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도요카프의 기적

“시민이 주인… 돈보다 의리” 잿더미에서 희망을 쏜 ‘감동의 스토리텔링’

210호 (2016년 10월 lssue 1)

Article at a Glance

2016년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에서 25년 만에 1위를 확정한 히로시마 카프의 성공비결

 

1. 시민이 고객이자 주인

원자폭탄 폭발의 폐허 속에서 시민들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야구단. 향토기업 마쓰다자동차는모기업이라 자칭하지 않고 후원자 역할에만 충실하며 시민들이 야구단의 주인이라고 느끼게 배려. 시민들은 새로운 야구장 건립을 위해 모금하고 구단은 추가 수익금을 시민사회에 기부하는 선순환 구조.

 

2. 서사적인 영웅을 이용한 스토리텔링

7년 전 약속대로 메이저리그에서 돌아온 41세 베테랑 투수 구로다 히로키의 리더십. ‘돈보다 의리라는 스토리텔링으로 입장권 판매수익과 TV 시청률 급증.

 

원초적으로 사람들은스토리를 좋아한다. 이야기를 소비하며 감성적으로 몰입할 수 있고 유의미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의 만년 하위팀이었던 히로시마 도요카프의 2016년 정규시즌 우승은 그런 점에서 흡입력이 강하다. 1950년 시작된 일본 프로야구는 해마다 센트럴, 퍼시픽 양 리그에서 우승팀을 배출해내지만 올해 히로시마의 사례처럼 스포츠 뉴스를 뛰어넘는 사회적 파급력을 미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결국 히로시마 우승에 일본 사회 전체가 강렬한 울림을 느끼는 것은 에토스(대상에의 유대감), 로고스(이성적 정보), 파토스(감성적 교감)를 고루 충족시키는 어떤 자극을 받았기 때문일 터다.

 

기자는 히로시마 우승을 전후한 시점에 일본 출장 중이었다. 99일 오사카행 비행기에 탑승했을 때부터 일본 신문들은 심상치 않았다. 기내에서 펼쳐 든 <스포츠닛폰>에는 히로시마 우승 매직넘버(우승까지 필요한 승수) ‘2’라는 기사가 1면 톱에 실려 있었다. <마이니치신문> 계열인 이 신문은 일본 전국을 커버하는 스포츠 전문지다. 이런 신문이 작은 지방팀 히로시마의 우승을 이렇게 고대한다는 것은 곧 일본 사회 전체가 이 팀의 우승을 원하고 있다는 암묵적 메시지로 읽혔다.

 

10일 밤 히로시마 도요카프는 도쿄돔에서 요미우리를 깨고 센트럴리그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했다. 다음날 일본 신문들은 온통 붉은 색이었다. 히로시마의 상징색이다. 스포츠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유력 종합지들까지 히로시마 우승을 1면 톱기사로 대서특필했다.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그 자리를 차지했어야 할 북한 핵실험 소식도 아래로 밀어냈다. <마이니치신문> 32면 중 무려 8면에 걸쳐 히로시마 우승 관련 뉴스를 실었다. 사설(社說)도 할애했다. <마이니치신문>과 더불어 일본 3대 신문으로 신뢰받는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도 비슷했다. TV를 틀면 NHK 등 공영방송을 비롯해 TBS, NTV, 후지, 아사히 등 4대 민영방송까지 히로시마 우승 소식을 무한 반복하는 듯했다. 기자가 귀국하던 13일까지 일본 신문 방송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히로시마 우승 관련 뉴스를 계속 생산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어 하는 일본인 특유의 디테일이 발동된 것 같았다.

 

왜 열도는 이토록 히로시마의 우승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 이상열기가 품고 있는 메시지를 살펴본다.

 

 

 

메이저리그에서 100억 원대 연봉을 뿌리치고 친정 히로시마로 복귀해 25년 만의 우승을 이끈 투수 구로다 히로키

 

 

히로시마 시민의 희망이 투영된 야구단

 

히로시마는 20세기의 비극을 겪은 도시다. 1945 86, 2차 대전을 끝내려는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전쟁, 그 오판의 대가는 히로시마 시민들이 치러야 했다. 삶의 공간은 잿더미가 됐고 그들의 자랑이었던 히로시마성()까지 파괴됐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49, 히로시마에 야구단이 창단됐다. 팀 이름은 카프(carp, 잉어)로 정했다. 잉어는 히로시마성을 상징하는 물고기다.

 

잿더미밖에 남지 않은 히로시마 시민들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희망이었다. 그 희망의 상징이 히로시마 야구단이었다. 태생부터 카프 야구단은 히로시마 시민들의 분신(分身)이기도 했다. 그러나 폐허가 된 히로시마에서 야구단을 운영하려니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당시의 절박함은 사진으로 남아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최근 1면 톱 사진으로 히로시마의 창단 유니폼을 공개했다. 16번 유니폼이었는데 ‘1’자 밑에는 ‘2’자의 음영이 드러나 있다. 원래 26번 유니폼인데 ‘2’자를 떼어내고 ‘1’자를 붙여서 16번 유니폼으로 고쳐 입은 것이다. 그 당시 히로시마의 아픔이 이 사진에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2016 913일자 <마이니치신문>에 보도된 히로시마 카프 창단 유니폼. ‘1’ 뒤로 희미하게 ‘2’가 붙어 있던 자국이 보인다. (사진: 김영준)

 

창단 3, 리그 참가 2년 만인 1951년에 재정난이 닥쳤다. 선수 월급과 원정비용조차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야구단 해체가 결정됐다. 그러나 선수단은 떠나지 말아 달라는 히로시마 시민들의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시모토 슈이치 초대 감독이 선수들을 설득해 마음을 돌렸다. 시민들은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구장과 거리 곳곳에 빈 술통을 두고 모금 활동을 펼쳤다. 그렇게 440만 엔이 모였다. 야구단을 아예 시민구단으로 전환시켰다. 이 골격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 12개 팀 중 모기업이 없는 유일한 팀이 히로시마다. 1952, 센트럴리그 측은 카프의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승률 30%를 넘기지 않으면 다른 팀과 합병시키겠다고 경고했다. 그해 카프는 승률 31.6%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히로시마 시민들은 1957년 히로시마 시민구장을 지을 때도 돈을 보탰다. 2008년까지 히로시마의 홈구장으로 쓰인 이 시민구장은 히로시마 부흥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1967년부터 동양공업(현 마쓰다자동차)이 전문경영인처럼 대표주주로 경영에 참여하며 구단 살림이 크게 개선됐다. 선수단이 붉은 헬멧을 착용하기 시작한 1975, 드디어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해냈다. 이어 1979, 1980, 1984년까지 정상을 정복하며 카프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1986년과 1991년에도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의 철인(鐵人)’ 기누가사 사치오, ‘미스터 히로시마야마모토 코지, ‘외톨이 늑대이자우승 청부사에나쓰 유타카, ‘붉은 군단의 에이스사사오카 신지, ‘만능 타자노무라 겐지로 등이 이 시대를 빛낸 히로시마 영광의 별들이었다.

 

구단 경영은 1975년부터 흑자를 유지했다. 그러나 큰 구단에 비해 자본력이 부족한 히로시마의 전성기는 영속적일 수 없었다. 프리에이전트와 신인 드래프트 역지명 제도가 도입된 1993년부터붉은 군단의 쇠락이 시작됐다.(‘일본 프로야구 시스템참조) 해마다 열리는 FA와 신인 드래프트 시장에서, 모기업 없는 시민구단, 가난한 히로시마 유니폼을 입고 싶어 하는 선수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1994년부터 히로시마는 8명의 FA 선수를 배출했는데 단 한 명도 팀에 남지 않았다. ‘자본의 논리앞에 불가항력이었다. 그나마 FA 선수의 이적은 예정된 일이라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었지만 유망 신인이 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프로입단 시기를 늦추면서까지 역지명을 행사할 정도의 신인이라면 대부분 특급 잠재력의 소유자다. 이런 역지명 선수가 히로시마를 선택한 것은 단 3번뿐이었다.

 

DBR minibox

 

 

일본 프로야구 시스템

 

일본 프로야구 리그는 1936년에 시작했다. 1950년에 센트럴과 퍼시픽의 2개 리그로 분리됐고 1952년에 현재와 같은 12팀 체제가 완성됐다. 히로시마가 속한 센트럴리그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즈 등 전국적인 인기를 끄는 빅클럽들이 포함돼 있다.

 

 

 

정규리그가 끝나면 각 리그의 상위 3개 팀이 플레이오프(클라이맥스 시리즈)를 치른다. 이 승자들이 74선승제의 일본 시리즈에서 만난다. 2016 910일 히로시마는 아직 12경기나 남아 있는데도 압도적인 성적(82 47)으로 리그 1위를 결정지었다. 2위 요미우리와의 승차는 15경기였다.

 

 

리그 1위 팀에게는 64선승 플레이오프에서 두 가지 어드밴티지가 주어진다. 첫째, 모든 경기를 홈구장에서 치른다. 둘째, 1승을 먼저 안고 시작한다.

 

 

 

일본의 신인 드래프트와 역지명 제도

12팀은 매년 시즌이 끝나고 다음해에 뛸 신인 선수를 뽑는다. 먼저 1라운드에서는 각자 1명씩 원하는 선수를 지명하고, 희망선수가 겹치는 경우 추첨으로 결정한다. 이렇게 12명을 뽑고 나면 2라운드부터는 그해 팀 성적의 역순으로 한 명씩 차례로 뽑는다. 따라서 하위권 팀일수록 유리하다.

 

 

그런데 선수 입장에서 보면 유망주일수록 인기 없고 재정이 약한 하위권 팀에 배정될 확률이 높아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자기 마음대로 팀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계약(free agent, FA) 신분을 얻으려면 대략 8시즌 정도를 뛰어야 한다. 뛰어난 선수가 FA가 되면 계약금과 이적료 등이 발생하며 몸값이 치솟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따라서 아예 처음부터 드래프트에 참여하지 않고 미국으로 진출하려는 신인들이 나왔다. 이를 막기 위해 리그는 1993역지명 제도를 도입했다.

 

 

 

역지명 제도는 신인 선수가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 참여하지 않고 대신 사회인야구팀에 입단할 경우 일정 기간이 지나면 FA처럼 선수가 팀을 택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다. 1993년에 도입됐다. 유망한 신인이 미국 메이저리그로 나가는 것을 막겠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곧 스카우트 비리의 온상이 됐다. 요미우리처럼 자금이 풍부한 구단은 이 제도를 악용해 유망 신인이 나타나면 드래프트 지명에 응하지 말고 사회인 야구 리그에서 참고 기다리라고 회유했다. 그 기간 동안 선수에게 뒷돈으로 금전적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결국 역지명 제도는 2007년에 폐지됐다. 

 

좋은 선수의 수급이 어렵다보니 팀은 어려워졌다. 그나마 다져놓은 전력으로 1990년 중반까지는 근근이 버텼지만 곧 끝을 알 수 없는 침체기가 왔다. 1998년부터 15년 연속 센트럴리그 6팀 중 4위를 넘지 못하는 삼류구단으로 전락했다. 2004, 일본 프로야구에서 긴테쓰 버팔로스, 다이에 호크스 두 구단이 모기업의 재정 악화로 어려움을 겪으며 각각 오릭스와 소프트뱅크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가게 됐다. 하지만 야구계에서는긴테쓰, 다이에가 아니라 히로시마가 사라져야 될 구단이라는 말이 나왔다.

 

 

히로시마는 2015년까지 25년 동안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이처럼 오랫동안 리그 우승을 못한 팀은 없었다. 2015년 성적도 6팀 중 4위였다. 그렇다면 2016년엔 무엇이 달랐을까. 요미우리, 한신, 소프트뱅크 등 센트럴리그 경쟁자들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의 자금력밖에 없었던 히로시마는 어떻게 이런 반전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일까?

 

2016년 히로시마의 타격성적을 보면 이길 수밖에 없는 팀임을 파악할 수 있다. 912일까지만 따져도 2015년 전체에 비해 팀 득점은 134점이 증가했다. 팀 홈런은 39, 팀 볼넷은 23개가 늘었다. 131개에서 144개의 홈런을 쳤다. 30개 이상 홈런을 친 선수는 없지만 10개 이상 친 선수가 7명으로 리그에서 가장 많다. 반면 팀 삼진은 전년 대비 96개가 줄었다.

 

코칭스태프는 선수들에게눈 야구를 일관되게 주문했다. 공을 오래 보고, 상대투수를 지치게 하는 팀 배팅을 지향했다. 캠프 때부터 탁구공 크기의 공을 치게 했고, 투수가 던지는 야구공에 숫자를 적어놓고 타자가 읽게 하는 훈련을 했다. 야구는 결국 점수를 많이 내는 팀이 이긴다. 점수를 많이 내려면 아웃을 적게 당해야 한다. 꼭 홈런, 도루 등 화려한 개인기가 없더라도 팀 전체의 힘으로 점수를 낼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이 팀 배팅이고, 그 토대는 출루율이다. 능력이 떨어지는 선수일지라도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아도 되는 볼은 골라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년 대비 히로시마의 팀 출루율은 0.034포인트 증가했다. 또 우승을 결정하기까지 거둔 82승 중 무려 42승이 역전승이었다.

 

 

시대의 결핍을 채워준 구로다 히로키의 의리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2016년의 성과를 설명할 수 없다. 히로시마를 정말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눈 야구가 아니라 영웅의 존재다. 구로다 히로키(41)와 아라이 다카히로(39)라는 두 선수다.

 

이야기는 히로시마가 바닥을 헤매고 있던 2006 101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팀의 에이스 투수 구로다는 이 등판을 끝으로 FA 자격을 획득할 예정이었다. 전례를 볼 때, 하위권 팀을 홀로 지켜왔던 외로운 에이스인 구로다가 가난한 히로시마를 떠날 것이 당연해 보였다. 그런데 이날 히로시마 시민구장을 가득 메운 팬들은 대형 플래카드 하나를 펼쳤다. ‘당신이 눈물을 흘리면 우리가 그 눈물이 되어 줄게요.’ 떠나지 말아 달라는 히로시마 팬들의 간곡한 설득이었다. 드라마처럼 구로다는 잔류했다. 구단이 제시한 조건이 좋아서가 아니라 팬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예일본 내 다른 팀에선 절대 뛰지 않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1년 후, 구로다가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서 3년간 3530만 달러( 400억 원)의 입단 제안을 받았을 때는 팬들도 더 이상 그를 잡지 못했다. 메이저리그는 전 세계 모든 야구 선수들의 꿈이다. 연봉의 차이도 크고 국가적 자존심도 걸려 있다.1 11년을 히로시마에서 봉사한 구로다는 마침내 눈물의 이별을 했다. 대신 팬들에게 꼭 히로시마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미국에서도 구로다는 정상급 선발투수로 활약했다. LA 다저스에서 성공적인 4년을 보내고 2012년엔 최고 명문 뉴욕 양키스 유니폼까지 입었다. 양키스는 그에게 연간 1000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제시했다.

 

양키스에서 보낸 3년 동안 구로다는 매년 10승 이상씩을 챙겼다. 1급 선발투수의 요건인 방어율 3점대를 유지했다. 그런데 1500만 달러( 160억 원)의 연봉을 받았던 2014 시즌을 마친 뒤 구로다는 히로시마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히로시마가 줄 수 있는 연봉은 4억 엔( 40억 원)이었다. 양키스가 제시한 금액의 절반도 안 됐다. 그러나 구로다는힘이 남아 있을 때 히로시마를 돕고 싶었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이 순간 구로다는 히로시마 그 자체가 됐다.

  

팬들도 그를 기다렸다. 히로시마 구장의 연간지정석은 2014 6300석이 판매됐지만 구로다의 복귀가 확정된 2015년 시즌엔 8300석 전부가 팔렸다. 구단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실 구로다는 히로시마가 아닌 오사카 출생이다. 1975년생 우투수인 그는 1996년 신인으로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했다. 두 아이도 히로시마에서 키웠다. 타격과 수비가 약한 팀의 투수는 개인 성적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지만 2005년 센트럴리그 다승왕, 2006년 방어율 1(1.85) 타이틀을 따냈다. 메이저리그에서 7년을 보내고 2015년 히로시마로 돌아온 구로다는 어느새 만 40세의 노장이 돼 있었다. 그러나 복귀 첫해 11승에 방어율 2.55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올스타전에서도 센트럴리그 선발투수로 출전했다. 상대편 퍼시픽리그 선발투수인 니혼햄 파이터스의 쇼헤이 오타니(21)보다 나이가 거의 두 배 많았다. 41세가 된 2016년에도 그는 921일 현재까지 23번 선발로 등판해 98, 방어율 3.17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구로다와 함께 또 한 명의 히로시마 프랜차이즈 스타인 아라이 다카히로 역시 고향팀을 위해 현역 마지막을 바치기로 결단했다. 1977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그는 1999, 어렸을 적부터 팬이었던 카프에 신인으로 입단해 꿈을 이뤘다. 주로 1루수로 활약하며 2007년까지 거의 매년 홈런 20개가량을 때려내며 주포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7 FA 선언 뒤 한신 타이거즈로 떠나자 팬들은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7년 후, 아라이는 연봉 7000만 엔을 제시한 한신을 거부하고 2000만 엔을 제시한 히로시마로 돌아왔다. 그렇게 마운드의 구로다, 타선의 아라이는 히로시마 젊은 선수들의 정신적 리더가 됐다.

 

히로시마의 우승 확정 경기였던 910일 요미우리전 승리투수는 구로다였다. 6이닝 동안 3실점 하며 선발투수 요건을 채우며 미·일 통산 202(미국 79, 일본 123)째를 달성해 노모 히데오의 기록을 깼다. 구로다는 이날 우승 직후 아라이와 포옹하며 눈물을 흘렸다.

 

돈이 곧 자유이자 권력인 이 시대에 구로다는 돈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었음을 눈앞에 보여줬다. 낡아서 폐기된 줄 알았던 의리라는 가치에 이 시대의 내면이 목말라 있었음을 새삼 일깨워준 것이다. 이는 곧 선수들을 똘똘 뭉치게 하는 계기가 됐고, 팬들을 경기장으로 불러 모으는 힘이 됐다.

 

구로다와 아라이에 비해 신문과 방송의 주목은 덜 받았지만 감독 오가타 고이치 역시 이런의리스토리의 한 축을 담당한다. 오가타 역시 구로다 같은 프랜차이즈 스타다. 1990년대 선수로서 히로시마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코치로도 7년을 일했다. 그는 감독 2년 차를 맞은 2016년 시즌에서 선수 교체를 최소화하면서 믿음을 실어주었다.

 

의식주가 딱히 부족하지 않은 풍요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필요가 아닌 감성에 따라 소비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지점에서 히로시마의 우승이 빚어낸 열광(fever)은 곧 장기 디플레에 빠져 있는 일본 경제에 한줄기 빛으로 떠오르고 있다. NHK 조사 결과, 910일 우승 확정 경기의 지역 시청률은 60.3%에 달했다. 히로시마에 TV가 보급된 이래 역대 2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특히 우승 직후 세리머니에서 선수들이 오가타 고이치 감독과 구로다, 아라이를 헹가래 칠 때의 순간 시청률은 무려 71.0%였다. 미디어가 다극화된 현대의 환경을 감안하면 믿어지지 않는 숫자다.

 

 

히로시마 시내 쇼핑몰을 장식한 카프 우승기념 깃발. (출처: 마쓰다 스타디움 블로그)

 

시민 구단의 엔진, 마쓰다 스타디움이라는 인프라

 

구로다와 아라이라는 슈퍼스타들이 연봉 대폭 삭감을 감수하면서까지 작은 구단 히로시마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 스포츠의 세계에서 이런 일은 흔치 않다. 히로시마 구단만의 독특한 문화와 스토리, 그리고 시민사회와 연결되는 끈끈한 분위기 때문이다.

 

히로시마는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는 시민구단이다. 모기업이라는 비빌 언덕이 없다는 뜻이다. 히로시마의 대기업 마쓰다자동차와 자회사, 창업주 가문 등이 구단 주식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긴 하지만 회사 차원에서 구단 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구단은 독립채산제로 운영된다. 히로시마 시민들의 헌신적 사랑으로 1975년 이래 흑자를 유지하고 있지만 크게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기 힘든 구조다. 선수단 연봉 총액은 항상 리그 하위권이다.

 

이런 팀이 2015년 시즌을 앞두고 구로다와 아라이라는 스타를 재영입할 수 있었던 이유, 또 기존 선수들의 사기 저하를 막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2009년 완공된 마쓰다스타디움(신 히로시마 시민구장)이다.

 

 

과거 히로시마 시민구장의 연 누적 관중은 2003년의 946000명이 최고였다. 팀 성적도 성적이겠지만 1957년부터 써온 시민구장의 시설이 낙후돼 있었다. 4년간의 공사 끝에 2009년 문을 연 신 구장 마쓰다스타디움은 미국 메이저리그를 모델로 해서 지어졌다. 파티석, 바비큐석, 테라스석, 스카이시트, 스포츠바, 다다미석 등 좌석의 종류만 30가지가 넘는다. 관중은 크게 늘어 2015 211266명까지 증가했다. 2007 62900만 엔이었던 경기장 매출은 2015 1483200만 엔으로 늘었다. 순이익만 사상 최대인 76000만 엔에 달했다. (히로시마 신 구장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기아 타이거스와 삼성 라이온스 등 여러 구단이 새 야구장을 만들 때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매출과 이익이 늘어난 데는 히로시마 시의 전향적인 결정도 한몫했다. 야구장의 경영권을 모조리 야구단에 맡긴 것이다. 그 덕분에 팬 친화적 맞춤형 마케팅이 극대화됐고 이익폭이 커졌다. 구단은 마쓰다스타디움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한편 10억 엔을 들여 실내연습장도 건설했다. 선수 평균 연봉도 2008 1948만 엔에서 2016 3111만 엔까지 늘어났다. 야구단 재정이 나아지자 선수단 사기가 달라졌다. 구로다, 아라이처럼 귀향하는 선수들도 품을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야구장은 어떻게 지었을까? 히로시마 시민들은 총 공사비 90억 엔의 야구장 건립에 보태라고 12600만 엔을 모금해줬다. 현지 재일교포들도 민단 히로시마현 본부와 히로시마 한국상공회의소를 통해 참여했다. 공사비 전체에 비하면 큰돈은 아니지만 의미하는 바가 컸다. 모금에 참여한 시민들은 이 구장에 올 때마다내가 세운 야구장이라는 기분을 느낀다.시민들은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해 야구장에 온다. 33000석 규모의 경기장이지만 주차장은 고작 200여 대 규모다. 대신 기차역과 전차역이 도보 10분 거리다. 또 이 야구장은 외야 일부에 담장이 없다. 신칸센 열차가 뒤쪽을 지나가는데 기차를 탄 시민들이 단 몇 초라도 야구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마쓰다 구단주는야구단은 히로시마 시민들의 공기(公器)”라고 당당히 말한다. 히로시마라는 도시에서 야구단은 특정 기업의 이윤 추구 수단이 아니라 시민들의 공공재다. 거리의 맨홀 뚜껑에조차 야구단 로고가 박혀 있는 곳이 히로시마다. 히로시마 시민구장 창설 때부터 판매된카프 우동은 히로시마의 명물이다. 야구단이 1위를 질주하며 카프 도시락, 카프 샌드위치, 카프 버스와 카프 택시까지 나왔다. 야구단 2군 경기장은 이웃한 야마구치현에 위치해 있어 교통이 불편하다. 1시간 이상 쾌속 기차를 타고 간 뒤 하루에 6번밖에 다니지 않는 버스를 타고 25분 이동해야 닿는다. 그럼에도 2군 경기까지 챙기는 히로시마 팬들로 항상 붐빈다.

 

과거 히로시마 시민구장에는꿈과 감동을 줘서 고마워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 꿈과 감동이 구단을 먹여 살렸고 다시 그 구단이 시민들에게 보답하고 있다. 올 시즌 시작 전에 있었던 에피소드가 이를 보여준다. 작년까지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투수 마에다 겐타가 미국 LA 다저스로 떠나면서 히로시마 구단은 2000만 달러( 240억 원)의 이적료를 챙겼다. 마쓰다 하지메 구단주는 이 중 상당액을 스프링캠프 장소인 미야자키현, 오키나와현 등에 기부했다. 구로다 입단 이후 입장권 판매수익이 오르며 구단 운영에 특별히 어려움이 없는 상황이고, 또 시민들의 힘으로 운영되는 시민구단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뜻이었다. 야구장 건립에 시민들의 모금이 힘이 돼주었다면 이번에는 구단이 보답할 차례였다.

 

사회현상이 된카프 여자

 

‘카프 여자(carp 女子)’라는 신조어가 있다. 2014년 일본 유행어 대상 톱10에 들어갈 정도로 사회적 파급력을 갖는다. ‘카프 여자의 어원은 만화가 이시다 아츠코의 작품 <야구장 러버즈>에서 유래한다. 이시다 작가는도쿄에 히로시마를 사랑하는 여성 팬이 있다면 어떨까?’라는 발상에서 6년 전 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야구장 러버즈는 예상을 뛰어넘는 지지를 얻으며 15권까지 단행본으로 출판된 상태다. 이 만화 덕분에 이시다 작가는 2013 8월 마쓰다스타디움에서 시구까지 했다. 이번 히로시마 우승 기념으로 이시다는 특별판을 그리겠다고 밝혔다.

 

이 만화의 힘은카프 여자가 실제 일본 사회에 출현했다는 데 있다. 프로야구와 특히 도쿄에서 떨어진 변방팀 히로시마와 아무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젊은 도시 여성들이 히로시마를 응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쿄의 야구장에서 붉은 물결이 넘치는 데는 이카프 여자들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구매력이 강한 젊은 여성들이라 붉은 유니폼 등 히로시마 야구단 상품을 사는 데도 적극적이다. 신칸센을 타고 히로시마로 원정 응원까지 온다.

 

‘카프 여자현상은 약자를 향한 일본 젊은 층의 무의식적 연대감의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처럼 지금 일본은 꿈을 잃은 사회가 됐다. 모든 것들이 완결된 듯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낀다. 그런데 히로시마 카프라는 만년 하위팀은 요미우리, 한신, 소프트뱅크 같은 부자구단들과 붙어서 연전연패일 것 같은 데도 굴하지 않는다는 스토리를 완성했다. 배경도 보잘 것 없는 지방 도시의 가난한흙수저팀은 곧 현대 일본 젊은이의 초상이다. 히로시마는 25년간 우승을 못해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본이 종교를 대체하는 시대에 히로시마에는 돈을 마다하고 의리를 택한 선수가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선수가 팀을 우승시켰다.

 

 

 

히로시마는 말로만 시민을 위하는 구단이 아니다. 60여 년 시민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다. 이런 정서를 잘 알고 있는 지역 기업 마쓰다자동차는 다른 기업들처럼 야구단의 주인 행세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들의 성원이 선수들에게 그대로 전해질 수 있었고, 선수들의 의리와 투지가 마침내 우승이라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제 히로시마는 전국구 구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김영준스포츠동아 기자 gatzby@donga.com

조진서기자 cjs@donga.com

 

김영준스포츠동아 기자는 2004년부터 한··일 프로야구를 취재했다. 승패 결과 자체보다 그 이면에 담겨져 있는 리더십의 맥락, 스포츠단의 생존 철학 등커튼뒤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다.

 

생각해볼 문제

 

1.히로시마 카프가 2016년 시즌의 성공을 발판 삼아 사업을 확장하고 싶다면 어떤 전략을 세울 수 있을까. 요미우리 자이언츠처럼 타 지역 야구팬들에게도 사랑받는 전국구 팀으로 포지셔닝할 것인가, 아니면 히로시마 지역 내에서 브랜드 가치를 이용해 수평적(야구 외 사업으로 진출) 또는 수직적(야구 관련 사업으로 진출) 확장을 꾀할 것인가.

 

2.구로다 히로키가 연봉 삭감을 감수하고 뉴욕 양키스에서 히로시마 카프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기업이 구로다처럼 로열티가 높고 능력이 뛰어난 직원을 채용하고 유지하기 위해 연봉 외에 어떤 가치를 제시할 수 있을까.

 

 

 

 

동아비즈니스리뷰 348호 The New Chapter, Web 3.0 2022년 07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