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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5. 한국의 바이오 투자 및 엑시트

바이오 투자는 안 보이는 것을 믿게 하는 것
기술성 평가의 핵심은 기술 아닌 차별화

신정섭 | 324호 (2021년 07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2014년 이후 바이오는 IT를 제치고 벤처 업계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받는 업종이 됐다. 하지만 바이오 투자 유치 및 상장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다음에 유념해야 한다. 첫째,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해야 한다. 산업 특성상 자산 대부분이 눈에 안 보이는 ‘무형자산’의 형태로 돼 있기 때문에 신뢰가 기업 존재 가치의 전제가 된다는 어려움이 있다. 둘째, 기술성 평가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다. 기술 자체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시장의 동종 제품들과 차별화가 가능할지, 경쟁사 대비 비교 우위는 있을지, 중도에서 개발이 멈출 위험은 없는지 등을 증명할 근거들을 차근차근 쌓아가야 한다. 셋째, 상장이 최종 목표인지, 목표를 위한 과정인지를 알아야 한다. 과정일 뿐이라면 공모가 등 중간 성적표에 집착하기보다는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 넷째, 의사소통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어려운 바이오 기술 용어나 외국어, 약자 등이 아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투자자들에게 기업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국내 자본시장에서 바이오가 약진하고 있다. 2014년 이후 바이오는 IT를 제치고 벤처 투자 업계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받는 업종이 됐으며 현재까지 투자 규모로 전 업종을 통틀어 1위를 지키고 있다. 상장 현황을 봐도 다른 업종과 확연히 구분된다. 지난 5년 새 코스피 시가총액 기준 톱 10에 바이오 기업 2곳이 새롭게 진입했을 뿐만 아니라 코스닥 시가총액 기준 톱 10에서 바이오 기업 비중이 50%에서 70%로 증가했다. 코스닥 전체 시가총액 중에서도 바이오의 비중이 4분의 1에 달한다. 지난해 상장한 SK바이오팜의 공모 금액이 9000억 원에 이른 것도 바이오가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로 기대를 모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상적으로 코스닥에 상장하는 바이오 기업들의 공모 규모는 최근 3년간 300억 원을 웃돌고 있으며 상장 시 기업 가치도 평균 2000억 원을 넘어섰다.

바이오 기업의 특징 중 하나는 타 업종 대비 높은 기업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점이다. 평균 PER(Price Earning Ratio, 주가수익비율)이 90이 넘어 다른 업종에 비해 10배 이상 높다. 물론 제약 바이오 기업의 절반 정도가 흑자를 내지 못하고 흑자 기업들도 당기순이익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주가수익비율이 정확한 기업 가치를 반영한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 기업이 높은 미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어 보인다. 2020년 한국거래소에서 발표한 KRX BBIG K-뉴딜지수를 구성하는 미래 성장주도 산업 Battery(2차 전지), Bio(바이오), IT(정보통신, 인터넷), Game(게임) 중에서도 바이오에 대한 성장 기대감은 매우 높은 편이다.

국내 바이오 투자와 엑시트 환경의 이해

현재 벤처캐피털의 바이오 투자는 여전히 활기차다. 2010년 이후 보건복지부에서 출자한 바이오 펀드 3개가 모두 우수한 성과를 내면서 국내 바이오 투자 흐름을 주도해 왔다. 2005년 국내에서 선도적으로 바이오 펀드를 만들어 운용한 KDB캐피털의 경우 진단 기업인 지노믹트리에 투자해 42배의 수익을 냈고, KB인베스트먼트 역시 지난 10년간 투자한 십여 개의 바이오 기업을 통해 각각 10배 이상의 투자 수익을 거뒀다. 한국투자파트너스의 경우 신약 개발 기업인 유바이오로직스 투자 수익률이 IRR 기준 84%에 이르며,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는 메디포스트, 마크로젠 등 바이오 투자 성과를 바탕으로 이름에 걸맞게 벤처캐피털 업계의 선두로 도약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LSK인베스트먼트와 같이 바이오에만 투자하는 전문 벤처캐피털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2005년에는 한 자릿수에 불과했던 바이오 투자 심사역 역시 2015년 이후 급격히 늘어나 현재는 100여 명에 달하며 업계 곳곳에 포진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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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수익보다 전략적 시너지를 중시하는 전략적 투자자(Strategic Investor, SI)의 참여도 늘어났다. 2000년 초 250억 원 넘게 초기 바이오 벤처에 지분을 투자하는 등 바이오 투자의 원조 격인 SK는 자회사인 SK바이오팜을 통해 뇌전증 치료제를 끝까지 개발해 FDA 허가를 받고 미국 시장 등에 출시하는 등 글로벌 제약사로 도약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2018년부터는 한국, 미국, 중국, 프랑스 벤처 기업 8개 사에 전략적 투자를 하고, 스핀오프를 통해 혈액 제제 전문 기업인 SK플라즈마, 백신 전문 기업인 SK바이오사이언스를 설립했으며, 아일랜드 소재 CMO(의약품위탁생산) 업체를 인수한 SK팜테코를 통해서는 연관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제약사 중에서는 유한양행의 행보가 주목할 만하다. 2015년부터 25개 사에 약 2500억 원을 투자했다. 피투자사 가운데 제노스코는 4세대 폐암 치료제를 개발, 글로벌 제약사인 얀센에 약 1조5000억 원 규모의 기술 이전을 성사시켰고 임상시험도 순항 중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 바이오 업계에서 회자되기 시작한 오픈 이노베이션의 실질적인 성과를 창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바이오 벤처가 초기에 연구개발을 시작하고, 국내 제약사가 바통을 이어받으며 후기 개발을 맡은 뒤, 계획 제품의 가치를 높여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 이전하는 ‘한국형 오픈 이노베이션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모델은 바이오 벤처인 레고켐바이오가 처음 기획해 녹십자, 한미약품 등과 협업함으로써 초석을 다져온 바 있다.

2000년만 해도 바이오는 전체 벤처캐피털 투자의 2%에 불과했으며, 기업공개 사례도 없었다. 2000년 2월 ‘황소보다 비싼 500만 원짜리 (유전자 이식) 생쥐’ 등 연구 성과를 앞세운 유전체 정보 기업 마크로젠이 국내 바이오 벤처 사상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하며 26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다음을 받쳐줄 기업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2005년 제대혈줄기세포로 알려진 메디포스트가 다시 코스닥 상장의 포문을 열고, 이어 바이로메드(현 헬릭스미스), 바이오니아, 크리스탈지노믹스가 기술특례 상장을 통해 증시에 입성하긴 했지만 조류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2010년까지도 바이오는 벤처캐피털 투자의 5% 이하로 머물러 있었다. 미국에서 바이오 비중이 2005년 이후 줄곧 30%가량을 유지해온 것을 보면 한국 시장에서 바이오가 얼마나 소외돼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시기 투자업계의 관심은 온통 IT에 쏠려 있었고 바이오는 엔터테인먼트와 더불어 ‘우회상장’의 주된 타깃이었다.

그러던 바이오가 이제는 전 업종 중 가장 많은 투자를 받으며 2019년 이후 1조 원이 넘는 투자 금액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코로나19가 창궐한 2020년 3월에는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바이오 역시 주식시장에서 급락세를 면치 못했고 벤처 투자 역시 위축됐다. 하지만 이후 바이러스 유전자를 직접 검출할 수 있는 PCR(유전자 증폭) 진단키트가 국내에서 빠르게 개발돼 전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등 소위 ‘K-방역’이 부각되면서 바이오 투자는 전년 수준으로 복귀했을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성장세를 보이게 됐다.

하지만 국내 바이오 투자 환경을 둘러싼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투자 금액과 투자 유치에 성공한 기업의 수가 비례하지 않는다. 투자를 받는 기업에만 더 많은 돈이 몰리는 소위 ‘스노우볼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다.

아울러 시리즈A(기업이 의미 있는 규모의 첫 번째 외부 투자를 받는 라운드) 단계에서 100억 원 이상을 받는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비상장 바이오 벤처들의 기업 가치가 치솟은 것도 장기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최대주주의 경영권 지분에 상대적으로 많은 의미를 둔다. 기업을 계속기업 관점에서 보는 게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 투자 유치 과정에서 투자는 많이 받아야 하는데 최대주주 지분이 너무 희석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다 보니 기업 가치가 덩달아 올라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부 분야에서는 유럽의 상장사나 미국의 유사한 기업보다도 기업 가치가 높은 국내 비상장 기업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의 자본시장 규모를 고려할 때 이런 지나친 고평가는 향후 바이오 투자 엑시트의 발목을 잡는 질곡이 될 수 있다. 상장 이후 비상장 시절보다 기업 가치가 낮아지는 기업들이 상당수 나타날 것으로도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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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장의 문턱을 넘기 위한 바이오 벤처들의 과제

현재 국내 바이오 기업이 코스닥에 상장하는 경로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수익성과 매출액이다. 그러나 당장의 수익은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성장성이 높다고 평가되는 기업들을 위한 상장의 문도 열려 있다. 대표적인 게 기술평가특례고, 최근에는 성장성 추천 및 테슬라 방식도 도입됐다. 3가지 모두 적자 기업이라도 특정 요건에 부합하면 상장을 해준다는 측면에선 같지만 약간씩 차이가 있다.

먼저, 성장성 추천은 주관사가 성장성을 평가해 추천하는 방식이다. 책임이 주관사에 전가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상장이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하지만 주관사는 일반 청약에 대해 6개월간 풋백옵션(공모주 투자자들에게 공모가의 90% 가격으로 주식을 사주는 환매청구권) 제공 의무를 지게 되므로 깐깐한 기준으로 기업을 추천하게 된다. 2019년 이후부터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고바이오랩, 셀레믹스 등이 이 방식으로 코스닥에 입성했다. 이와 함께 만성 적자 기업임에도 상장 이후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한 테슬라의 사례를 본떠 어느 정도 외형(매출)을 갖춘 회사들의 상장 기회를 열어주는 테슬라 방식이 있다. 바이오 기업 중 리메드, 제테마, 바이오다인과 같은 헬스케어 기업들이 이 방식으로 상장했다.

기술평가특례 상장은 2005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대부분의 바이오 기업을 코스닥 무대에 데뷔시킨 산파역이다. 도입 당시 미국의 나스닥 시장과 일본판 나스닥인 마더스 시장을 참고해 만들어진 제도로 알려진 이 기술평가특례 상장은 이제 해외에서 역으로 벤치마킹하는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 이 제도의 핵심은 전문 평가기관의 기술평가다. 2곳의 전문 평가기관에 의한 평가 결과가 최소 A와 BBB가 돼야 예비심사 청구를 할 자격이 생긴다. 1 한 군데서 AA라는 높은 점수를 받았더라도 다른 평가기관에서 BB를 받으면 곧장 탈락한다.

코스닥 시장에는 1년에 보통 70∼80개 기업이 상장하는데 현재 이 중 약 4분의 1이 특례 상장이다. 2018년까지는 바이오 기업들의 독무대였으나 최근 소부장기업 등의 비중이 늘면서 이제는 바이오가 특례 상장 기업의 7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2018년과 2019년에는 각각 15개, 14개에 이르던 바이오 기업의 특례 상장 수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급감하기 시작해 2020년에는 8개, 올해는 현재까지 4개에 불과하다. 2020년 국내 바이오 기업들의 잇따른 임상시험 실패, 기술 이전한 약물의 반환 등이 이어지면서 심사 기준이 엄격해진 것으로 보인다.

투자 유치나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이 명심할 점이 몇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임상시험 데이터 등에 대한 일부 기업의 아전인수식 해석이 누적되면서 투자자들의 신뢰는 이미 상당히 훼손된 상태다. 이는 바이오산업 특성상 자산 대부분이 눈에 안 보이는 ‘무형자산’의 형태로 돼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제품이 시장에 나올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며 그때까지는 프로젝트의 내용이 해석이 어려운 데이터 형태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데이터에 대한 신뢰가 기업 존재 가치의 전제가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의미와 가치를 투자자나 상장 심사 당국이 보려면 기업이 데이터 등 진실을 왜곡하거나 숨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명심할 점은 ‘기술성 평가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기술성 평가는 기술 자체에 대한 판단이기보다는 이 기술이 제대로 개발이 된다고 했을 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이다. 어차피 바이오 기술은 매우 다양하고 그 쓰임도 제각각이라 ‘무엇이 좋다, 나쁘다’ 판단도 어렵고 판단의 실익도 없다. 결국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술 및 제품들과 차별화가 가능할지, 개발 역량이 잘 갖춰져 있어서 중도에서 멈추진 않을지, 시장에 나갔을 때 시장은 크고 경쟁 제품 대비 비교 우위는 있을지 등등이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이를 판단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그래서 평가자들은 신청 기업에 근거와 검증을 요구한다.

이에 따라 상장 준비는 곧 근거와 검증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대표적인 게 바로 기술 이전 실적이다. 기술 이전은 기술을 사는 쪽의 입장에서 봤을 때 고위험의 투자다. 통상 기술의 대가로 지불하는 금액보다 향후 기술을 받아서 이후의 개발에 투입해야 하는 금액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기술을 사들인 라이센시(Licensee)의 기회비용을 감안할 때, 기술 이전이 성사됐다는 것은 기술에 대한 제법 확실한 검증이자 보증 수표라 볼 수 있다. 신약 등 바이오 제품의 개발 기간은 매우 길어서 기업은 여러 단계의 중간 목표(마일스톤, Milestone)를 설정한다. 업계의 용어를 빌리자면 한 단계, 한 단계 통과함에 따라 그 기술은 개념이 검증(POC, Proof of Concept)된다. 바이오 기업은 마일스톤을 달성해가면서 성장하는 독특한 사업 모델을 갖고 있으며, 이 단계마다 기업 가치는 높아지게 된다.

세 번째로, 상장이 우리 회사의 최종 목표인지, 목표를 향한 과정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상장은 사람에 비유하면 ‘성인식’에 해당한다. 상장 이후 본 게임이 시작된다. 회사는 비로소 인재 확보, 자금 조달 등에 대한 부담을 덜고 비전으로 삼은 사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상장의 시기가 빠른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상장사로서 기초 체력을 갖추고 있는지, 성인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 점검하고 상장을 추진해야 한다.

상장 과정에서 공모가 산정이 이슈가 되는 경우도 있다. 공모가가 기대보다 낮게 결정돼 상장을 포기할지 저울질했던 회사들도 여럿 봤다. 하지만 투자 유치의 핵심은 타이밍이다. 중간 지점에서의 성적표라고 볼 수 있는 공모가는 그저 참고 사항일 뿐이다. 누가 최종 목적지까지 더 빨리 갈 수 있는지가 바이오 사업의 관건이다. 부족한 공모 자금을 메꿀 유상증자의 기회는 상장 후에도 많다. 밸류에이션은 자금 조달 시 지분 희석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 상장 추진에 있어 결정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는 아니다. 높은 밸류에이션에 집착해 봐야 자존심 이상의 실익은 찾기 어렵다.

네 번째로, 상장을 계획하는 기업들이 간과하기 쉬운 점이 바로 ‘의사소통 역량’이다. 바이오 기술에 대한 설명서를 보면 태반이 외국어나 약자로 쓰였다. 투자자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정보다. 1차적으로는 기관투자가의 눈높이에서 투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산출로 바뀌는지, 비즈니스 모델은 무엇인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야기해야 한다.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상장 후 개인투자자의 눈높이까지 염두에 두고 사업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학회에서 쓰는 어려운 전문 용어를 그대로 옮기는 건 기술력은 인정받을지 모르겠으나 투자자와 멀어지고 자본시장에서 고립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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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한 맞춤형 투자와 엑시트 전략

바이오산업의 특징은 로컬 시장과 글로벌 시장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돼 있다. 하나의 신약이 출시되면 국가별 인허가 정책, 약가 정책, 보험 정책, 특허 정책 등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국가에 걸쳐 비교적 비슷한 시장점유 양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고객인 사람을 기준으로 미시적으로 보면 시장은 성, 인종 등의 생물학적 차이에 의해 굉장히 세분화되고 있다. 개인별 유전적, 생리적 특성에 따라 시장이 쪼개지다 보면 궁극적으로는 ‘1인 1시장’의 모습으로 진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먼저 현실에서 구현하고 있는 분야가 의료이며 환자의 유전적 특성을 진단, 치료 등에 반영하는 정밀 의료가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필자가 투자한 회사 중 바이오산업의 변화 흐름에 맞춘 전략으로 빠르게 성장한 회사로 ‘지니너스’가 있다. 지니너스는 사람의 유전체 정보를 분석하는 바이오 벤처로 암 환자의 유전 정보 분석을 통해 의사들이 적절한 치료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한 암 조직을 떼어내지 않고도 혈액을 통해 비교적 쉽고 정확하게 유전자를 선별할 수 있는 액체생검(Liquid Biopsy)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이 회사는 창업 3년 만에 코스닥 상장의 문을 두들길 정도로 성장했으며 2021년 6월 코스닥 기술성 평가를 통과해 연내 상장을 목표로 프로세스를 진행 중이다. 이처럼 짧은 기간 내 엑시트를 목전에 두게 된 까닭은 창업 단계부터 자금 조달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하고 계획하던 사업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창업 준비 단계부터 투자사의 지원을 받았고 창업 직후, KB인베스트먼트가 참가한 중소기업부 정책사업 TIPs 프로그램을 통해 초기 투자를 받았다. 이어 4개월 후에는 70억 원을 투자받아 80억 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고, 1년 반 후에는 160억 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를 받았다. 이를 발판으로 성장한 지니너스 사례는 바이오 투자에 있어 세 가지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

첫째, 기획 창업이 나타났다. 사실 기획 창업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미 십여 년부터 나타나서 특히 미국에서는 일상화되고 있는 모델이다. 이는 교수 등 창업가가 경험에 대한 부담을 덜고 기술 개발 및 사업화에 주력할 수 있도록 벤처캐피털, 대학 등 기획사가 처음부터 창업에 참여하는 모델을 통칭한다. 미국에는 서드록벤처스(Third Rock Ventures)와 같이 기획 창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벤처캐피털이 등장해 활발히 활동한 지 오래다. 벤처캐피털이 대학이 보유하고 있는 특허 기술을 양도받아 벤처를 설립하고, ‘EIR(Entrepreneur in Residence, 거주창업자)’ 2 를 CEO로 영입해 지속적으로 투자하면서 회사를 키우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그동안 한국의 경우 벤처캐피털이 기업을 지배하는 데 여러 제약 요건도 있었고 투자심사역의 전문성과 경험 등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바이오 분야에서 기획 창업 모델이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변화가 시작됐다. 역량 있는 투자심사역들이 속속 충원되고 벤처캐피털 간 경쟁이 심화될수록 이러한 모델은 점점 더 많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 투자 규모가 커졌다. 2000년 전후 바이오 벤처에 대한 투자 금액은 투자 회사별로 3억 원을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 2010년까지도 바이오 기업이 한 라운드에서 50억 원 이상을 투자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2015년 이후 투자 규모가 확연히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상장사나 상장을 눈앞에 둔 기업의 Pre-IPO 단계에서만 100억 원 이상의 투자금이 몰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리즈B나 시리즈A 등 초기 단계에서도 100억 원이 넘는, 소위 세 자릿수 투자가 빠르게 늘어갔다. 바이오 투자 성과가 가시화되면서 시장 참여자가 증가했다. 아울러 ‘코스닥 시장 바이오주는 개미들의 놀이터’라는 속설이 무색하게 자산운용사 및 기관투자가들도 바이오주를 포트폴리오에 편입하기 시작했다. 상장사들의 주가가 높아지자 자연히 투자자들은 비상장 벤처에까지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후기 단계 투자를 위한 투자사 간 경쟁도 치열해졌다.

이에 따라 창업 여건은 크게 좋아졌다. 자연히 교수, 의사, 기업 연구원 등 기존에 창업을 주저하던 연구자들의 창업도 늘었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합세로 초기 단계 투자가 주목을 받으면서 투자 규모는 더욱 커지게 됐다. 물론 이는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한 수십 개의 바이오 벤처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 훨씬 더 많은 벤처가 자금 조달을 못해 계획한 일정대로 사업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여전히 시리즈C와 상장 이후에는 미국이나 유럽 바이오 벤처와 경쟁하기에 충분한 투자금을 유치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차이는 자본시장의 규모와 성공 경험이 축적된 정도가 다르다는 데서 기인한다. 하지만 확실히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돈이 없어 미국의 바이오 벤처와 경쟁하기 어렵다는 말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적어도 시리즈A 정도의 초기 단계에서는 그렇다.

셋째, 상장까지 걸리는 기간이 짧아졌다. 2000년 전후, 약 500개 이상의 바이오 벤처가 한국에서 태동했다. 이들 1세대 바이오 벤처 중 IPO에 성공한 소수 기업을 살펴보면 코스닥 상장까지 통상 12년 이상의 기간을 인내했다. 상당수가 2015년 기술특례 상장이 활성화된 뒤 상장사 타이틀을 달았다. 하지만 2014년 이후 창업한 기업 입장에서는 창업에서 코스닥 상장까지 걸리는 시간도 대폭 줄어들게 됐다. 2015년 창업한 개발전문회사(NRDO, No Research Development Only)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는 한국 나이로 다섯 살에 코스닥 상장사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달게 됐다. 앞서 소개한 지니너스가 상장에 성공할 경우 네 살이 된 회사가 상장사가 됨으로써 이 기록을 앞당기게 된다. 1세대 선배 기업들의 사업 경험과 그들이 배출한 인력들이 전수되면서 시행착오가 줄어들고 학습 효과가 나타나는 모습이다. 우리나라 바이오 벤처에 대한 글로벌 기업들의 평판과 신뢰가 올라가면서 기술 이전(라이선싱 아웃) 거래가 이뤄지는 것도 한몫을 했다. 코스닥 시장의 문이 기술 벤처들에 더 활짝 열린 것도 주된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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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후 바이오 벤처 창업이 매년 300개 사를 넘는 등 바이오 벤처 붐이 다시 일고 있다. 수익 모델 역시 현실화돼 가면서 글로벌 라이선싱 성과가 잇따르는 모습이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핵심 역량에 집중하고 전략적으로 아웃소싱을 강화하는 추세와 맞물린 것도 있지만 한국 기업들의 과학기술 역량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플랫폼 기술을 갖춘 일부 바이오 벤처는 단순히 라이선싱 아웃 모델이라는 금과옥조에서 벗어나 해외 바이오 기업으로부터 기술을 사 오거나 M&A를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성장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바이오산업의 질적 변화를 이끈 동인은 기술특례 상장 등 전향적인 상장 제도의 도입 및 운영이었다. 아직 M&A가 활성화되지 못했던 산업 환경에서 IPO가 거의 유일한 투자 회수 구조였기 때문이다. 이 제도가 있었기에 바이오 기업들이 동맥경화에서 벗어나 투자금의 선순환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앞서 바이오 투자에 뛰어든 VC들의 투자 성과가 가시화되면서 재무적 투자자가 양적, 질적으로 성장했고, 여기에 전략적 투자자의 시장 참여까지 활성화됐다. 이제 바이오 벤처들이 적어도 초기 단계에서는 자금 걱정 없이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구도가 마련된 만큼 앞으로는 새로운 수익 모델을 개발하고 투자 회수 경로를 다변화하는 다양한 기업이 출현하길 기대해 본다.


신정섭 전(前) KB인베스트먼트 CIO(최고투자책임자) dictyo88@gmail.com
신정섭 전 KB인베스트먼트 CIO는 서울대 미생물학과 학사와 석사 과정을 졸업한 뒤 한솔기술원 소속 연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국내 바이오 벤처 1세대로 꼽히는 마크로젠에 입사해 기획 파트에서 근무했고 이후 KB인베스트먼트에서 바이오 투자를 담당했다. 벤처투자본부장, 최고투자책임자(CIO) 등을 거쳤고 현재 바이오 전문지 히트뉴스에서 바이오 투자 전문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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