 위해 고객들로부터 ‘유행 보고서(trend report)’를 받아 활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