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조선의 청렴 사상과 제도는 어땠나

윗물이 염치 알아야 아랫물도 맑아
집 드나들며 청탁하는 ‘분경’ 금지

김준태 | 353호 (2022년 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조선은 군자의 나라로 알려졌지만 박봉인 관리들은 생계와 더 많은 부를 위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조선의 지도자들은 관리들의 청렴을 지키기 위해 여러 제도를 시행했다. 네거티브 제도로는 권력자의 집에 드나들며 관직을 청탁하지 못하게 하는 ‘분경금지’법, 부정하게 취한 재물을 몰수하는 ‘장오죄’ 처벌 등이 있다. 분경금지법은 실정에 맞지 않아 현실성, 실효성에 맞게 한 차례 개정됐고, 연좌제가 적용되는 장오죄 처벌은 부정에 대해 관용을 보이지 않는 엄격한 제도의 상징이다. 포지티브 방식으로는 청렴하고 부지런한 이상적인 관리를 공모하는 ‘청백리’ 제도가 있다. 청백리의 사례는 케이스 스터디처럼 널리 공유, 학습됐으며 청렴한 삶을 통해 청백리로 이름을 남기겠다는 관리들의 동기를 자극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은 하늘의 이치를 이 땅 위에 구현하는 도덕 국가의 건설을 지상 과제로 삼았다. 그런데 사실 조선이 마냥 깨끗한 나라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도 관리들의 수많은 부정부패 스캔들이 터졌다.

조선이 도덕 국가로 거듭나는 길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 즉 ‘사욕(私慾)’을 꼽는다. 이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도덕에 의해 절제되지 않은 욕망은 인간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악(惡)으로 이끈다. 부귀영화를 탐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한다. 이런 사욕을 왕이나 관리가 품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나라의 안녕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공공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좇게 된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고 복무해야 하는 공직자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는 성리학에서 부정부패의 원인으로 개인의 사욕만을 지적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지도자들은 개인의 양심에만 호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관리들의 수입은 입에 풀칠하기도 벅찰 정도였으며 지독한 가난은 사람을 더욱 부에 집착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얼핏 경제 기반을 닦기 어렵다 하소연하며 주식, 코인 대박 등 ‘한탕’을 노리는 대한민국 풍경과 비슷해 보인다. 사욕이 지나쳐 무리하게 빚을 내 재산을 불리려 하거나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남의 재산에까지 손을 댄 사건들이 연일 뉴스를 통해 보도되고 있다. 그렇다면 군자의 나라 조선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어떤 제도를 만들었을까? 그 원리가 2022년의 대한민국이 도덕 국가로 발돋움하는 지침이 되지 않을까?

‘청렴’의 마음을 지켜라

조선의 사대부들은 치우친 감정을 바로잡고 욕망을 단속함으로써 순수하고 선한 마음의 상태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무자기(毋自欺)’, 경계하고 삼가며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계신공구(戒愼恐懼)’, 혼자 있을 때도 나태하지 않고 더욱 삼가는 ‘신독(愼獨)’ 등의 가르침을 중시했다. 여기에 더해 관리들에게는 특히 ‘염(廉)’과 ‘염치(廉恥)’를 강조했다.1

‘염(廉)’이란 본래 ‘모가 나다’는 뜻이다. 올바르지 못한 것에 대해 모가 나게 대응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염’은 맹자에게 와서 ‘청렴’의 의미로 사용됐는데 맹자는 “얼핏 취해도 될 것 같지만 취해서는 안 될 때 취하면 ‘염’을 해친다”2 라고 했다. 뇌물을 줄 때, “이거 뇌물입니다. 이거 받고 이 일을 이렇게 처리해주십시오”라며 명시적으로 청탁하는 일은 드물다. 받는 사람이 정말 부패하고 탐욕스럽지 않은 이상 부담스러워서 혹은 나중에 문제 될까 봐 두려워서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 비싼 거 아닙니다.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주세요”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드리는 겁니다”라며 접근한다. 처음에는 소액의 상품권이나 할인권, 쿠폰 등 받기에 부담 없는 물품을 제공할 때도 있다. 그래서 받는 사람이 ‘어, 이건 괜찮을 거 같은데’라며 받기 쉬운데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사욕이 개입된 일이다. ‘취해도 될 것 같지만 취해서는 안 될 때 취한’ 것으로, 자기 욕망에 진 것이고 ‘염(청렴)’의 마음가짐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다음으로 ‘염치’라는 단어는 『사자소학(四字小學)』3 의 “예의염치는 네 가지 기둥이다(禮義廉恥 是謂四維)4 ”라는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 마음가짐으로서 ‘예’ ‘의’ ‘염’ ‘치’의 네 가지 덕목을 제시한 것인데 ‘염치’는 이 중 ‘염’과 ‘치’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어떤 일을 하든 그에 따른 도리를 지키고 내 마음이 깨끗하고 떳떳해야 하며, 이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는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꼭 청렴에만 적용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공직자 윤리에 놓고 본다면 ‘내가 올바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즉, 항상 청렴해야 한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염치가 있고, 염치를 알아야 부패에 물들지 않고 부정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항산이 없으면 청렴도 사치?

한데 ‘청렴’과 ‘염치’를 중시했다고 해서 조선 사회가 깨끗했던 것은 아니다. 근검을 실천하기 어렵고 부정부패를 저지르기 쉬운 환경이었기에 더욱 절박하게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우선 구조적인 문제를 들 수 있는데 조선 관리들의 수입이 매우 적었다.

『경국대전』 ‘호전’에 보면 최고위직인 정1품(삼정승)은 연간 중미(中米)5 14섬, 조미(糙米, 현미) 48섬, 전미(田米, 좁쌀) 2섬, 황두(黃豆) 23섬, 소맥(小麥, 밀) 10섬, 명주(明紬, 견직물) 6필, 정포(正布)6 15필, 저화(楮貨)7 10장을 네 번으로 나눠 받았다.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연봉 5000만 원을 넘지 않는 정도다. 가장 낮은 품계인 종9품의 경우에는 조미 8섬, 전미 1섬, 황두 2섬, 소맥 1섬, 정포 2필, 저화 1장으로 500만 원에도 못 미친다. 그나마 조선 초기에는 관리에게 토지 조세를 거둘 수 있는 ‘수조권(收租權)’을 부여하는 과전법이 시행돼 큰 문제가 없었지만 수조권이 사라진 뒤에 관리들은 녹봉만 가지고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웠다. 더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17세기에 연이은 대기근을 겪으면서 이마저도 제대로 지급되지 못했다. 현종과 숙종 연간에는 재정 부족을 이유로 녹봉을 삭감하는 일도 벌어진다. 『숙종실록』에 보면 숙종이 “근래에 녹봉이 매우 박하여 벼슬하는 자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도 힘들다”라고 한탄하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8

게다가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각 관청의 서리(書吏)나 고을 아전에게는 아예 녹봉이 주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탐욕스럽고 나빠서 국고를 횡령하거나 백성의 재산을 갈취한 것은 아니더라도 생계형 비리가 언제든 일어나기 쉬운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백성이 공물(貢物)9 을 직접 바치기 어려울 때 아전이 대신 구해 내주는 것을 ‘방납(防納)’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과도한 수수료를 요구하는 아전들도 있었다. 사사로이 백성의 군역을 면제해주거나 불법 행위를 묵인해 주며 받는 뇌물인 ‘계방(契房)’도 만연했다. 국가의 무책임이 부정부패를 악화시킨 것이다.

무릇 도덕적 의무감만으로 청렴을 요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관리가 공직에 대한 사명감과 윤리 의식이 투철하지 않은 이상, 아니 투철하기가 불가능한 이상, 적어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맹자도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도덕적 마음을 배양하고 지킬 수 있으려면 기본적인 생활 환경이 전제돼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싱가포르가 공무원들에게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줌으로써 우수한 엘리트를 공직으로 유치하고, 청렴성을 높여 깨끗한 정부를 만들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조선은 먹고 살기 힘들 정도의 월급을 주면서, 심지어 아예 주지도 않으면서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으니 청렴하기가 매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재물에 대한 욕심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기 쉽다.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안락하게 살고 싶고 귀하고 비싼 물건을 쓰고 싶지, 허리띠를 졸라매며 가난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하물며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큰돈을 벌지도 못하는 이상 사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부정한 방법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탐욕에는 제한선이란 없으므로 한 번 부정에 물들게 되면 이내 걷잡을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행태는 무능한 리더가 이끄는 시대나 간신이 판을 치고 국정이 혼란했던 시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절정기로 위대한 성군 세종이 다스렸던 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종 8년, 양조(兩朝)에 걸친 중신으로 병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한 조말생(趙末生)의 뇌물 수수 사건이 발각됐다. 김도련이란 인물이 송사에서 유리한 판결을 받기 위해 조말생뿐 아니라 좌의정 이원, 우의정 조연, 개국공신 연사종에게 노비를 바친 일로, 고위급 대신들이 대거 연루된 초대형 스캔들이었다.10 특히 조말생은 다른 사람들의 몇 배나 되는 36명의 노비를 받았는데 여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780관이나 되는 뇌물을 받았음이 밝혀졌다.11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훗날 청백리로 이름을 날린 황희도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처벌을 완화해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12 남원 부사로부터 고가의 선물을 받았다가 자수했고13 관에서 개간한 둔전을 달라고 요청했다가 망신당하기도 했다.14 요컨대 부정부패의 유혹은 어느 시대, 어떤 인물에게든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116


청렴을 위한 제도

따라서 청렴의 윤리를 강조하고 공직자로서의 사명을 되새기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정부패를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이 지도층의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다양한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청렴을 권장하고 부패를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분경(奔競)금지’법 제일 먼저 소개할 것은 ‘분경(奔競)금지’법이다. ‘분경’이란 이익을 좇아 분주하게 경쟁한다는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인사권자나 권력자의 집을 드나들며 관직을 청탁하는 것을 가리킨다. 조선 시대에는 분경을 법으로써 엄격히 금지했는데 『경국대전』 ‘형전(刑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명시돼 있다.

분경한 사람, 즉 이조와 병조의 관리, 제장(諸將)15 , 당상관, 이병방승지(吏兵房承旨)16 ,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 판결사17 의 집에 동성(同姓) 8촌 이내, 외가나 처가의 6촌 이내, 혼인한 가문, 이웃 사람이 아니면서 출입한 자는 곤장 100대에 3000리 유배형에 처한다.

정종 때 처음 거론되고 태종 이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분경금지법을 성종 대에 이르러 성문화한 것이다. 친인척이 아닌 이상 고위급 관료, 인사(人事)•군대•감찰•노비 관련 부처 관리의 집에 아예 드나들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어길 경우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중범죄로 처벌함으로써 청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규정은 지키기가 힘들었다. 해당하는 관리의 집을 매일같이 감시할 수도 없고, 업무상 논의를 위해 방문해야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세종 11년 2월25일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무기 제조를 담당하는 관청인 군기시(軍器寺)의 판사 한온이 업무상 급히 보고할 내용이 있어서 상사인 병조판서 최윤덕의 집을 찾아갔다가 분경을 어긴 죄로 파직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세종이 사정을 알고 면책해줬다지만 업무상의 만남까지 금지함으로써 많은 문제를 낳았다. 만남이 더욱 은밀해지면서 생겨나는 폐단도 있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가면 이 분경금지법은 “도목정(都目政) 전에 이조나 병조의 당상관의 집, 도목정이 끝난 후 서경(署經)을 하기 전에 양사(兩司) 관원의 집에 동성 6촌, 이성 4촌, 혼인을 맺은 집안이 아닌 데도 출입한 자는 곤장 100대에 3000리 유배형에 처한다”18 로 개정된다. 여기서 도목정이란 일 년에 네 번 전조(銓曹)19 에서 관리들의 고과를 심사해 승진, 면직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고, 서경은 관리 임명 시 대간의 동의를 받는 것을 말한다. 즉, 인사행정과 청문회가 이뤄지는 시즌에는 절대로 관련자를 접촉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사에 뇌물이 오가고 부정한 청탁이 이뤄지는 일을 예방하려는 조치였다. 오늘날 대부분 기업에도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다양한 제도가 마련돼 있다. 그러나 실정에 맞지 않는 제도가 있다면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도하지 말고 현실성과 실효성을 따져 개정해야 한다.

장오죄(贓汚罪) 처벌 장오죄란 관리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한 죄로 나라의 재물을 횡령하거나 백성의 재산을 빼앗고 뇌물을 받는 일을 말한다. 조선은 ‘착복한 재물이 80관20 이 넘는 자는 교형(絞刑)21 에 처한다’라는 『대명률(大明律)』22 을 준수했고, 관리가 장오죄를 저지르면 그를 추천한 사람까지 파직했으며23 , 그의 아들은 생원시, 진사시, 문과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했다.24 이미 과거에 합격했더라도 “장리(贓吏)25 아들이나 손자는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한성부(漢城府)•사헌부(司憲府)•개성부(開城府)•승정원(承政院)•장례원(掌隷院)•사간원(司諫院)•경연(經筵)•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춘추관지제교(春秋館知製敎)•종부시(宗簿寺)•관찰사(觀察使)•도사(都事)•수령(守令)의 관직에 제수하지 못한다”26 라고 규정했다. 한마디로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은 모두 맡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엄격하게 연좌를 적용함으로써 부정부패를 저지를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연좌제는 근대 형법의 형사책임 개별화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되살려서는 안 되지만 장오죄를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의지만큼은 본받아야 한다. 부정을 저지른 공직자가 약한 처벌을 받고 뇌물 수수 전력이 있는 정치인이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는 일이 반복되는 오늘날, 이러한 의지가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이 밖에도 조선 왕조는 감찰과 어사 제도 등을 운용해 공직사회의 부패를 적발하고 부정을 단속했는데 이는 현대에도 유사한 제도가 시행되고 있으므로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청백리(淸白吏)27 이상의 제도들이 처벌과 단속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즉 네거티브 방식으로 청렴을 확보하고자 했다면 마지막으로 소개할 제도는 포지티브 방식으로 청렴을 확산하고자 했다. 바로 ‘청백리 제도’다.

청백리란 청렴결백한 관리라는 뜻으로 업무 수행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인품이 고매해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을 말한다. 사심 없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이상적(理想的) 관리라 할 수 있다. 조선은 중종 때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청백리 녹선(錄選)28 을 시작했다.29 그 후 관리의 부정부패를 엄단하고 공직 기강을 확립하고자 할 때마다 왕의 지시에 따라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대상자를 물색했다.30 그렇게 후보자 명단이 추려지면 의정부에서 재상들이 최종 선발하는 형식을 취한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명한 청백리로는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을 들 수 있는데 이원익은 평생 변함없는 청렴함으로 존경받았다. 만년에 인조가 승지를 보내 이원익의 안부를 묻게 하면서 “요즘 기력이 어떤지, 사는 집은 또 어떠한지 내가 자세히 알고 싶으니 가서 살피고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원익을 만나고 돌아온 승지가 “원익은 이미 극도로 쇠약해 기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돌아앉거나 누울 때조차 다른 사람이 부축해줘야만 했습니다. 그가 사는 집은 몇 칸 초가집에 불과해 바람과 비를 제대로 가리지 못했습니다. 한 두락의 밭도, 두어 명의 노비도 없어서 그저 온 식구가 월봉(月俸, 월급)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형편입니다”라고 보고하니 인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40년 동안 정승을 지냈으면서 몇 칸짜리 초옥에 살고 비바람도 가리지 못한다니, 그의 청백한 삶은 고금에 없던 일이다. 내가 평소 그를 존경하고 사모한 것은 그가 이룬 공덕 때문만은 아니니 바로 이러한 맑고 검소한 삶의 자세를 여러 신하가 본받는다면 백성들이 곤궁하게 될까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의 검소한 덕행은 또한 높이 표창하여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31

그러면서 인조는 새로 집을 지어 내려주도록 했는데 이원익은 완강히 사양했다고 한다.32 그런데 인조의 발언을 보면 이원익의 청렴함에 감탄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 외에도 이원익의 행동을 널리 알려 모범으로 삼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인조뿐 아니라 영조가 이원익에 대해 “벼슬이 대신에 이르렀는데도 그처럼 청빈하다니 듣기에 매우 감동스럽다”33 라고 말하는 등 후대 왕들은 이원익을 청렴의 본보기로 삼곤 했다. 이원익을 학습해 청렴 문화를 확산하고 공직 사회의 분위기를 바로잡겠다는 목표로 일종의 케이스 스터디를 공유한 셈이다. 또한 청백리를 존경하고 칭송하는 문화를 정착시킴으로써 ‘나도 청백리가 돼 역사에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겠다’는 동기 유발의 효과도 가져올 수 있었다.

119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이상으로 조선의 조정과 사대부들이 청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청렴을 방해하는 요인은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요청했는지, 제도적으로는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펴봤다. 그런데 한 가지, 오해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청렴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부귀를 멀리해야 하고 누구나 청빈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일찍이 공자는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누리지 않아야 한다”34 라고 했다. 또 “무언가를 얻었다면 그것이 의로운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35 라고 했고, “의롭지 못하면서 부귀한 것은 나에게 뜬구름과도 같다”36 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인즉 정당하게 얻은 부귀와 이익은 괜찮다는 뜻이다. 청렴해야 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이원익처럼 비바람도 못 막는 집에서 빈곤하게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저 사사로운 욕망으로 부정이나 비위를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사치와 향락에 빠지거나 탐욕에 물들지 않도록 경계하면 되는 것이다. 정당하고 떳떳한 방법이라면 얼마든 이익을 추구해도 되고, 재산을 축적해도 된다. 이렇게 본다면 청렴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청렴은 개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청렴한 태도를 높이 평가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하고, 부정부패가 용납되지 않는 환경이 조성돼야 실현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리더가 모범을 보이고 분위기를 이끌어야 한다. 세종은 앞서 소개한 김도련의 뇌물 공여 스캔들이 일어나자 “대신들이 이러한 일을 저지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으니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이는 옛날 정치가 잘되던 세상에서는 절대로 없었던 일이다. 무릇 위에서 마음을 바르게 하면 대신이 보고 감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 지금 이 사태는 내가 부족한 탓일 것이다”라며 반성했다. 그리고 부정부패를 막고 관리들의 청렴을 배양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왕으로서 윤리와 원칙을 준수하는 모범을 보였고 관대하면서도 엄격하게 조정을 이끌었다. 뇌물을 받은 부패한 관리 황희가 청백리 명재상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도 세종이 리더로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도덕적 측면, 사회의 제도적 측면 못지않게 청렴의 실현을 위해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 등이 있다.


DBR mini box

정약용이 말하는 ‘청렴’의 의미

조선의 유학자 중에서 청렴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다. 그는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모두 18개 항목i 에 걸쳐 청렴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정약용은 “청렴은 목민관의 근본 의무로 모든 선(善)의 원천이며, 모든 덕(德)의 뿌리이다. 청렴하지 않으면서 목민관 노릇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천명했다. 백성과 직접 마주하는 고을 수령에게 청렴은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가치이며 반드시 지켜야 할 사명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수령은 무엇보다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 정약용은 5항에서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누가 비밀스럽게 하지 않겠냐만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 아침이 되면 이미 드러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후한 때 명재상 양진(楊震)의 일화를 소개했다. 어떤 이가 아무도 모를 테니 괜찮다며 뇌물을 바치려 들자 양진은 “하늘이 알고(天知), 귀신이 알고(神知), 그대가 알고(子知), 내가 아는데(我知) 어찌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겠는가”라며 단호하게 물리쳤다. 뇌물을 받게 되면 내 마음은 더 이상 떳떳할 수가 없다. 또한 뇌물을 준 사람의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상대방은 언제고 뇌물 수수 사실을 폭로할 수 있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뇌물을 차단하는 것이 현명하다. 뇌물뿐 아니라 사소한 선물도 조심해야 한다. 6항에서 정약용은 “거저 받는 물건은 비록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은정(恩情)이 이미 맺어졌으니 사사로움이 행해지게 된다”라며 경고했다. 무언가를 선물로 받게 되면 상대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되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공적인 일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렴을 의무로만 생각한다면 꾸준히 지속하기가 힘들다. 정약용은 2항에서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이니 이런 까닭에 크게 욕심을 내는 자는 반드시 청렴하다. 청렴하지 못한 사람은 그 지혜가 짧아서 그렇다”라고 말했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훌륭한 업적을 남겨 그 이름을 역사에 기록하고 싶다면, 즉 눈앞의 이익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하고 다른 이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청렴은 이를 위한 좋은 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9항과 17항이다. 정약용은 “상관이 탐욕스러우면 백성이 오히려 살아갈 길이 있지만 청렴하면서 각박하면 살아갈 길이 막힌다”라고 했다. 그는 “청렴한 사람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드무니 사람들이 이것을 병통으로 여긴다. 책임은 자기가 두텁게 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적게 지우는 것이 옳다. 청탁이 행해지지 않으면 가히 청렴하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도 전했다. 오로지 청렴만을 목적으로 삼다 보면 가족을 힘들게 하고 다른 사람을 숨 막히도록 만들 수 있다. 원칙을 지키되 융통성 있고,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타인에겐 관대한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이 정약용이 말하는 ‘청렴’의 길이다.


  • 김준태 |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akademie@skku.edu
    이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