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으로 상징되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은 서양 역사에서 오랫동안 회자되고 찬양돼 왔다. 여기에는 서양이 동양을 이겼다는 유럽인의 인종주의적 희열이 어느 정도 가미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 이유는 이 전쟁이 약소국이 강대국을 이기고 약자가 강자를 꺾을 수 있다는 산 증거였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훨씬 많다. 따라서 그리스의 승리는 전쟁사에서 몇 안 되는 약한 자를 위한 희망의 복음이었다.
그리스, 변화를 깨닫다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후 그리스, 특히 그리스의 두 나라 아테나와 스파르타는 두 가지 교훈을 깨달았다. 첫 번째는 군사적 깨달음이다. 그리스의 전술에는 한계가 뚜렷했다. 보병진으로서는 최강이었지만 중장보병대(팔랑크스)에 의존하는 탓에 비탈이나 좁은 계곡, 시가전에서는 매우 불리했다. 한 개의 팔랑크스는 1열 10명 정도의 병력이 8열(후대에는 12열)로 편성된 사각형 대형이었다. 이런 대형 몇 개가 도열할 수 있는 평지가 전투장이 됐다. 하지만 이것도 상대가 똑같은 중장보병대일 경우에 한해서다. 상대가 기병, 궁수, 경보병, 투창, 돌팔매 부대 등을 동원해 역동적으로 공세를 펴면 중장보병대는 대응책이 없었다.
30kg이 넘는 중무장 탓에 군사들의 움직임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갑옷은 몸 전체를 감으면 무게 때문에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신체의 앞 부분만 막도록 설계돼 있었다. 이 때문에 측면과 후방은 무방비 상태가 됐다. 그래서 중장보병대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적군을 만나면 오히려 자신들에게 불리한 지형, 즉 계곡 평야와 같이 양쪽이 막힌 좁은 지형을 선호했다.
이렇게 제대로 기능하기도 힘든 군대로 페르시아를 이긴 게 기적이었다. 그리스가 운 좋게 페르시아를 물리치긴 했지만, 그리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계기로 팔랑크스에 의존하는 데서 탈피해 기병, 경보병 등 다양한 병종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두 번째 깨달음은 정치적 자각이다. 그리스도 이제는 폴리스 간의 느슨한 연맹이 아닌 집중력 있는 국가조직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그리스 전체의 맹주 자격을 놓고 20년간 기나긴 전쟁을 벌였다. 그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페르시아 전쟁의 교훈을 망각한 스파르타
전술적 열위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함에 따라 그리스군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지중해 세계에서 그리스 용병의 인기도 갈수록 커졌고 더 넓은 세계로 나가 다양한 병종과 어울려 싸울 기회도 늘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인의 전술적 안목도 높아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로 가면, 기병과 경보병을 동원해 팔랑크스의 측면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전술적 개량이 이뤄진다.
그러나 이런 개량이 좀 더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전쟁의 승부가 나버렸다. 스파르타가 드디어 아테네를 제압해버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승리에 취한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북방에서 성장하는 테베라는 신흥 강국의 위험성, 그리고 약자의 생존 투쟁이 창의적 전술과 혁신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싸우는 동안 북쪽의 테베는 야금야금 세력을 키웠다. 아테네를 제압한 스파르타는 테베로 진입해 괴뢰정권을 세웠다. 스파르타의 승리는 거의 확정적이었다. 이때 테베가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테베의 애국자들이 봉기해 괴뢰정권을 타도한 것이다. 스파르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양국의 군대는 다시 격돌했다.
레욱트라 결전
기원전 371년 그리스의 레욱트라 평원(지금의 레브크트라 부근)에서 양국의 군대가 만났다. 스파르타의 왕 클레옴브로토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은 기병 1000명에 중장보병 1만 명이었다. 테베군은 중장보병이 6000명에 기병도 열세였다. 테베군의 지휘관은 에파미논다스였다.
중장보병 전투에서는 전통적으로 우익의 팔랑크스에 정예병을 배치하는 게 관례였다. 여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중장보병은 왼손에 방패를 들고 그것으로 자기 몸의 왼쪽 반신만을 가렸다. 우측면은 우측 병사의 방패에 맡겨야 했다. 두 사람이 한 개의 우산을 나눠 쓰듯이 방패를 공유하게 되는데, 맨 우측의 병사는 자신의 우측을 가려줄 방패가 없었다. 이 병사가 방패를 자신의 우측면으로 좀 더 당기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모든 방패가 우측으로 쏠리게 된다. 굳이 이런 경우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방패가 우측으로 쏠리는 현상을 완전히 방지하기는 힘들었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므로 방패의 엄호면이 공정하게 가운데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병사의 몸도 방패를 따라 우측으로 가게 된다. 결국 팔랑크스는 똑바로 가지 못하고 우측으로 비스듬히 진격하게 된다.
그리스군은 이 경향을 인정하고 오히려 이를 포위 전술로 활용했다. 우위에 강력한 병사를 배치해 적의 좌측 모서리를 강타한 후, 우측의 돌출부가 적의 대형을 감싸듯이 포위하는 것이다. 즉, 직사각형 형태인 두 개의 팔랑크스가 충돌할 때는 정확히 서로 모서리를 맞추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게 아니라, 두 개의 사각형이 서로 우측이 약간 벗어난 형태로 충돌하게 한 후 대형 내 우측 병사를 내보내 적의 측면을 선형 포위한다. 두 팔랑크스가 이런 전술을 사용하면 마치 두 마리의 개가 맞부딪친 후 서로 꼬리를 물기 위해 빙빙 도는 듯한 형태가 된다. 이때 힘에서 밀리고 팀워크가 부족한 쪽의 대형이 먼저 허물어진다. 단순한 듯하지만 정교한 기술과 순간 판단력, 팀워크가 필요하다. 이런 전투를 누구보다 정확하고 힘 있게 수행했던 나라가 스파르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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