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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기 기업 경영의 진화

경영, 이젠 의도된 플랜(Plan)에서
반전 스토리가 있는 플롯(Plot)으로

김은환 | 391호 (2024년 4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성공적인 경영 전략의 특성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계획-실행-통제(Plan-Do-See)’ 패러다임이 해체, 재구성되고 있다. 이제 경영 전략은 마스터 플랜이나 상황별 시나리오가 아닌 각본 없는 드라마, 훌륭한 반전 스토리를 담은 플롯형 전략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런 플롯형 전략을 구사하는 대표적인 리더는 일론 머스크다. 화성 이주라는 비전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을 때 머스크는 위성 인터넷이라는 또 다른 플롯을 진행하고 있었다. 또한 2022년 공개된 테슬라의 휴머노이드 ‘옵티머스’는 서툰 걸음과 빈약한 기능으로 시장에 실망감을 안겼으나 얼마 후 보행 동작과는 무관한 손을 활용하는 로봇이 테슬라의 자동차 공장 기가팩토리에 설치되면서 조립 생산성과 품질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이런 머스크의 행보는 사내외에 비전 선포식을 거행한 후 분기별, 연도별로 달성 상황을 이사회에 보고하는 플랜형 전략이 아닌 은폐된 노림수로서의 플롯형 전략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성공적인 경영 전략의 특성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계획-실행-통제(Plan-Do-See)’ 패러다임이 해체, 재구성되고 있다. 환경 분석과 예측을 통한 계획과 실행이라는 전략 프로세스는 더 이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제 경영 전략은 마스터 플랜이나 상황별 시나리오가 아닌 각본 없는 드라마, 목적지를 모르는 로드무비와 비슷해지고 있다. 20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사시의 핵심을 ‘플롯(Plot)’이라고 봤다. 계획과 실행이라는 논리적 연역 방식으로는 디지털 시대, 경영의 성공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드러나면서 전략에 스토리를 입혀야 한다는 논의가 많은 곳에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논의는 전략을 소통하는 방식, 즉 구성원과 이해관계자에게 전략을 설득하고 몰입시키는 인터페이스, 홍보 수단으로서 스토리를 규정한다.1 필자는 스토리가 이보다 더욱 깊숙이 전략의 본질, 즉 수립과 실행의 핵심까지 변화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제 전략은 실행을 기술한 사전 계획이 아닌 의외성과 반전을 내포한 이야기가 돼야 한다. 2000년간 스토리 구성의 근본 원칙으로 자리 잡은 플롯의 원리를 통해 전략의 새로운 개념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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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변화의 가속화로 불가능해진 합리적 예측

디지털과 정보기술(IT) 고도화에 기반한 ‘데이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경영 전략과 의사결정은 감성이나 직관이 아닌 과학적 분석을 따라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화됐다.2 하지만 분석이 직관을 대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과학은 이론이 확립된 뒤에는 빈틈없이 정연한 논리 체계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예측 불허의 여정을 거쳐야 한다. 문제는 오늘날의 경영이 확립된 과학 이론을 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의 생성 과정에 깊이 연루돼 있다는 점이다. 핵융합발전, 전고체 배터리, 유전자 가위, 생성형 인공지능(AI), 초전도체 등 최근 산업계와 경영계를 강타한 과학기술은 완벽한 검증을 거쳐 확립된 이론과는 거리가 멀다. 2023년 하반기 초전도체 개발과 관련한 논란은 이를 잘 보여준다. 고려대와 민간연구소 기업 퀀텀에너지연구소가 충전, 송전 등에서 획기적 개선을 이룰 수 있는 초전도체 개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큰 화제를 모았지만 이후 국내외 과학계의 검증 절차에서 의구심이 증폭됐다. 국내 검증위원회가 부정적 견해를 표명한 가운데 미국 물리학회는 추가 연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논란이 일며 꿈의 물질 구현이라는 기대와 검증이 미흡하다는 회의론 사이에서 주식시장은 요동을 쳤다. 대체로 부정적인 의견이 많지만 2024년 3월 현재 최종적인 결론은 내려지지 않은 상태다.

이처럼 과학자들 사이에서 완전한 합의가 이뤄지고 세부 내용까지 완성된 과학기술이 산업으로 이관되는 것은 아니다. 꿈의 기술과 협잡 사이 그 어디쯤에 있는 기술들이 등장하고 검증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이미 투자와 사업화는 진행된다. 이는 정보혁명 이후 경영의 일상이 됐다. 신기술의 가능성을 믿고 너무 빠른 행보를 보인 기업들은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2001년 출시한 윈도 기반 태블릿, 모토로라가 시도했던 위성통신 시스템 ‘이리듐 프로젝트’, 2002년 소니가 시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통합 네트워크 등은 모두 시대를 너무 앞서가 실패했다.

이는 과학기술이 논리적이고 정확하므로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명백한 오해임을 보여준다. 어떤 기술이 언제 발명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초전도체와 핵융합발전은 영원히 상용화되지 않을 수도, 어느 날 갑자기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챗GPT가 2023년 가져온 충격은 신기술에 대한 예측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전도유망한 신기술이라도 이것이 널리 확산될지, 사장될지를 예측하기도 매우 어렵다. 한때 투자 열풍을 불러온 암호화폐, NFT, 메타버스 등은 2024년 현재로선 그 전망이 상대적으로 불투명해졌다. 2024년 벽두에 출시된 애플의 비전프로는 식어가는 메타버스 열풍을 되살릴 것으로 주목받았으나 출시 한 달도 안 돼 콘텐츠가 빈약하다는 혹평과 함께 멀미로 인한 반품이 쇄도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결론적으로 기술의 전환이 빠를수록 경영은 더욱 불확실한, 예측 불가의 혼돈 속으로 휩쓸려간다. 신기술의 향방을 예측하는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측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측은 기반이 되는 중요한 환경과 기술에 대한 근본 전제가 필요하다. 근본 전제 자체를 흔들어 버리는 기술변화는 예측의 타당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버린다. 어떤 운동선수가 100m를 몇 초에 달릴지 예측하려면 최소한 달리는 동안 주변 여건이 불변해야 한다. 도중에 이 선수가 갑자기 슈퍼 히어로로 변신한다든가, 지진이 일어나 트랙이 비틀어진다면 소수점 단위의 예측은 아무 쓸모없다. 과학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지만 이에 따른 기술의 예측 가능성은 감소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다. 현재 기술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그 범위가 확대되고 하나의 기술로부터 다양한 부문의 파생 기술이 등장하고 있다. 이 중에 어떤 것이 변화의 트리거가 되고 ‘넥스트 빅싱(Next Big Thing)’이 될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이처럼 합리적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경영 전략은 어떻게 미래를 헤쳐 나가야 할까.


플랜이 아닌 플롯에 집중하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플롯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원리로 플롯을 내세웠다. 플롯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지만 단어의 어원에서 그 뉘앙스를 짐작할 수 있다. 플롯의 어원에는 비밀 계획(secret plan)이란 의미가 포함돼 있다. 비밀 계획이란 공개된 계획과 달리 소설이나 영화 시나리오에서 반전의 충격을 주기 위해 독자와 관객에게 클라이맥스까지 진실을 숨기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를 속이려면 진실을 감추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진실보다 더 그럴듯한 거짓을 내세워야 한다. 거짓에 현혹되면 배후에 존재하는 진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이때 갑자기 반전이 일어나고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된다.3

이는 영화나 소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경영 전략도 훌륭한 반전 스토리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주인공이 바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다. 머스크가 화성 이주 계획을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이 이를 허황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머스크는 팰컨 9이라는 재사용 로켓의 발사와 지상 회수에 성공함으로써 로켓 발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했다. 물론 재사용 로켓 개발은 화성 이주라는 비전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으며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나치게 원대한 계획으로 인한 회의적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머스크의 우주 사업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재사용 로켓으로 인공위성 발사 비용이 파격적으로 낮아지면서 대량의 인공위성을 저궤도에 올릴 수 있게 됐고 이를 통한 위성 인터넷 사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2000년경 모토로라가 추진했던 이리듐 프로젝트는 66개 위성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했지만 머스크의 위성 시스템 스타링크는 이미 위성 수천 개를 쏘아 올렸고 궁극적으로는 1만 개 이상의 위성 시스템을 지향한다.4 화성 이주라는 비전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을 때 위성 인터넷이라는 또 다른 플롯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머스크의 사업 전개에는 이런 플롯이 자주 보인다. 2022년 공개된 테슬라의 옵티머스라는 휴머노이드5 는 서툰 걸음과 빈약한 기능으로 시장에 실망감을 안겼다. 영화에서 보던 휴머노이드에 비하면 그야말로 걸음마 단계처럼 보였으나 얼마 후 보행 동작과는 무관한, 손을 활용하는 단순 버전의 로봇이 테슬라의 자동차 공장 기가팩토리에 설치되면서 조립 생산성과 품질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6 이는 머스크의 비밀 계획, 즉 플롯이었던 셈이다. 바둑의 격언에 ‘성동격서(聲東擊西)’라는 말이 있다. 동쪽에서 소리를 내 관심을 유도한 후 방치된 서쪽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화성으로 관심을 유도한 후 지구 저궤도를 장악하고, 휴머노이드에 집중하게 한 후 기가팩토리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머스크의 전략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이런 머스크의 행보는 사내외에 비전 선포식을 거행한 후 분기별, 연도별로 달성 상황을 이사회에 보고하는 공개 계획이 아닌 은폐된 노림수, 비밀 계획으로서의 경영 전략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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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의 전략은 현재 진행형으로 최종 결과는 두고 봐야겠지만 성과가 검증된 모범 사례로는 아마존과 애플이 있다. 아마존의 유통 플랫폼은 창업 이래 적자를 지속해왔으며 향후 전망도 어두웠다. 하지만 아마존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깜짝 흑자전환에 성공했는데 그 전략이 대표적인 성동격서였다. 아마존은 모두가 집중하던 유통 사업이 아닌 클라우드 사업에서 대규모 이익을 거뒀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전문 IT 업체가 아닌 유통 공룡 아마존이 클라우드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마존은 블랙프라이데이 등 트래픽이 집중되는 시기에 대량의 거래를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해 강력한 컴퓨팅 파워를 구축했는데 이것이 일상적인 시기에는 아마존에 막대한 유휴 용량이었다. 이를 활용하기 위해 아마존은 클라우드 사업에 진출했고 고수익의 B2B 사업으로 연결된 것이다.7

애플의 아이폰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폰은 보다 멋지고 편리한 휴대폰으로 주목받으며 등장했지만 이미 휴대폰 시장에는 노키아, 모토로라, 삼성전자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크기, 휴대성, 통화 품질, 카메라 해상도 면에서 능가하기 어려운 품질을 달성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이폰에는 경쟁자를 우회할 비밀 계획이 있었다. 아이폰의 넓은 터치스크린은 단순히 멋진 인터페이스를 위한 것이 아닌 휴대폰을 모바일 인터넷 기기로 만들어주는 무대였으며 이 무대의 주역은 수많은 IOS 앱 개발자였다. 휴대폰 회사들이 간과하던 새로운 콘텐츠와 인터페이스가 앱스토어를 통해 구현됐다. 아이폰의 경쟁 대상은 휴대폰이 아닌 인터넷 기기, 즉 노트북과 컴퓨터였던 것이다. 작은 화면과 용량의 한계는 웹브라우저를 대체한 다양한 앱을 통해 극복되면서 비로소 모바일 네트워크의 시대가 열렸다.8


플롯형 전략은 의도와 우연성의 예술

제프 베이조스, 스티브 잡스, 머스크는 21세기의 서막을 연 걸출한 전략가로 꼽힌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을까. 그렇진 않았다. 잡스는 초기에 아이폰 전략의 핵심인 앱스토어를 싫어했으며 마지막까지 완강하게 반대했다. 처음부터 인터넷 기기 시장을 노렸다고는 보기 어려운 행동이다.9 아마존의 클라우드 사업 역시 처음부터 기획된 건 아니었다.10 이는 최고의 전략가들도 모든 것을 예견하고 통제하진 못함을 보여준다. “경영은 예술”이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은 이런 플롯형 전략에 꼭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플롯형 전략은 의도와 우연성의 예술이다. 예술가는 사전 계획을 가지고 창작에 들어가지만 대상과 마주하면서 우연적 효과와 조우한다. 우연은 계획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때론 우회로를 열어주면서 계획을 변경시키고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밀어 올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스토리의 주인공은 의도가 좌절되는 반전을 겪지만 새로운 의미를 깨닫고 자신을 고양시킨다. 이처럼 플롯형 전략을 실행하는 데는 단선적, 일차원적 접근이 아닌 틀을 깨는 입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리더는 의도와 우연이 부딪히는 과정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계획을 진화시켜야 한다. 소설이나 드라마의 경우 작가가 전지적 시점에서 스토리를 구성하지만 현실 경영은 각본 없는 드라마, 즉 리얼리티 쇼에 가깝기 때문에 더욱 우연이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플롯으로서의 전략은 기존의 플랜으로서의 전략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 우리에게 익숙한 ‘계획-실행-통제’ 단계별로 그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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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경을 보는 관점: 전략의 상수에서 공진화 네트워크의 변수로

플롯형 전략을 위해서는 환경과 경영에 대한 이분법적 시각을 극복하고 기업과 외부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보는 세계관이 필요하다. 경영은 주어진 제약 조건 아래 목적 함수를 최적화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어떤 제약 조건도 고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ESG 경영의 부상은 경영의 규칙을 매우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으며 앞으로 또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예견하기 어렵다.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규제, 최근 주목받는 AI에 대한 규제도 역동적으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선호는 물론 경영과 기업 간 경쟁에 대한 규범 자체가 끊임없이 수정되고 진화한다. 앞서 설명했듯 아이폰은 독자적인 앱 개발을 포기하고 전 세계 앱 개발자들에게 플랫폼을 제공하는 전략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아이폰의 창시자인 잡스조차 처음엔 이런 아이디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무한한 다양성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선호, 그리고 이를 제공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 경제의 도래는 정교한 사전 전략만으론 따라잡기 힘든 역동성을 보여준다. 한편 머스크는 업계 관행과 달리 배터리를 자체 생산하기로 결단했다. 전기차에서 배터리가 갖는 기술, 비용적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전략을 수정한 것이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당연시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환경은 고정돼 있지 않을뿐더러 수동적이지도 않다. 환경이 보내는 시그널을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하고 변화와 함께 진화한다는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2. 목표: 양적 성과 지표에서 설득력 있는 비전으로

미래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목표 없이 경영을 할 순 없다. 다만 목표의 성격은 바뀌어야 한다. 목표 경영(MBO, Management By Objectives)에서 목표는 성과 평가를 위한 잣대로서 양적 지표로 구체화되는 경향이 있다면 앞으로의 목표는 설득력 있는 정성적 비전으로 바뀌어야 한다.11 시간이 흐르면서 정교하게 조율된 양적 지표는 의미를 잃어버리기 일쑤다. 마치 업데이트되지 않은 옛날 지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내비게이터를 따르는 꼴이 된다. 반면 정성적 비전은 환경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면서도 가치 있고 매력 있는 신념 체계에 단단히 뿌리 내린다. 정성적 비전이라고 하면 흔히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추상적이고 내용 없는 슬로건이 연상될지도 모르겠다. 환경 변화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표현을 어느 정도 모호하게 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좋은 비전은 개성 있는 신념을 담고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완구 회사 레고의 미션은 “미래의 건설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이들을 발전시키는 것(to inspire and develop the builders of tomorrow)”이다. “어린이에게 영감을 준다”는 말은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다”는 말만큼이나 추상적이지만 어린이를 ‘미래의 건설자’로 표현함으로써 영감의 내용과 방향성이 생동감을 얻은 예다. 이처럼 기업의 비전을 달성해야 할 구체적 목표가 아닌 추구해야 할 가치로 상정하면 다양한 사업과 전략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3. 실행 방법: 분석적 문제 해결에서 과학적 상상력으로

양적 성과 지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은 계량적, 분석적 해결책을 동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영의 판도 자체가 바뀌는 상황에서 분석적 접근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아마존의 클라우드 사업 진출이나 애플의 앱 생태계 구축은 모두 기존의 점진적 개선 전략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물론 분석이 아닌 직관에 의존해 의사결정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과학적 상상력이 중요하다. 과학적 상상은 설령 현실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몇 가지 가정을 전제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과만을 채택한다. 즉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상상하는 것은 판타지지만 양탄자의 비행 원리를 고려하고 이를 통해 정거장, 이착륙 장소, 항로 시스템까지 생각하면 과학적 상상이 된다. 디지털 시대의 비즈니스 모델 구상도 이와 비슷하다. 인터넷에서의 전자상거래는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유통업체들에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인터넷이 열어준 새로운 채널에서 가장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하고 주문, 배송, 결제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엄밀하고 과학적인 SF 소설을 쓰는 것과 비슷했다. 기본적으로 과학적인 작업인 데다 기존의 현실을 박차고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황당함과 용기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디지털 시대, 앞으로의 사업 혁신에서도 이와 같이 대담한 큰 그림과 과학적 정밀성은 늘 동시에 요구될 것이다.

4. 성과 척도: 주주 중시 이윤 추구에서 ‘더 나은 관계(deal)’로

주주 중시 경영, 즉 이윤극대화라는 기업 목적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이런 논의는 빅테크 기업이 세계시장을 지배하면서 더욱 첨예하게 진행되는 모습이다. 플랫폼 비즈니스가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윤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추구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에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한 비즈니스 모델은 수익 극대화가 아닌 다른 결과를 지향해야 할지 모른다. 일례로 챗GPT로 주목받는 오픈AI는 최상위 의사결정체를 비영리법인으로 구성하고 이더리움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도 운영 회사의 형태로 비영리법인을 채택했다.12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사업 모델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이윤에만 의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시장의 부침으로 이윤 자체는 크게 변동하기 마련이다. 지속가능한 사업 기반을 위해서는 이윤보다는 이해관계자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아마존과 아마존셀러, 구글과 유튜버, 우버와 우버 기사, 에어비앤비와 호스트 등 플랫폼과 콘텐츠 제공자 간의 공생이 지속가능한 사업 기반으로서 역할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향후 비즈니스는 기업은 물론 외부 참여자들과 얼마나 가치 있고 생산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지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커뮤니티는 기업의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성을 발휘하며 플랫폼 생태계를 건설해 가는 크리에이터와의 공동 창조물이다. 이처럼 기업이 새로운 관계와 공동체를 구축해나가는 것이 주주에게 이윤을 배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서로가 자극을 주며 혁신을 촉진하는 이런 역동적 관계만이 각본 없는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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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형 전략을 위한 가이드

여전히 많은 기업이 전형적인 ‘계획-실행-통제’의 경영관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불확실성이 합리적인 예측 범위를 벗어나면 계획의 의미가 퇴색될뿐더러 변화에 대한 대응을 속박하는 족쇄가 될 수 있다. 상당수 기업의 미래 행보가 안정적 환경에서의 계획이라는 프레임 위에 짜인 상황에서 플랜형 전략을 플롯형 전략으로 전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기업들이 우선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항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진정성 있는 비전을 끈기 있게 추진

돈이 될 만한 사업 또는 기존 역량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을 찾는 것이 신사업 탐색의 공식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업 목적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2024년 현재 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배달 앱은 배달을 넘어 서비스의 가치와 의미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배달의민족은 2023년 10월부터 3개월 동안 비효율 문제를 겪고 있는 외식업체를 선정해 컨설팅과 디지털 전환을 지원함으로써 매출 증가 등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발표했다.13 물론 이는 배달의민족 측의 발표 내용으로 객관적으로 검증된 건 아니지만 그 의도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단순히 오프라인 외식 사업에 비대면 배달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영세 자영업자의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는 촉진자(digital enabler)14 역할을 지향하는 한 차원 높은 비전은 단순한 매출과 이익 성장이라는 실적보다 중요하다. 쿠팡의 정규직 라이더 고용, 쇼핑이 아닌 소셜을 지향하며 ‘더 풍요로운 동네 생활’이라는 비전을 제시한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 등의 사례도 마찬가지다.15 이는 단순히 기업의 이윤이 아닌 플랫폼 참여자와 공통의 이익을 지향하는 대승적 자세다. 물론 이런 시도들이 현실적 한계에 부딪히거나 진의를 의심받는 여론이 일기도 한다. 아마존과 애플 등 빅테크 기업은 초기 성장기에 의도의 순수성을 의심받았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비난과 규제, 소송에 시달리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지속적인 추진을 통해 진정성을 사회적으로 납득받는 것뿐이다. 이는 단순히 이미지 홍보 차원이 아닌 기업의 정체성과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로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2. 다양한 시도가 움트는 ‘실패의 안전지대’ 구축

다양하고 창의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경로탐색자가 되려면 임직원 개개인이 사내 앙트러프러너가 돼야 한다.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모두 크리에이터가 필요하다. 크리에이터에게 기업은 두 얼굴의 존재다. 다양한 네트워크, 기존 고객을 통한 테스트 베드, 각종 기술과 설비를 제공해주는 퍼실리테이터인 동시에 위계질서와 내부 규율에 따른 간섭, 조직 내 견제 등을 유발하는 장애 요인이기도 하다. 로버트 버겔만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위계 조직의 문제점을 고려해 경영자는 기존 사업 운영만 담당하고 신사업은 중간관리자에게 일임하라고 권고했다. 그럼에도 위계 조직의 생리를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16 이는 오늘날 사업의 전환과 변신을 시도하는 모든 한국 기업이 당면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가솔린차에서 전기차로, 합성의약에서 바이오 제약으로, 오프라인 유통에서 온라인 유통으로, 메모리반도체에서 시스템반도체로 도약하려는 기업들이 기존의 리더십과 크고 작은 마찰을 빚고 있다. 기존 지배구조를 혁명적으로 뒤집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 가지 대안은 디지털 트윈, 메타버스 등을 이용한 시뮬레이션 센터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제 가상 공간에서는 현실을 방불케 하는 실험이 가능하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실제 시장이 아닌 가상 공간에서 테스트하고 현실에 반영하는 것이다. 적은 비용으로 실패의 위험 없이 파격적인 구상을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다면 대기업의 위험 회피 성향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구글에는 ‘문샷 팩토리’라고 불리는 실패 전문 조직이 있어 임직원의 온갖 아이디어를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17 과거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조직문화’가 마치 무지개처럼 잡히지 않는 꿈이었으나 이제는 이를 구현할 길이 차츰 열리고 있다. 최근 각광받는 초거대 AI의 발달은 이를 더욱 촉진할 전망이다. 문제는 아무리 실험실의 시뮬레이션이라도 결국 현실 시장에 론칭하는 ‘진실의 순간’을 피할 순 없다는 점이다. 기술, 제도적 안전망을 통해 실패의 안전지대를 만들되 이 진실의 순간에는 최고경영자의 결단과 책임 의식이 발휘돼야 한다. 성공한 시도는 최고경영자의 공으로 돌아가고, 실패한 시도는 담당자의 책임이 된다면 혁신 의지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18

3. 기업 외부의 전략 파트너 발굴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환상적인 시너지를 내고 있다. 그 핵심은 절대 지분을 갖되 경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TSMC 역시 칩 설계 회사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되 상호 간 영역을 침범하지 않음으로써 신뢰를 형성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흡수 합병을 통한 내재화 방식을 재고하는 추세다. 삼성전자는 네이버 클로바와의 합작을 통해 AI 반도체를 개발하기로 했다. 현대자동차는 소프트웨어 역량 구축을 지향해왔으나 이는 기존 제조업 스타일의 시스템과 문화와는 조화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19 이에 2023년 8월 현대자동차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전문 스타트업 포티투닷을 인수해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 개발 센터로 활용하기로 했다.20 마이크로소프트와 오픈AI 사례를 참고한다면 포티투닷을 그룹 산하 계열사보다는 독립적인 외부 혁신 센터로서 거리를 두고 시너지를 내는 것이 좋은 전략일 수 있다.

서로 신뢰하고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외부 파트너의 존재가 전략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다. 적합한 파트너를 찾으려 노력하고 현재의 파트너 또는 향후 협력 가능한 파트너를 리스트업한 후 이들과 창출할 수 있는 시너지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특히 조직 내부에서는 찾기 어려운 기능과 역량을 발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기적으로 시너지를 창출하려 서두르는 것은 금물이다. 오히려 외부 업체와의 협력을 통해 작은 시너지, 작은 성공을 거두는 연습이 더 의미가 있다. 자체 개발한 역량도 중요하지만 협력의 숙련은 더 다양한 외부 주체와의 협력을 가능케 하고 이로부터 예기치 않은 반전 스토리가 출현할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4. 단기 성과 지표에 동요는 금물

플랜과 플롯의 가장 큰 차이는 우연성이다. 우연적 요인이 효과를 거두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계획은 단기, 중기별 상세 스케줄과 과정, 목표가 있다. 하지만 플롯은 주인공조차 예상 못한 스토리이며 계획된 반전은 반전이 아니다. 결국 기다림이 필요하고 대부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일본의 괴짜 편의점 돈키호테는 1980년 만들어진 회사로 이미 그 업력이 반세기에 달한다. 압축 진열, 심야 영업, 보물찾기 등 독특한 영업 방식은 초기 생존을 위한 역사적 산물로 독자적인 철학과 경험이 장기간 숙성된 결과다.21 이를 모방한 신세계의 삐에로쇼핑은 2018년 사업을 시작했으나 만 3년이 채 안 돼 모두 문을 닫았다. 돈키호테의 몇몇 외적 요소를 모방한 출발도 조급했지만 중단은 더욱 성급했다.22 실패라고 단정짓기엔 너무 이른 결정으로 새로운 시도에 대한 트라우마만을 남겼다. 학습 효과를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졸속 결정이었던 것이다.

성공을 ‘기간 내 양적 목표 달성’으로 정의한다면 많은 반전 스토리가 도중에 좌초하고 말 것이다. ‘최초의 계획대로 실행한다’는 플랜형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언제, 어떻게 드러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마인드를 가질 필요가 있다. 진정성 있는 비전으로 세상과 겨루며 진정한 의미가 밝혀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끈기를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더욱 악화하기 전에 발 빠르게 손절할 필요가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기준은 경영 성과의 좋고 나쁨이 아닌 회사의 비전과 합치하느냐로 결정해야 한다. 만약 신세계가 추구하는 비전이 재미와 감성이었다면 폐점은 보다 신중히 결정했어야 한다.

지각변동이 수시로 일어나는 디지털 전환기, 플랜형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전략의 실패가 아닌 오히려 전략의 묘미이며 기회다. 비밀 계획으로서 플롯은 감춰진 의도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심지어 전략의 주체조차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지와 무지, 의도와 우연이 뒤섞인 상황에서 전략가는 미궁에 빠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는 경우가 빈번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반전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반전으로 인해 이전의 질서는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지 않는다면 디지털 시대의 전략을 이해하기도, 적용하기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 김은환 | 경영 컨설턴트·전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장

    필자는 경영과학과 조직이론을 전공한 후 삼성경제연구소(현 삼성글로벌리서치)에서 25년간 근무했다. 근무 중 삼성그룹의 인사, 조직, 전략 분야의 획기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현재 삼성 계열사 전체가 사용하고 있는 조직 문화 진단 툴을 설계하기도 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작가 및 컨설턴트로서 저술 활동과 기업 및 공공 조직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2019년에는 저서 『기업 진화의 비밀』로 정진기언론문화상 경제·경영도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격변기를 맞아 기업과 전략의 변화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serike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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