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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전환기 기업 경영의 진화

한국형 ‘양손잡이 3.0’을 찾아서

김은환 | 386호 (2024년 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한국 경제는 ‘양손잡이’ 전략으로 압축 성장을 이뤘다. 대부분의 개도국과 달리 한국은 경제 개발 초기, 기존 시스템에 뿌리내린 농업이 아닌 서툰 왼손인 수출 제조업에 과감히 미래를 맡겨 빈곤의 함정을 극복하고 산업화의 궤도에 올랐다. 이후 1980년대 들어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한국 기업은 양적 효율을 유지하면서 질적 개선도 추구하는 양손잡이식 접근, 즉 패러독스 경영으로 난관을 극복했다. 두 번의 양손잡이 체제를 통해 한국 경제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이런 성공 경험은 현재의 디지털 전환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한국의 IT 기업 등 디지털 섹터는 패러다임과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는 ‘개념 설계’에, 전통 대기업 등 아날로그 섹터는 개념 구현의 솔루션을 창출하는 ‘문제 해결’에 집중해 양손이 각자의 경쟁력을 보다 예리하게 한 후 이를 바탕으로 섹터 간 협업을 추진할 수 있다.



양손잡이 전략의 등장과 진화

기존 사업으로 현재 강점과 경쟁 우위를 지켜가는 동시에 신사업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탐색하는 ‘양손잡이’ 전략은 1990년대 로버트 던칸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교수, 찰스 오레일리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교수 등에 의해 제시됐다.1 꽤 오래전 일이지만 이때만 해도 이미 기술 변화의 가속화는 분명히 감지되고 있었다. 개인 컴퓨터에 의한 정보 혁명, 즉 3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고 인터넷과 모바일이 가세하면서 디지털 전환이 부상하는 때였다. 혁신의 속도에 터보 엔진이 달리는 시기였다. 관리와 혁신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기에 양손잡이는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나 주요 경영 전략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당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보 혁명의 주역으로 추앙받는 빌 게이츠조차도 인터넷의 잠재력을 뒤늦게 알아채는 바람에 기회를 놓칠 뻔했다. CPU(중앙 처리 장치) 혁명으로 컴퓨터 혁명의 심장을 지배했던 전설의 리더 앤디 그로브 인텔 전 최고경영자(CEO)는 인터넷과 모바일의 시대에 길을 잃었다. 그로브의 사례를 정밀 분석한 로버트 버겔만 스탠퍼드대 교수는 그로브 전 CEO가 스탠드-얼론 컴퓨터2 시대의 성공에 안주해 네트워킹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3

한 시대의 패러다임을 연 혁신의 아이콘들조차 빠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유일한 대처법은 신속한 세대교체일까? 상품과 사업의 수명 주기가 10년이면 10년마다, 5년이면 5년마다 다음 세대에 경영권을 넘겨야 할까? 경영이란 종합예술로 일부 스포츠나 예술 분야처럼 20, 30대만 돼도 은퇴해야 하는 영재들의 독무대가 아니다. 전략의 주기가 짧아졌다고 배터리 갈아 끼우듯 젊은 경영자로 교체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경영을 위해서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읽어야 하고, 고객의 심리를 헤아려야 하고, 구성원들의 신뢰를 얻고 비전을 제시하는 등 리더십도 발휘해야 한다. 성숙과 연륜이 요구되는 일인 셈이다. 이처럼 급격한 변화로 인한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는 혼돈의 세상에서 기업은 상호 모순되는 여러 능력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요구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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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양손잡이’ 조직이다. 버겔만 교수는 그로브 전 CEO의 실패담을 바탕으로 조직 내 새로운 역할 분담을 제안한다. 기존의 성공을 유지하고 성과를 극대화하는 역할은 경영진이, 새로운 패러다임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미래 기회의 탐색은 중간관리자가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양손잡이 조직을 구현하는 한 방법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정보 혁명의 여명기에 들어 양손잡이 이론이 등장했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상품·사업·전략의 수명 주기가 제법 길었음을 의미한다. 월트 디즈니, 토마스 왓슨 등 전설적인 경영자들은 모두 회사와 운명을 같이한다고 할 정도로 장기간 재임했다. 이들은 자신의 세계관과 역량을 평생 일관되게 유지했다. 그러나 기술 변화의 가속화와 이에 따른 패러다임 전환으로 인해 사업 및 전략의 수명 주기와 경영자의 생애주기 사이에 괴리가 생기고 있다. 경영자들은 평생을 쌓아 올린 자신만의 역량과 세계관을 부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빈번히 놓이고 있다.

이처럼 양손잡이 전략을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흥미로운 건 한국 경제가 양손잡이 전략으로 압축 성장을 이뤘다는 점이다. 250여 년에 걸쳐 이뤄진 서구 산업화와 달리 한국은 전통적 농업 사회에서 경공업, 중공업, 첨단산업, 서비스업에 이르기까지 상전벽해의 변화를 60~70년 만에 이뤘다. 이런 변화들은 당연히 리더들의 생애주기보다도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 가난한 농촌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세계시장을 겨냥한 제조업 육성에 매진했으며 모직, 제당, 물산을 주축으로 한 삼성그룹의 2세 경영자 이건희 전 회장은 반도체, LCD(액정디스플레이), 이동통신이라는 첨단 영역의 글로벌 리더로 부상했다. 이처럼 압축성장기에 한국은 패러다임 전환에 여러 번 직면했으며, 한국 경제의 성공은 곧 양손잡이 전략의 성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압축 성장은 ‘양손잡이’의 역사

1. 양손잡이 1.0 - 수출 주도 성장 전략

개발도상국의 산업화가 실패하는 원인은 기존의 익숙한 손, 대개는 오른손(기존 사업)이 왼손(신사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자원의 저주’다. 제국주의에 의해 석유 채굴과 정유 설비를 갖춘 자원부국들은 거의 예외 없이 다른 산업, 특히 제조업으로의 전환에 실패했다. 막대한 석유 자원 판매로 이익을 올리는 산유국들은 자국 화폐가치가 높은 것을 선호한다. 그 결과 가뜩이나 미숙한 단계의 제조업은 수출 시장에서 원가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수출 산업을 육성하려면 자국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는 고환율 정책을 취해야 하는데 손에 쥔 석유 판매 이익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저환율이 유지되고 그 결과 제조업은 결코 성장 궤도에 오르지 못한다. 오른손잡이가 평생 왼손을 쓰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자원부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 한국은 대만과 마찬가지로 농업과 생필품 위주의 경공업 기반을 갖고 있었다. 경제 개발 초기에는 수출은커녕 식량 자급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자원의 저주라 할 만한 현상은 없었지만 제조업에 대한 효과는 자원부국들과 마찬가지였다. 고환율을 유지하면 수출 산업을 위한 원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지만 동시에 수입 물가가 오르는 상황이었다. 식량은 물론 원자재 수입 시 일반 국민과 내수 산업 전반의 부담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당시 한국 경제 상황에서 수출 제조업은 검증되지 않은 굴러온 돌일 뿐 기존 시스템에 뿌리내린 농업과 내수 산업이 국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의 정책은 한마디로 기존 생계를 위협하면서 정체불명의 문제아(Question Mark)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른 반발은 당연했고 설득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개도국 대부분이 수입 대체 산업화를 택한 것과 달리 한국은 서툰 왼손에 과감히 미래를 맡겼다.

이 전략의 핵심은 ‘학습’이다. 외국 기업과 경쟁하며 해외시장에서 상품을 팔려면 진짜 경쟁력을 갖춰야만 한다. 수출은 기업을 훈련하는 엄격한 스승으로 기능한다. 정부가 아무리 정책, 금융 지원을 제공해도 기업이 해외시장에서 상품을 팔려면 안일해질 여유 없이 학습에 매진해야 했다. 그러나 수입 대체 노선을 택한 나라의 기업들은 익숙한 내수시장에서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이권 카르텔이 돼 혁신의 동력을 잃어갔다.

반면 서툰 왼손에 과감히 미래를 맡긴 한국의 수출 제조업은 전후 지속적으로 활황세를 보인 글로벌 경제에 힘입어 고속 성장세를 유지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함으로써 비좁은 내수시장에선 상상할 수 없는 성장을 이뤄냈다. 수출 부문이 성장하면서 그 성과가 다른 부문으로 환류하는 채널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고용 증가와 임금 인상, 부품 및 서비스의 하청, 법인세 납부 등 수출 부문의 성과는 가계, 산업, 정부 부문으로 흘러 들어가 부문 간 갈등이 완화되고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한국 경제 양손잡이 체제의 버전 1.0이다. 상충하는 두 손은 상쇄가 아닌 상생의 길을 찾았다. 경제 및 산업 전반에 걸쳐 수출과 내수는 밀고 끄는 협력 체제를 유지했다. 그 결과 한국은 빈곤의 함정을 극복하고 산업화의 궤도에 오르게 된다.


2. 양손잡이 2.0 - 대기업의 패러독스 경영

양손잡이 1.0 전략으로 중진국에 도달한 한국은 1980년대 들어 다시 한번 난관에 부딪힌다. ‘샌드위치’ 또는 좀 더 과격하게 ‘넛크래커’로 표현되는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경쟁력 위기로 효율과 원가 등에서 상당한 개선을 이뤘지만 첨단 기술, 디자인 등 한 차원 높은 경쟁 요인에서는 선진국에 뒤지고 효율, 원가 등 기존의 양적 우위는 후발국에 따라잡히는 상황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 등 국내 대기업 2세 경영자들은 이런 위기를 절감했다. 이에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위기의식을 가장 중요한 화두로 던졌다. 변화의 어려움을 설파하기 위해 이 회장은 당시 직원을 독려하며 “오른손을 묶어보라”는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4

모방 학습을 통해 기존 사업과 기술 격차를 따라잡아 온 한국 기업은 첨단 사업에서 선도적 경쟁력을 발휘하는 단계로 도약해야 했다. 이는 익숙한 기존의 방식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도전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도전을 위해 기존 사업과 역량을 모두 폐기할 순 없는 노릇이다. 기존 사업은 현재의 수익을 올려주는 귀중한 캐시카우이며 강점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형적인 양손잡이의 역설 상황이다. 양적 효율을 유지하면서 질적 개선도 추구하는 이런 양손잡이식 접근을 패러독스 경영이라고 한다. 삼성의 성공 요인은 다각화와 집중, 위계 조직과 빠른 의사결정, 연공질서와 성과주의 등 상충하는 요소들을 입체적으로 융합하는 패러독스 경영이라고 알려져 있다.5 중요한 것은 이런 패러독스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패러독스란 ‘둥근 사각형’처럼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모순적인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어떻게 양손 모두를 능숙하게 쓰며 패러독스 경영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그 단서는 ‘경로창출형 혁신’6 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 기업은 유서 깊은 장주기 산업보다는 신산업에서 새롭게 개발된 단주기 기술 영역에 집중했다. 개인 컴퓨터의 메모리 반도체, 기계식이 아닌 전자 제어식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단주기 영역에서는 오랜 기간 누적된 암묵지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선도 기업과 추격 기업의 격차가 줄어든다. 때론 선도 기업의 기존 역량이 혁신의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신산업 분야의 불확실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의 집적도를 높이기 위해 적층형 D램이라는 파격적인, 당시로서는 무모해 보이는 시도를 감행했다. 당시엔 PC 시장이 어느 정도 성장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컴퓨터는 기업이나 기관이 사용하는 대형 메인프레임뿐이었으며 메모리의 집적도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컴퓨터가 가정의 거실과 책상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핵심 부품인 메모리가 파격적으로 소형화, 효율화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메모리의 소자들을 입체적으로 쌓는 삼성전자의 시도를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우려스럽게 바라봤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오늘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메모리 분야 1위 기업이 됐다. 이건희 회장은 양손잡이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는데 이는 ‘초일류 지향’과 ‘뒷다리론’이라는 두 가지 표현으로 집약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삼성의 ‘초일류 지향’ 슬로건은 “무조건 1등하라”는 마구잡이식 압박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성과를 평가하는 프레임 자체를 바꾸려는 시도였다. 당시 국내 1위에 만족하고 있던 삼성 계열사들에 현 상태는 만족스러운 것이었고, 과감한 위험 감수란 불필요하고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신기술 영역에서 위험한 도전을 벌일 만한 동기와 절실함이 부족했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것처럼 당시 한국은 경제와 산업의 성장이 정체될 중진국 함정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빈곤의 함정을 극복할 때 발휘됐던 ‘헝그리 정신’이 다시 한번 동원돼야 했다. 이를 위한 이 회장의 메시지가 바로 초일류 지향이었던 것이다. 글로벌 초일류가 돼야 한다는 높은 열망을 제시함으로써 현상 유지 또는 현재 성과에서 10~20% 향상이라는 점진적 개선 목표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구성원들이 가진 기존의 성과 평가 프레임을 뒤흔들었다.

이를 동기부여의 프레임 효과라고 한다. 즉 현 상태에 만족할 때보다 불만을 가질 때 의사결정자는 더 위험한 선택을 한다. 실패해봐야 원래의 손실이 좀 더 늘어날 뿐이지만 성공하면 손실을 일거에 만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스크가 증폭된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진국의 함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위험 부담을 부추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존 메모리의 품질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는 적층형 D램을 시도했다가 PC 시장이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거나 기존의 반도체 강자들이 시도하지 않는 새로운 경로를 혼자 걷다가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돌다리도 두드려본다”는 삼성의 기존 경영 철학과는 정반대의 세계관 역전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이 회장의 고심의 메시지가 바로 ‘초일류 지향’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빠뜨려선 안 되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왼손이 과감히 도전을 감행하는 동안 과연 오른손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일정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하며 캐시카우 역할을 하는 기존 사업들은 혁파되고 제거돼야 할 구세력도, 적폐도 아니다. 이 회장은 “뛸 사람은 뛰고 걸을 사람은 걸어라, 제자리에서 쉬어도 된다. 다만 뛰는 사람의 뒷다리를 잡지 말라”는 뒷다리론을 제시했다.7 초일류 지향은 바로 이 뒷다리론과 쌍을 이룸으로써 삼성의 양손잡이 전략을 완성한다.

삼성의 기존 사업들은 안정적 수익을 통해 반도체, 디스플레이, 디지털 통신 등 신사업으로의 도전을 떠받치는 안전망 역할을 했다. 기존 사업 기반이 있었기에 새로운 경로를 창출하는 혁신이 가능했던 셈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은 도전을 벌일 때도, 이후 성공해 글로벌 수준의 사업으로 도약한 이후에도 항상 양손잡이 전략의 문제는 존재했다. 처음에는 인정받지 못한 ‘문제아’를 견제로부터 보호해야 했으며 나중에는 스타 플레이어 사업과 기타 사업 간의 괴리를 막고 일체감을 유지해야 했다. 삼성은 이에 성공함으로써 2세대 양손잡이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디지털 전환기, 양손잡이 2.0의 적용

두 번의 양손잡이 체제가 갖는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양손의 레벨이다. 양손잡이 1.0은 국민 경제 전체를 단위로 내수와 수출 부문이라는 섹터 레벨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양손잡이 2.0에서는 그 레벨이 대기업 단위로 하향돼 캐시카우 사업과 도전적 신사업이 양손 역할을 맡았다. 양손잡이 체제의 구심점도 정부에서 대기업 총수와 그룹 총괄 조직으로 바뀌었다. 두 번의 양손잡이 체제를 통해 한국 경제는 빈곤의 함정과 중진국의 함정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사실상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 이런 성과를 거둔 국가는 전 세계에서 한국과 대만뿐이다.

이런 성공 경험은 현재의 디지털 전환기에도 적용할 수 있다. 기존 사업과 신사업을 양립시키는 전략을 그대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적용하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현재 대기업 그룹이 추진하는 디지털 전환에서도 이런 전략이 관찰된다. 아날로그 사업들로 안정적 경영을 유지하는 가운데 인공지능(AI)과 같은 디지털 신기술 연구와 관련 사업화를 모색하는 별동 조직을 설치하는 것이다. 2023년 말 단행된 삼성전자의 조직 개편에서 본사 차원의 ‘미래사업기획단’과 각 사업부에 ‘비즈니스 개발 그룹’이 신설됐다.8 기존 사업과 신사업을 병행하는 전형적인 양손잡이 조직을 재현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다른 그룹들도 비슷하다. 신세계그룹은 백화점, 이마트 등의 오프라인 사업과 SSG라는 온라인 사업을, 롯데그룹 역시 기존 유통망과 함께 롯데온을 병행하는 옴니채널 전략을 추진 중이다. 현대자동차는 메타버스 개념을 적극 적용해 자동차가 가상 공간 접속을 가능케 하는 스마트 디바이스로 변모하는 ‘메타모빌리티’ 비전을 기존 사업과 병행 추진하고 있다.9

양손잡이 전략의 베테랑으로서 한국 대기업의 향후 행보에 기대를 걸 만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양손잡이 1.0이 2.0으로 진화할 때 그 주체와 구체적 전략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대와 환경이 변하면 전략도 진화할 수밖에 없다. 양손잡이 2.0 전략이 현재의 디지털 전환기에 잘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 마찰점(friction point)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경로 탐색의 어려움이다. 디지털 기술이 동력인 4차 산업혁명에서 산업의 진화 경로는 대안 시나리오를 설정할 수 없을 정도로 예상을 불허한다.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한 인터뷰에서 창업 초기에 주문받은 책들을 일반 차로 운반하면서 “언젠가 우리도 지게차 한 대는 가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 것이 어제 같다고 회상한다.10 아이폰상에서 수많은 앱을 구매할 수 있도록 만든 앱스토어는 모바일 플랫폼 시대를 연 획기적 혁신이었지만 스티브 잡스는 초기에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혁신의 아이콘 잡스조차 스마트폰이 가져올 진정한 변화를 내다보지 못했을 만큼 기술의 미래를 예측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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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려운 일을 해내며 한국 기업이 양손잡이 2.0 전략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새로운 패러다임의 마지막 실현 단계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PC는 스티브 잡스를 필두로 한 실리콘밸리 벤처들의 단순한 기술이나 전략이 아닌 세계관과 가치관을 전복하는 ‘개념 설계’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삼성전자는 개념 설계 단계가 아닌 이 개념이 시장화되는 단계에서 가담했다. 철학이나 비전의 문제가 아닌 얼마나 저렴한 가격으로, 얼마나 작고 효율적인 컴퓨터를 출시할 것인지가 관건인 단계였다. 흔히 한국 기업은 추격에만 능하고 선도형 혁신에는 무능하다고들 하지만 이는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한국 기업은 백지에서 시작되는 개념 설계의 영역이 아닌 제시된 개념을 구체적인 제품과 서비스로 구현하는 최종 단계에 강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삼성전자의 적층형 D램으로 이는 세계 최초의 창의적 시도였다.

파괴적이고 혁신적인 패러다임에 동참하면서도 초기 개념 설계가 아닌 후반기 문제 해결 영역에 집중함으로써 한국 기업은 강점을 살리면서도 근본적 혁신의 성과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백지에서 출발하는 개념 설계가 가치를 독점하고 그 제조를 아웃소싱받는 밸류체인의 후반 영역은 저부가가치라는 통념이 늘 타당한 건 아니다. 적어도 PC를 위한 D램, 스마트폰을 위한 디스플레이와 낸드플래시는 일반적인 부품 하청이라고 볼 수 없다. 이 분야에서 한국 기업은 대체 가능한 부품을 공급하는 여러 업체 중 하나가 아닌 설계 구현에 꼭 필요한 최적의 솔루션 제공자다. 대체 가능성이 극히 낮기에 설계 기업 못지않은 부가가치를 얻는다.

패러다임과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는 기업을 ‘개념 설계사’라고 한다면 개념 구현의 솔루션을 창출하는 기업은 ‘문제 해결사’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문제를 출제하고 후자는 이를 해결한다. 둘은 원청과 하청의 관계라기보다는 한 팀의 파트너다. 둘의 성향과 역량은 크게 다르지만 결합되면 강력한 듀오가 된다. D램, 낸드플래시, 디스플레이 등에 이어 현재도 한국 산업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솔루션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AI의 해결책인 고성능 반도체 HBM(High Bandwidth Memory), 전기자동차의 해결책인 첨단 배터리, 바이오 제약의 해결책인 유전자 가위 등에서 한국 기업은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과시한다.

백지에서부터 그림을 그리는 개념 설계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활약이 미미하지만 한국 기업은 해결사 DNA를 계속 발휘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파트너로 살아남는 양손잡이 2.0 전략을 유지하며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역량의 비교우위론인 셈이다. 해결사 역할에 집중하면서 개념 설계는 바다 건너 스티브 잡스의 후예들에게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밸류체인이 전 세계를 무대로 극세분화되는 세상에서 모두가 백지에서부터 출발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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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잡이 3.0의 모색, ‘검은 머리 잡스’를 찾아서

글로벌 밸류체인이 계속 분화된다면 앞서 제시한 해결에 집중하는 전략은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최근 전 세계적으로 지정학적 리스크가 확산되고 있다. 이에 밸류체인상의 주요 기술이나 산업을 국경 내로 가둬두는 온쇼어링(On-shoring)과 정치군사적 우호 국가로 제한하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이 대두하고 있다.11 여기에 기업 간 경쟁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핵심적 경영 자원을 누군가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언제든지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의 운영체제를 구글의 안드로이드에 의존하고 있지만 구글은 수많은 스마트폰 제조사와 거래하며 최근에는 자체 스마트폰을 개발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런 비대칭적 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과거에 ‘바다’라는 자체 운영체제 개발을 시도한 바 있다. 성공 가능성이 낮더라도 운영체제 의존을 벗어나야 한다는 필요성이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리스크뿐만 아니라 기회를 모색하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있다. 디지털 전환의 방향성을 예측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빅데이터, 메타버스, 블록체인, AI 등 거의 연례행사처럼 들이닥치는 변화의 파장은 과거 개인 컴퓨터가 주도한 정보 혁명이나 스마트폰이 일으킨 모바일 혁명과는 차원이 다르다. 소수의 선택지가 주어지고 그중 하나에 베팅하는 객관식 문제가 아니기에 유망한 신사업을 선택해 역량을 집중하는 전략은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 내부에서 육성하는 사내 벤처 방식도, 유망한 벤처를 인수하는 전략 옵션도 모두 한계가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존 사업과 신사업 간의 양립하기 힘든 세계관의 충돌 때문이다. 이건희 시대에 삼성그룹은 신사업과 기존 사업을 회사나 사업부라는 내부의 경계만으로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손잡이 3.0이 다뤄야 하는 양손은 그 정도로는 제어할 수 없다. 삼성전자에서 파운드리와 팹리스를 동시에 유지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이 대표적인 예다. 자체 팹리스를 보유하고 있는 파운드리에 경쟁 팹리스가 제조를 의뢰할 리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례는 챗GPT다. 개념 설계의 주체와 문제 해결의 주체가 하나의 기업으로 통합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챗GPT를 통해 드러났다. 오픈AI는 잘 알려져 있듯이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50% 지분에 해당하는 막대한 투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의 경영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두 회사 기술 간의 호환성을 확보함으로써 시너지 제고를 도모하는 정도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픈AI를 자회사로 만들지 않는 이유는 개발사의 독립성을 인정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소규모 개발사와 글로벌 빅테크사에 주어지는 기대 수준과 책임의 무게는 비교를 불허한다. 실제로 구글이 부랴부랴 내놓은 챗GPT의 대항마 바드는 출시 직후 저조한 성능으로 소비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더욱이 AI 리스크에 대한 우려가 심화되는 와중에 작은 사고라도 터진다면 소규모 개발사와 달리 빅테크 기업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오픈AI라는 몸집이 가벼운 신인에게 개발을 맡기고 그 성과를 향유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전략이 현명한 이유다.

양손잡이 2.0에서 신·구사업의 동거는 일리가 있었다. 구사업이 안전망을 제공하고 총수의 지원 아래 신사업에 대한 집중 투자가 단행됐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이런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패러다임이 헌것에서 새것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닌 전방위로 무한 발산하는 시대에는 집중점을 찾기 어렵다. 신규 개발 주체는 영원한 아웃사이더로서 탐색을 지속해야 하며 특정 조직에 내재화돼서는 안 된다. 개념 설계사와 문제 해결사는 마치 서로 다른 종족처럼 행동해야 한다. ‘삼성맨’이나 ‘현대맨’처럼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여선 안 되며 서로 분리돼 각자의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양손잡이 1.0이 각 경제 섹터에서 이뤄졌듯이 양손잡이 3.0 또한 양손이 서로 다른 섹터 레벨에서 역할을 분담할 필요가 있다. 국내 대기업의 디지털 전환, 즉 메타버스, AI, 블록체인 등의 신기술을 다루는 방식은 과거 신사업의 내재화라는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한국의 IT 기업 등 디지털 플레이어들은 빠르게 성장하면서 대기업화됐고, 기존 대기업은 실체 이상으로 디지털 플레이어 코스프레를 하는 느낌이다. 서로의 정체성을 보다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섹터는 개념 설계에, 아날로그 섹터는 문제 해결에 집중해 각자의 경쟁력을 보다 예리하게 한 후 이를 바탕으로 섹터 간 협업을 추진해야 한다. 이미 삼성전자와 네이버 클로바가 AI를 위한 파트너십을 추진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역시 소비자 경험을 위해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와, 스마트 팩토리를 위해 3차원 플랫폼 기업 유니티와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이런 흐름이 변화를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양손잡이의 차원이 기업 내에서 기업 간, 즉 섹터 레벨로 상향되면서 양손잡이 1.0 시대와 같이 정부 역할도 부각되고 있다. 다만 과거처럼 수출 전선을 진두지휘하는 직접적 통제보다는 큰 방향을 제시하고 전략적 수주를 통해 자원의 흐름을 조정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스페이스X 재사용 로켓의 수주는 상징적 사례다. 시장 메커니즘만으로 자본이 흐르기 어려운 영역에 대해 대의명분과 매력적인 비전을 개발해 기업들의 혁신 노력을 결집하는 배후 조종자로서의 정부 역할이 필요하다.

한국 기업은 지금까지 문제 해결에 집중하면서 개념 설계를 해외 혁신가에게 위임했다. 그 결과 신·구사업 간의 격차를 줄이고 양손잡이 전략을 실행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의 기획실장은 스티브 잡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검은 머리 잡스’가 필요하다. 전방위로 발산하는 디지털 유니버스를 속속들이 탐사하려면 새로운 개념 설계사들이 국내 다양한 분야에서 많이 배출돼야 한다. 이런 역량과 열망이 충만한 ‘포노 사피엔스’12 라고도 불리는 젊은 세대에 기대를 걸어본다.
  • 김은환 | 경영 컨설턴트·전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장

    필자는 경영과학과 조직이론을 전공한 후 삼성경제연구소(현 삼성글로벌리서치)에서 25년간 근무했다. 근무 중 삼성그룹의 인사, 조직, 전략 분야의 획기적인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현재 삼성 계열사 전체가 사용하고 있는 조직 문화 진단 툴을 설계하기도 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작가 및 컨설턴트로서 저술 활동과 기업 및 공공 조직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2019년에는 저서 『기업 진화의 비밀』로 정진기언론문화상 경제·경영도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격변기를 맞아 기업과 전략의 변화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serike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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