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7년 영국에서 여러 술집들이 간판을 고쳐 달았다. 새로운 가게 이름은 ‘킹 오브 프로이센’. 그 술집에는 새로이 등장한 전쟁 영웅에 대한 찬사와 그의 승리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이 프로이센의 왕이 바로 프리드리히 2세이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침공한 이래 게르만족과 독일은 군사력과 국가적 잠재력에 관한 한 언제나 주변국에게 긴장감을 주는 존재였다. 그러나 18세기 중반까지 독일은 한 번도 유럽의 강국이 되지 못했다. 현재에도 프랑스 외인부대 하사관으로는 반드시 독일인을 고용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게르만족은 군인으로서 최고 자질을 지닌 민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최고 용사들은 2000년간 유럽 용병으로 팔려 다녔다. 그들은 언제나 강했지만, 한 번도 승리자 위치에 있지는 못했다.
이 독일을 마침내 유럽의 강국으로 키우고, 군사력만이 아니라 경제력으로도 유럽 최고 국가로 자리 잡는 기틀을 만든 사람이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러나 그 시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유럽의 두 거인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용트림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175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시작하자 유럽의 모든 강국들이 프로이센을 향해 덤벼들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 지금은 독일이 된 작센과 바이에른, 영국, 스웨덴에 거대한 러시아까지 가세했다. 오늘날의 독일도 아닌 한 개의 영주국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이 전 유럽의 강국을 상대로 싸우는 유래가 없는 일이 시작됐다. 이것이 7년 전쟁이다. 대륙의 거의 모든 강국이 반 프로이센 동맹을 형성했는데 그나마 영국이 발을 뺀 게 다행이었다.
애처로운 왕자의 운명
프리드리히는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전쟁터를 누볐다. 유럽 사람들 특히 이 전쟁이 강 건너 불구경이었던 영국인들은 흥미롭게 전쟁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프리드리히의 이미지는 전쟁터의 지휘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젊은 시절 프리드리히는 이지적인 외모, 프로급의 플루트 실력,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미소년 왕자로 이름을 날렸다. 7년 전쟁 중에도 프리드리히는 플루트를 지니고 다니며 야전 텐트에서 플루트를 연주를 하곤 했다. 투박한 프로이센의 군사 문화가 싫었던 왕자는 그가 소망하는 문화적인 삶을 위해 왕위조차도 내팽개치고 영국으로 탈출하려 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왕자를 탑에 가두고 함께 탈출하려고 했던 친구를 프리드리히의 눈앞에서 처형했다. 정말인지는 조금 의심스럽지만 친구의 처형 장면을 보고 기절했던 왕자가 깨어나자 테이블에 친구의 목이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수많은 영국인들이 이 애처로운 왕의 운명을 반은 흥미, 반은 동정심을 지니고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도 프로이센이 전쟁에서 배겨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프리드리히의 이야기는 니베룽겐의 이야기와 같은 처절하고도 애처로운 비극적 서사시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위대한 비극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이텐의 수렁
1757년 11월 로스밧하 전투에서 프리드리히는 3만 명의 군사로 5만 명의 프랑스군을 궤멸시켰다. 프로이센군의 손상은 경미했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깐,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상대하는 틈을 노려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의 실레지엔 지방을 침공했다. 프리드리히는 서둘러 실레지엔으로 회군했다. 먼저 장군을 부른 쪽은 오스트리아였기 때문에 전황은 오스트리아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들은 프로이센의 회군을 예측하고 프로이센군을 요격하기 유리한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그 장소가 로이텐이었다. 프로이센은 선수를 놓친 데다 사방이 적이었기 때문에 시간도 없었다.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고 실레지엔을 탈환해야 했다. 보통 공격에는 수비군의 5배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상대가 유리한 지형을 장악하고, 충분히 진지를 구축하고 있으면 필요 인원은 10배로 늘어난다. 그런데 겨우 3만의 프로이센군이 강과 소택지와 구릉을 끼고 전술학의 교범대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8만 명의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군의 진형 배치는 완벽했다. 좌익의 끝은 고지와 강으로 보호되었다. 고지는 공격이 어렵고, 강이 있어서 측면을 우회해서 기습하기도 불가능했다. 우익은 소택과 삼림이었다. 당시 전투는 긴 횡대의 밀집 대형을 이루고,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적들 앞으로 곧바로 서서 걸어서 전진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삼림 지역을 이용하기도 곤란했다. 유일한 방법은 소택지를 횡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택도 보행이 쉽지 않아 프로이센군은 전진에 애를 먹을 것이고, 오스트리아군은 수렁에 빠진 그들을 향해 총알 세례를 퍼부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도 약점이 하나 있었다. 프로이센군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공격 지점을 하나 선정한 뒤 희생을 각오하고 병력을 집중 투입해서 승부를 거는 것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군은 지형을 완벽하게 선점하려다 보니 진이 너무 길어져 8km나 되었다. 즉 대형이 너무 얇아졌다. 프로이센을 궤멸시키려면 공격 예상 지점에 병력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의 공격 지점이 우익이라고 예측하고 예비대를 그쪽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