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은 최후의 근대 전쟁이라고 불린다. 이 전쟁 중에 기관총, 철선과 잠수함이 등장했고, 보병이 서서 일렬로 전진하는 나폴레옹 식 전쟁이 종말을 맞았다. 철도를 이용해 병력을 이동시킨 최초의 전쟁이기도 했다. 덕분에 전쟁 상황판이 갑자기 크고 복잡해졌다. 아메리카 대륙이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군의 기동력과 이동 범위가 크게 넓어짐으로써 전투의 가용 영역과 전술 영역도 넓어졌다. 두뇌와 사고력이 넓어진 범위를 감당하지 못하던 지휘관들은 커다란 낭패를 보고 전장에서 퇴출됐다. 전쟁이란 게 원래가 혼돈과 파멸의 신이 지배하는 곳이지만, 구시대의 정신과 신시대의 문명이 공존하다 보니 남북전쟁의 전황은 한마디로 혼돈과 살육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특징을 제대로 구현한 전투가 승부의 분수령이었던 ‘게티즈버그 전투’다.
전쟁 발발 3년째였던 1863년 전쟁에서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남군의 명장 잭슨이 전사했다. 서부 전선에서는 그랜트가 이끄는 북군의 파상 공세로 요충지였던 빅스버그가 함락 직전에 있었다. 북군 입장에서는 전쟁 발발 후 사실상 최초로 제대로 된 승전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자 남군 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는 돌발적인 제안을 한다. 남군의 정예병을 모아 바로 워싱턴을 치자는 것이었다.
북군은 빅스버그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으며, 남군의 장군들은 모두 동부의 병력을 나눠 빅스버그를 구할 방법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는 이때가 바로 승부를 걸어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아직 그의 남군은 불패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장기전으로 가면 남부의 패배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남군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도박이 필요했다. 아마도 리는 처음부터 이런 구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기습의 순간을 파악하는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7만6000명의 남군이 빅스버그가 아닌 펜실베이니아에 나타나자 북부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북군이 동원한 병력은 9만 명이었다. 링컨은 남군의 주력을 섬멸할 기회가 왔다고 말했지만, 이때까지 북군은 10배의 병력을 가지고도 승리해본 적이 없었다.
게티즈버그에서의 조우
남북의 대군이 만난 곳이 바로 ‘게티즈버그’였다. 게티즈버그 전투는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5km가 넘는 긴 전선에서 진행된 복잡한 전투의 조합이다. 첫날의 전투는 우연치 않게 시작됐다. 물자 부족으로 거의 거지꼴을 하고 있던 남군의 선발 사단은 게티즈버그에 제법 큰 구둣방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대회전을 앞두고 군화를 조달하기 위해 그들은 게티즈버그로 입성했다. 한편 남군을 찾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던 북군 기병대도 우연히 게티즈버그로 들어왔다가 남군의 구둣방 습격을 알게 됐다.
기병 연대장이었던 버포드는 게티즈버그의 전략적 가치를 당장에 파악하고, 자기 연대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남군의 주력을 게티즈버그로 끌어들이겠다고 결심한다. 게티즈버그의 북쪽은 평원, 남쪽은 험한 바위산을 낀 능선으로(당시 남군은 북쪽에서, 북군은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대단히 우수한 방어 지형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포드의 안목과 군인 정신은 확고한 보답을 받았다. 첫날 북군은 병력 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지만, 남군은 예상치 못하게 전투에 휘말린 데다 주변 지형도 잘 알지 못해 능선의 고지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둘째 날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남군의 장군들은 땅을 쳤다. 첫날 북군의 주력이 아직 도착하지 못해 능선의 주요 고지들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남군이 희생을 각오하고 고지를 차지했더라면 게티즈버그의 2일과 3일은 북군이 고지를 향해 돌격하는 무모한 공격 끝에 학살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남군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소극적으로 돌변해버렸다. 적진에 들어온 상황이라 병력과 보급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