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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Mini Case Study: 엡손

고객 눈으로 보니 “아하, 이런 기술 필요”
위기 닥칠 때 ‘파괴적 혁신’ 답을 찾다

이병주,장윤정 | 261호 (2018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엡손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고객의 니즈에서 답을 찾았다. 잉크 카트리지 교체 비용을 부담스러워하는 고객들을 위해 잉크 탱크를 탑재, 한번 잉크 충전으로 수천 장 출력이 가능한 무한 잉크젯 프린터를 내놓았고 다양한 소재에 무늬와 색감을 입히길 원하는 니즈에 발맞춰 섬유용 디지털 프린터를 개발했다. 이처럼 고객들의 니즈를 좇아 자신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잘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남들은 모방할 수 없는 제품을 개발하게 됐다. 결국 기술을 빛나게 해주는 건 고객인 셈이다.


“패션은 아날로그적인 산업이 분명하죠. 하지만 디지털 기술을 통해서 훨씬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면 더 선명한 무늬를 만들 수 있고, 값싸고 손쉽게 제작할 수 있어요. 또 과거에는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표현이 가능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패션의 성공에 중요한 요소이자 우리 회사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디자이너들이 자기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디자이너들이 그들의 창의성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며, 그로 인해 고객들은 과거에는 못 보던 옷을 입는 즐거움을 경험하도록 할 것입니다.”

2017년 2월 뉴욕 패션위크(Fashion Week)에서 낯선 인물이 연설을 했다. 패션위크는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펼쳐지는 국제적 패션 이벤트로 다음 시즌에 유행할 패션 트렌드를 보여주는 자리. 뉴욕 패션위크는 밀라노, 파리, 런던과 함께 세계 4대 패션위크 중 하나로 그 규모가 가장 크다. 그런데 내로라하는 패션 업계나 연예계, 또는 예술 분야의 인사들이 모여드는 이 자리에서 일본의 IT 기업인 엡손(Seiko Epson Corporation)의 우스이 미노루 사장이 패션 산업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겠다고 공언했다. 뉴욕 패션위크에서 3년째 개최한 패션 행사(Epson Digital Couture)에서 우스이 사장이 직접 손님들을 맞이했다.

다양한 산업에서 잉크젯 혁명을 시도
엡손은 섬유용 디지털 프린터를 개발해 시장에 내놨다. 이 프린터를 사용하면 염색으로는 불가능한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와 색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제 디자이너 혼자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독창적인 패션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이날 패션행사에 나온 디자이너 에린 페더스턴(Erin Fetherston)은 소규모 디자이너 브랜드의 고충을 토로하며 프린터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객들은 점점 더 독창적인 걸 찾고 있어요. 모두 더 다양하고 더 독특한 제품을 원합니다. 예전 같으면 저처럼 작은 브랜드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도전이었죠. 각 고객에게 그들이 원하는 디자인을 만들어주면서도 마진을 남기며 비즈니스를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엡손의 프린터가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는 얘기였다. 페더스턴은 2005년부터 뉴욕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운영해 왔다. 규모가 작은 브랜드이다 보니 소수가 원하는 독특한 디자인을 제작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도저히 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 섬유 프린팅 기술은 어떤 무늬의 천도 저렴하게 만들어내 줘 소수의 고객이 원하는 옷을 디자인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심지어 섬유 프린팅 기술은 디자이너의 상상력을 넓히기도 한다. 대개 디자이너들은 시중에 나와 있는 재료를 먼저 떠올린 후 옷 디자인에 들어간다. 자연스레 섬유 재료의 특성 때문에 디자인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섬유 프린팅 기술은 거의 모든 재료에 상상 가능한 무늬를 입힐 수 있다. 디자이너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천을 실제로 디자인에 이용할 수 있는 셈.

영국의 신예 디자이너 리처드 퀸은 디지털 프린팅을 패션에 적극 활용해 주목받고 있다. 2016년 런던에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한 그는 비록 경력은 짧지만 제1회 ‘영국 디자인을 위한 여왕상(the Queen Elizabeth II Award for British Design)’을 받았다. 2018년 제정된 미래가 유망한 디자이너에게 주는 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처럼 전도유망한 퀸의 창작 활동 중에서 많은 부분이 스튜디오에 있는 엡손 섬유 프린터를 활용한 패턴 연구다. 다양한 소재에 독특한 무늬의 패턴을 디자인해 인쇄하는 과정에서 그에 걸맞은 패션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경제성도 디지털 프린팅의 또 하나의 이점이다. “프린터를 활용했을 때 좋은 점은 유통업체의 다양한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 있다는 거죠. 대부분의 매장은 자신들에게만 배타적으로 공급하는 디자인을 원해요. 섬유 프린터 덕분에 저는 거래하는 매장마다 그들의 요청사항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소비 매장마다 그들이 원하는 고객지향적인 디자인을 만들어줄 수 있죠.”

얼마 전까지도 엡손은 패션업계와 직접 소통하지 않고 기술만 공급했다. 2000년대 초반 이탈리아의 로버스텔리(Robustelli)라는 회사가 엡손에 찾아와 섬유인쇄기 개발에 엡손의 기술을 사용하고 싶다고 제안했고, 2003년 섬유인쇄용 프린터 모나리자가 출시됐다. 그 후 엡손은 로버스텔리사와의 협업을 통해서 패션산업을 간접적으로 지원해 왔다. 하지만 수년간 패션산업 고객들의 엡손 잉크젯 기술에 대한 필요성과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느끼고 2016년 로버스텔리사를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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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서 깨달은 것, 강점을 지렛대로 삼아 고객을 만족시킨다
엡손이 패션 산업처럼 IT와 멀어 보이는 분야에서 새로운 고객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은 사업영역 확대와 다양화를 통한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엡손 역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 이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엡손은 핵심 기술을 활용해서 다양한 산업 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원래 엡손은 세이코 시계의 부품업체로 출발했다. (DBR minibox ‘엡손은 어떤 회사인가?’ 참고.) 1964년 세이코 시계가 도쿄올림픽 공식 기록측정기로 채택되자 측정된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 프린터를 개발한 것이 엡손의 주력 사업이 됐다. 시계에 들어가는 액정 부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LCD 기술을 발전시켰고, 한때 중소형 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LCD) 모듈로 커다란 이익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엡손의 사업이 대부분 직격탄을 맞았다.

TFT-LCD 부품 사업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금융위기로 전방 산업인 전자제품 소비가 감소하고 경쟁 격화로 LCD 가격은 급격히 떨어졌다. 더욱이 당시 엡손의 주요 고객이었던 모바일폰 제조업체가 어려워지자 엡손의 매출이 하락했다. 결국 막대한 투자와 지속적인 경쟁이 불가피한 TFT-LCD 부품사업을 2010년 4월 소니에 매각했다. 매출 비중이 가장 큰 프린터 사업 역시 어려움에 봉착했다. 당시 엡손의 프린터 사업은 개인 고객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는데 금융위기로 소비심리가 위축되자 개인들의 소비가 감소했다. 직접적으로 프린터 판매도 줄었지만 소모품인 잉크 판매가 급격히 줄어든 게 더 심각했다. 프린터 사업의 수익모델은 싼 가격에 프린터를 팔고 소모품인 잉크를 비싸게 팔아서 이익을 내는 것이었다. 모든 프린터 회사가 이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했다. 그런데 소비심리가 가라앉자 비싼 정품 잉크를 사지 않고 비정품 잉크를 사용하는 고객이 늘어났다. 이런 현상은 미국이나 유럽보다 아시아 국가에서 특히 심하게 나타났다. 이에 따라 2005년 1조5000억 엔을 넘던 매출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1조 엔 이하로 떨어졌고, 2008년에는 처음으로 영업이익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공교롭게도 2008년은 우스이 미노루 사장이 취임한 해다. 그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회사를 맡아서 회생을 위해 절치부심했다. 우선 전사적으로 원가 절감에 돌입했다. 심지어 프린터나 프로젝터에 들어가는 케이블의 길이까지 줄였다. 핵심 이외의 사업은 정리했다. 사업부 내에는 잘 팔리지 않는 제품도 많았다. 가령 프린터사업부에서는 레이저프린터도 만들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엡손은 잉크젯 원천 기술을 가지고 있는 회사다. 레이저프린터는 외부 기술을 들여와 생산하는 제품. 프린터 사업을 하니까 레이저프린터도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제품을 개발했지만 핵심이 아닌 제품이 잘 팔릴 리 없었다. 이런 사업을 모두 축소하고 정리했다. 이 같은 구조조정 비용 때문에 순이익에서 1113억 엔의 거대한 손해를 봐야 했다.

이와 같은 회생 노력 후에 2009년 향후 사업 방향을 결정하는 비전 ‘SE15(2015년의 세이코 엡손)’를 선포했다. 강점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의 고객에 집중하고, 핵심 사업을 강화하며, 축적된 역량을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하자는 게 골자다. 한마디로 말해서 강점을 지렛대로 삼아서 고객을 만족시키자는 얘기였다. 단적인 사례가 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의 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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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이 원하면 무슨 이유가 있어도 만들어낸다… 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
잉크젯프린터 사업의 골칫거리는 소비자들이 정품 소모품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상당수 아시아 국가 소비자들의 경우, 정품 토너를 쓰지 않고 토너를 충전해서 썼다. 프린터 제조업체는 기기보다 잉크 카트리지나 토너를 판매해서 높은 수익을 올려야 하는데 비정품 소비가 늘어나다 보니 당연히 이익이 곤두박질쳤다. 시장에서 잉크젯프린터는 카트리지를 없애고 잉크통을 단 무한 잉크 프린터로 개조돼 팔렸다. 잉크가 다 닳으면 잉크통에다 해당 색상의 잉크를 부어주면 되는 것. 비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는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많이 사용됐다.

엡손은 이런 비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 시장에서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무한 잉크 프린터로 변형되는 제품 중에 엡손 제품이 가장 인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비정품 잉크 프린터를 판매하는 매장들은 무한 잉크로 개조할 프린터로 엡손 제품을 추천했다. 무한 잉크 프린터를 조금 오래 쓰다 보면 프린터 헤드가 망가져서 색이 번지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재미있게도 엡손 프린터에서는 헤드 문제가 별로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 시행착오 끝에 알아낸 사실이었지만 엡손 기술을 알고 보면 이 같은 강점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엡손이 최초 개발한 마이크로 피에조(Micro Piezo) 잉크젯 기술은 헤드에 열을 가하는 감열(thermal) 방식과 달리 물리적인 힘에 의해 잉크가 분사됐기 때문. 따라서 오래 써도 헤드의 성능이 감소되지 않아 굳이 교체할 필요가 없었다. 비정품 매장들이 무한 잉크 프린터를 만들 때 엡손 제품을 추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무한 잉크 프린터는 엡손의 강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카테고리였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무한 잉크 프린터 개발이 타당한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시아 각국에서 엡손 직원들이 모여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무한 잉크 프린터를 가장 많이 쓰는 인도네시아 시장부터 아시아 각국을 조사했다. 한국에서는 현재 한국엡손 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대연 차장(당시 직급)이 참여했다.

“프린터 사업이란 게 기기에서는 손해를 보고 소모품으로 돈을 버는 거니까, 이 제품은 게임 룰을 뒤집는 전략이었어요. 그렇지만 고객들이 원하는 거니까 회사 내부에서는 해보자는 분위기가 컸습니다. 다만 기존 상식을 뒤집는 것이니까 철저히 준비하기로 했어요. 다른 프린터의 매출 감소를 무릅쓰고 시작하는 것이니만큼 꼭 성공시켜야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대만, 한국을 오가며 비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를 개조하는 매장을 방문해서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 사용자들을 찾아다니며 불만을 조사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에 대해 불만이 많다는 것을 알아냈다. 가장 많은 불만은 잉크가 새는 문제였다. 개조된 제품은 외부에 잉크통을 만들어 호스로 연결하는데, 여기서 잉크가 자주 샌다는 거였다. 또 호스가 굳으면서 잉크가 공급이 안 되는 문제도 빈번하다고 했다. 또 다른 불만은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공식 서비스를 받을 수가 없어서 추가 비용이 적잖이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싼값에 프린터를 쓰려고 했는데 몇 번 쓰지 않고 고장 나니 수리비로 돈이 더 들거나 새로운 프린터를 사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재미있었던 점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택배 서비스가 좋지 않아서 프린터를 개조하려면 이 제품을 들고 다녀야 하는데 그게 번거롭다는 불만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개조 제품에 대한 불만이 매우 높았고, 잉크 값이 비쌌기 때문에 무한 잉크 프린터에 대한 니즈는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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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즈는 충분했지만 제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가격에 내놓아야 할지 등등 구체적으로 상품기획을 해야 했다. 일단 각국을 돌며 소비자 조사를 했다. 프린터 업계의 상식을 뒤집는 기획인 만큼 프로젝트 멤버들은 신나게 일했다고 김대연 부장은 전한다. “일본 본사와 아시아 담당 매니저들이 모여서 공동 작업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미팅을 할 때였어요. 멤버들이 저녁도 거른 채 밤 12시를 넘겨서까지 회의를 하고 그랬죠. 배고픈 줄도 몰랐어요. 정말 재미나게 일했습니다.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았고 일이 끝이 없었지만 모두들 즐거워했습니다.”

고객들의 숨은 니즈를 파악하고, 어떻게 고객가치를 전달할지 치열한 고민이 계속됐다. 소비자조사와 소비자 관찰(Ethnography 에서 유래한 소비자 관찰 기법)이 이어졌다. 이를 통해 무한 잉크 프린터를 구매하는 데 소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속성들을 일일이 찾아냈다. 더불어 다중속성모델(Multi-attribute model)을 활용해서 제품의 적절한 가격대를 계산했다. 2년에 걸쳐서 상품기획을 하다 보니 이전에 몰랐던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가 우리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어요. 우리 회사는 금융위기 이후에 핵심 역량을 가지고 있는 잉크젯에 주력했습니다. 전략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었죠. 그런데 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가 잉크젯 제품과 경쟁하는 게 아니고 레이저프린터 고객을 빼앗아 오는 제품이지 뭡니까. 우리 제품을 갉아 먹을까 봐 걱정했는데 말이죠.”(김대연 부장)

이렇게 2010년 말 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 L100과 L200이 출시됐다. 헤드의 내구성이 강한 엡손 기술에 딱 맞는 제품이었다. 인쇄량이 많은 고객을 대상으로 제품이 팔려 나갔고, 레이저 프린터 시장의 소비자들을 뺏어 오게 됐다. 그러자 다른 프린터 회사들도 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를 뒤늦게 출시했다.

엡손의 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 개발은 지배적인 기업이 스스로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시도해서 성공한 매우 이례적인 사례다. 파괴적 혁신이란 하버드경영대학원의 클레이턴 크리스텐슨(Clayton M. Christensen) 교수가 창시한 개념으로, 후발기업이 저기능 저가격을 원하는 고객으로 이뤄진 틈새시장에 침투한 후 기술을 지속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주력시장에서도 선도 기업을 밀어내는 것을 말한다. 값싼 일본 자동차가 미국 자동차 틈새시장에 침투한 후 품질을 향상시켜 자동차 시장을 장악한 경우나 할인점이 백화점을 밀어낸 사례가 이에 해당된다.

선도기업이 파괴적 혁신에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장 규모가 작아서 자원을 할당하기 어렵고, 자사의 주력 제품에 대한 자기 잠식(Cannibalization)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스텐슨 교수는 지배적인 기업이 파괴적 혁신을 하려면 독립 조직을 설립해서 기존 조직의 정치적 영향력을 차단하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사실 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는 기존 프린터사업부에서 개발했다. 시장 규모도 크지 않았고 기존 제품 잠식에 대한 우려가 있었음에도 개발에 이견이 없었다.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건 저렴한 본체만이 아니라 프린터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적은 제품이다. 결국 이 결정은 옳았다. 오늘날 엡손의 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는 확고한 제품 세그먼트로 자리 잡았고, 엡손의 잉크젯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레이저프린터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고객의 눈으로 기술을 보자 안 보이던 고객이 늘어나, B2B 사업의 확대
이처럼 엡손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답을 고객에게서 찾았다. 고객의 눈으로 제품을 보고, 고객의 머리로 기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객 입장에서는 프린터 내부에 무슨 기술을 쓰는지, 프로젝터가 어떤 원리로 빛을 내보내는지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양질의 인쇄가 잘되면 됐고, 프로젝터를 쓸 수 있는 곳에 제약 없이 쓸 수 있으면 됐다. 고객의 눈으로 제품을 바라보자 안 보이던 고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쇄를 하는 모든 사람이, 더 나아가 향후 인쇄를 할 수 있는 모든 잠재고객이 눈에 들어왔고, 프로젝터를 쓸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이렇게 엡손의 위기 돌파 전략은 다양한 분야의 기업 고객을 개척하는 것이 됐다. 위기 이후 엡손은 잉크젯 기술, 3LCD 프로젝터 기술, 센서 및 로봇 기술 등을 활용해서 산업용 제품 고객을 넓혀가고 있다. 가령, 과거 프린터 사업은 다른 프린터 제조회사와 마찬가지로 주로 사진이나 문서를 인쇄하는 개인과 기업 고객을 위해 제품을 판매했다. 당연히 가정에서 쓰는 소형 프린터와 사무실에서 대량 인쇄를 하는 데 필요한 프린터 생산에 집중했다. 그러나 엡손은 기술력으로 기존에 집중하지 않았던 새로운 고객들의 니즈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앞에서 언급한 섬유산업의 경우 직물을 인쇄할 때에는 색이 옷감에 잘 달라붙어야 하고 세탁을 잘 견뎌야 한다. 이를 위해 염색 기술자들은 승화성 염료나 산성 염료, 또는 반응성 분산 색소를 넣는다. 또 광고판을 제작하는 인쇄업자들은 친환경 솔벤트를 잉크로 사용한다. 그래야 PVC 필름에 잘 붙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엡손은 잉크 원료와 관련된 고객의 다채로운 니즈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엡손의 마이크로 피에조 잉크젯 기술은 헤드에 열이 가해지지 않기 때문에 잉크의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다양한 잉크를 적용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엡손은 이 밖에 중소 제조업자들의 니즈도 눈여겨봤다. 소규모 업체들은 자신들의 제품에 라벨을 붙일 때 빨리 마르는 수성 레진이나 자외선(UV) 잉크를 쓴다. 그래야 다양한 매개체에 빠른 인쇄를 할 수 있기 때문. 엡손은 이에 적합한 라벨용 프린터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미국의 유명한 서퍼(Surfer)인 레어드 해밀턴(Laird Hamilton)은 커피 제조업체인 레어드 슈퍼푸드를 설립했는데 전시회에서 우연히 엡손의 라벨 프린터를 보고 곧바로 구매하기도 했다. 갑자기 주문이 늘어나 상품에 라벨을 일일이 손으로 붙일 수도 없고 주문을 하자니 제품이 너무 다양해서 힘들었는데 프린터를 보자마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직감했다는 것이다.

엡손은 오랫동안 시장점유율 1위를 지켜오던 프로젝터 사업에서도 고객을 늘려나가고 있다. 그간 프로젝터는 주로 기업, 학원 등에서 발표나 강의용으로 사용됐다. 고객들이 프로젝터를 쓰는 이유는 한 사람의 컴퓨터에 있는 내용을 여럿이서 커다란 화면으로 보며 공유하기 위함이다. 만약 밝은 곳에서도 여러 사람이 정보의 손실 없이 커다란 화면을 볼 수 있게끔 한다면 프로젝터는 충분히 어떤 분야에서건 사용될 수 있었다. 이에 엡손은 밝은 환경의 상점이나 쇼핑몰 등에서도 프로젝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제품을 개발했다. 특히 3LCD(적색, 녹색, 청색 3개의 LCD를 통해 화면을 구현하므로 한층 선명하고 밝은 컬러를 구현하는 것이 특징) 기술을 원천 개발했는데, 이 기술은 다른 회사 제품에 쓰이는 DLP(Digital Light Processing) 기술에 비해 더 밝고 선명한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다. 여기에 고객들이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도록 원가절감 노력을 지속한 결과, 가격과 차별화된 경쟁력을 모두 갖추게 됐다. 또 손가락으로 화면을 조작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디스플레이 기술을 개발해서 학원에서 화이트보드 기능으로 수업의 몰입도를 높여주거나 쇼핑몰에서 매장 고객에게 정보와 재미를 제공할 수 있게 했다. 거대 화면을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해 멀티 프로젝터 디스플레이의 자동 색상 교정 기술도 개발했다. 실제로 2017년 8월 세종문화회관은 건물 외벽에 프로젝터를 설치해 다양한 작품을 상영, 볼거리를 제공하는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대형 FPD(평판 디스플레이)로는 거대한 건축물 전체를 꾸밀 수 없으므로 엡손 멀티 프로젝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엡손이 압도적인 시장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처럼 기술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장을 지속적으로 개척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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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이 원하는 기술 고도화로 없어서는 안 되는 회사가 되자… 마이크로 피에조 기술
잉크 등 소모품을 팔아 수익을 올리던 프린터 사업에서 발상의 전환이 된 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엡손의 프린터 헤드가 내구성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또 패션, 광고 등 다양한 산업에서 쓰이는 산업용 프린터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도 엡손의 기술력으로 다양한 잉크 원료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 바로 마이크로 피에조 기술이 엡손의 프린터 사업 혁신을 가능케 한 셈이다.

엡손은 1970년대 말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를 개발해 시장을 장악했다.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는 비유하자면 타자기와 비슷한 기술로 탄소 리본에 충격을 가하는 방법으로 글자를 인쇄하는 초기 기술이다. 엡손은 1980년대 PC가 등장하면서 개인을 위한 프린터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시끄러운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가 아닌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과 1984년 등장한 것이 압전소자를 활용한 피에조 방식의 잉크젯프린터다.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 가격이 10만 엔이었던 반면 이 제품 가격은 49만 엔으로 결코 대중적인 제품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100V의 큰 전압을 가지고도 잉크를 밀어내는 힘이 충분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큰 전압으로 구동하는 회로 때문에 덩치도 크고 가격도 높아 고객들이 찾는 제품은 아니었다. 같은 해 HP는 레이저프린터를 개발했고, 캐논은 구조가 간단하고 비용 절감에도 유리한 감열(thermal) 방식의 잉크젯프린터를 출시했다.

엡손은 레이저프린터와 비교하면 기술이 뒤지고, 경쟁 잉크젯프린터에 비해서는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다. 엡손의 프린터 사업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빠졌다. 이때 엡손은 레이저프린터나 감열 방식의 잉크젯 기술을 뒤따라 가는 대신 기존의 피에조 잉크젯 기술을 개선하기로 결정했다. PC를 사용하는 새로운 고객들이 값이 싸면서도 내구성 좋은 제품을 원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현 사장인 우스이 미노루가 개발을 이끌었다. 고객 눈높이에 맞게 가격을 낮추려면 작은 원가절감은 무의미했다. 획기적인 혁신이 필요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던 중 우연한 기회에 해결책이 다가왔다. 필립스가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의 액추에이터(구동장치)로 한 소자를 제안했는데 이것을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가 아니라 잉크젯에 적용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



이 소자를 채용해서 새로운 헤드를 만들어냈고, 30V의 전압에서 1μm를 움직이는 마이크로 피에조 방식을 개발했다. 1989년 개발의 실마리를 잡은 후 1993년에 가서야 마이크로 피에조 기술을 적용한 잉크젯프린터를 첫 출시했다. 성능을 높이면서도 소재를 저렴한 걸로 바꿔서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마이크로 피에조 기술은 전류에 반응한 피에조 소자가 수축돼 기계적인 동작을 보이며 잉크 방울을 분사하는 기술. 감열 방식은 열이 공기 방울을 만들면서 잉크를 분사한다. 이 때문에 열에 의해 헤드가 손상되며 화학적 변화에 민감한 잉크 원료를 사용하지 못한다. 반면 마이크로 피에조 기술의 경우 헤드 성능이 반영구적으로 지속돼 고객에게 내구성이 튼튼한 제품을 제공할 수 있다. 또 화학적 변형이 없어서 고객의 의도에 따라 잉크 원료의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다. 다만 마이크로 피에조 방식은 감열 방식에 비해 복잡해서 제작하기가 힘든 편이다. 그러나 엔지니어가 힘들수록 고객은 더 편해지는 것이 아이러니한 진실이다. 만들기 쉬운 간단한 기술은 결국 어떤 부분에서 고객을 불편하게 한다. 한 가지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다른 부분에서는 빈틈이 생기기 쉽기 때문. 반면 엔지니어가 힘들게 문제를 해결할수록 고객은 편해진다.

결국 마이크로 피에조 기술 개발에 성공한 것도 이 기술을 고객이 원하는 수준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노력 때문이었다. 이처럼 엡손은 오랫동안 고객 관점에서 핵심 기술을 갈고 닦으면서 축적해 나가고 있다. 마이크로 피에조 기술을 기반으로 여러 분야의 고객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처럼 프로젝터 사업에서는 3LCD 기술을 기반으로 고객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한 혁신을 지속하고 있다. 로봇 솔루션 사업은 재미있게도 엡손의 시계 조립생산을 자동화하기 위해서 1983년 처음 만들어졌다. 한 번 기술을 개발하면 고객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술을 지속 발전시키는 엡손의 특징은 산업용 로봇 분야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수정 압전((壓電) 방식을 적용한 독자적인 포스 센서 기술을 원천 개발한 이래, 스카라 로봇은 2017년 세계 시장점유율 30%로 경쟁사들과 큰 격차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고객의 니즈와 환경에 최적화할 수 있는 다양한 라인업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소형수직다관절(6축) 로봇은 에너지와 공간 절약을 위해 소형화와 경량 설계를 추구하며 세계 최초의 슬림 폴딩 암 구조를 개발해 차별화된 고객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엡손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고객에게 눈을 돌렸다. 그때마다 고객은 답을 줬다. 엡손이 프린터와 프로젝터의 원천 기술을 개발하고 계속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고객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었다. 잘하는 것에 집중하고, 이걸 기반으로 제품을 혁신하다 보니 남이 따라 하거나 모방할 수 없게 됐다.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회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방향은 고객이 제시한 것이었다. 즉, 고객이 기술을 빛나게 하고 위대하게 만들었다.


DBR mini box: 엡손은 어떤 회사인가?
엡손의 정식 명칭은 세이코엡손주식회사(Seiko Epson Corporation)로, 1942년 정밀 시계 제조회사인 세이코사의 투자를 받아 시계 부품 제조회사 다이와 쿄고로 시작했다. 1959년 세이코사의 스와 공장을 인수하면서 스와세이코사로 이름을 바꾼다. 1964년 도쿄올림픽 당시 공식 시계로 세이코의 타임키퍼가 채택되자 스와세이코사가 세운 자회사 신슈세이키에서 측정된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 프린터 개발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68년 세계 최초의 미니 프린터 EP-101을 출시했다(EP는 Electric Printer의 약자). 이후 후속 제품으로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는 프린터를 출시했다. 상징적 모델명인 EP와 자손이란 의미의 SON이 합쳐져서 EPSON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1979년부터 신슈세이키에서 출시한 모든 프린터에 EPSON이라는 브랜드를 붙였고, 1982년 회사 이름도 엡손주식회사로 변경했다. 그리고 1985년 스와세이코사와 합병해 현재의 세이코엡손주식회사가 출범하게 됐다.

프린터에 대한 폭발적 수요 증가로 시계 부품보다 프린터 사업이 더 번창하게 됐는데, 1979년 출시된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는 미국 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며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 1993년에는 잉크젯프린터의 핵심 기술인 마이크로 피에조(Micro Piezo) 기술 개발에 성공, 초고속 고품질 인쇄 시대를 열며 세계적인 프린터 기업으로 명성을 굳히게 됐다.

프린터 이외에도 엡손은 1970년대부터 다양한 액정 패널에 대한 연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세계 최초의 포터블 컬러 LCD TV, LCD 비디오카메라 뷰파인더 등을 출시했다. 이러한 기술력을 축적해서 프로젝터에 활용되는 HTPS LCD 칩(3LCD 기술)을 개발하게 됐고, 1989년에는 최초의 LCD 프로젝터 VPJ-700을 출시했다.

또 1982년에는 엡손의 정밀 시계 조립을 자동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립 로봇을 개발해서 시계 생산에 사용했다. 이 로봇이 제조업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상용화하기로 결정, 이듬해 스카라 로봇 SSR-H 시리즈를 내놨다.

이후 엡손은 프린터, 프로젝터, 시계, 로봇 등의 사업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한국엡손주식회사는 1996년 10월 세이코엡손의 현지 법인으로 설립됐다. 이후 1998년 합작 파트너였던 삼보컴퓨터의 프린터 사업부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2011년에는 로봇 비즈니스를 개시하면서 한국에서도 프린팅 솔루션,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산업용 로봇 솔루션 등의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엡손의 기술은 ‘쇼쇼세이(省小精, Sho Sho Sei)’를 특징으로 한다. 에너지를 적게 들이고, 작고, 정밀하다는 뜻으로 엡손 기술의 DNA이자 기술적 강점의 원천이다. 먼저 쇼(省, Sho)는 고효율(Efficient)을 통한 스마트 테크놀로지 구현을 추구한다. 이를 통해 엡손은 네트워크의 연결성, 사용의 편리성, 신뢰할 수 있는 품질의 제품을 제공한다. 또한 쇼(小, Sho)는 초소형(Compact) 기술로 에너지 절약, 공정의 효율적 혁신, 제품 및 서비스의 최적화를 통한 환경친화적 접근을 추구한다. 마지막으로 세이(精, Sei)는 초정밀 기술을 통한 생산성 향상, 정확하고 정밀한 제품 개발과 차별화된 고객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기술을 기반으로 엡손은 5개 분야에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프린팅 솔루션 사업에서는 개인용, 비즈니스용 프린터와 산업용 프린터, 포스 프린터, 라벨 프린터, 종이재생기인 페이퍼랩 등을 생산하고 있다.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사업에서는 3LCD 프로젝터, HTPS LCD 패널 및 스마트 글라스 등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웨어러블 제품에서는 시계를, 로봇솔루션 사업에서는 스카라 로봇 등 다양한 로봇 제품과 반도체 장비인 IC Handler를 생산하고 있다. 마이크로 디바이스 사업에서는 쿼츠 부품, 전자제품용 반도체 등을 생산하고 있다.

2016년 엡손은 고객가치를 혁신하기 위해 새로운 장기 기업 비전 Epson25를 발표했다. Epson25는 2025년까지 10년간 앞으로 엡손이 혁신해 나아갈 방향을 담고 있다. Epson25는 엡손의 고효율, 초소형, 초정밀 기술을 통해 사람, 사물, 정보를 연결하는 시대를 만들고 엡손의 핵심 사업 영역인 잉크젯(프린팅 솔루션),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웨어러블, 로봇 분야 총 4가지 영역에서 혁신을 이뤄내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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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이 기술을 더욱 빛나게 한다
인터넷의 발달,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 환경의 도래로 제조업체 사이에 설계 등 핵심적인 기능만 보유하고 나머지 기능은 외주화하는 ‘수평 분업’이 유행이 됐다. 엡손은 이런 유행과는 정반대로 수직계열화된 비즈니스 모델을 유지하고 있다. 원천 기술 연구, 핵심 부품 개발, 제품 개발 및 생산, 판매 및 서비스 등 제품 생산의 모든 기능, 고객에게 전달되는 대부분의 프로세스를 엡손에서 스스로 해결하고 있다. 제품의 설계와 제작에 고객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에 대해 한국엡손의 김대연 부장이 목격담을 전해준다.



“필리핀 공장에 갔을 때였어요. 프린터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부품을 직접 찍어내기 위해 금형을 만들고 있더군요. 이런 부품은 외주 제작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다 만드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어요. 제품에 들어가는 주요 부품은 작은 것도 허투루 보지 않는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아이디어와 사업 모델을 중시하는 시대에 엡손이 아직까지도 지속적인 프로세스 개선과 생산성 혁신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도 더 나은 고객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다. 전 세계 어느 엡손 공장을 가든지 한결같이 프로세스 개선 활동을 중시한다. 방법론도 바꾸지 않고 전통적인 생산 도구를 그대로 쓰면서도 매일 개선안을 내고 있다. 이처럼 엡손의 경영은 예스럽다고 할 만큼 현대 경영의 유행과는 동떨어져 있다. 수평분업화 시대에 수직통합을 고수하고 남들이 사업모델을 그릴 때 생산성 향상에 몰두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정품 무한 잉크 프린터 같은 상식을 뒤집는 혁신을 할 수 있었다.

경영 구루인 고(故) 테오도르 레빗(Theodore Levitt)은 새로운 혁신을 할 때 고객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생산방식을 혁신한 헨리 포드(Henry Ford)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통념과 다른 해석을 내놨다. 사람들은 헨리 포드를 생산방식을 혁신한 천재로 칭송한다. 그러나 이는 헨리 포드의 위대함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란 얘기다. 레빗은 포드는 생산의 천재가 아니라 마케팅의 천재였다고 말한다. 포드가 생산라인을 혁신해서 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500달러짜리 자동차 수백만 대를 팔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라는 거다. 500달러로 가격을 떨어뜨리면 자동차를 수백만 대 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드가 생산라인을 바꿨다는 얘기다. 대량 생산 시스템은 고객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다.

젊었을 때 엔지니어로 마이크로 피에조 기술 개발을 이끌었던 우스이 사장이 강조하는 바도 이와 유사하다. “우리 기술을 아주 깊이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기술을 아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대중이 그것을 정말 필요로 하고 편리하다고 생각할까’에 대해서까지 깊이 고민한다는 뜻이니까요.”

기술의 활용에 대해 깊이 고민해서 고객 니즈를 만족시켜줄 수 있어야 기술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얘기다. 결국 기술을 빛나게 하는 건 고객이다.


필자소개 이병주 TVC 대표 capomaru@gmail.com
이병주 대표는 연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LG경제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창의성, 변화관리, 리더십 등을 연구했다. 저서로 『애플 콤플렉스』 『촉』 『3불전략』 등이 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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