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aphysics on Trend
Article at a Glance – 마케팅, 인문학
문화는 더 이상 상위계층에서 하위계층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서구인들은 문화가 부챗살처럼 몇 개의 중심점에서 사방으로 퍼진다고 믿기 시작했다. 마치 뉴욕 브롱크스의 음악과 패션이 전 세계 젊은 소비자층을 뒤흔들어놨듯이, 그 중심은 반드시 부유층도 아니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모임도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각계각층의 트렌드 리더들이 모여 있는 ‘창의력 공장’, 파리, 런던, 뉴욕, 도쿄, 즉 ‘글로벌 A레벨 시티’의 움직임이다. 여기에서 시작된 트렌드는 서울과 같은 다음 단계의 ‘허브 시티’로 옮겨가고 이 허브 도시를 기점으로 또 다시 퍼져나간다. 물건이 아니라 가치관을 팔아야 하는 시대에, 여전히 소득 수준과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시장을 세분화하고 마케팅 전략을 짜는 방식으로는 선도기업이 될 수 없다. 지금 누가 트렌드를 이끌고 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트렌드의 특징과 추종자들은 누구인지를 아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21세기 마케팅이 시작된다. |
편집자주
매해 연말이 되면 ‘20XX년 트렌드 예측’류의 책이 서점에 넘쳐납니다. 하지만 대부분 신문기사와 몇 가지 특정한 문화현상을 짜깁기한 것에 그쳐 실망을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자들은 사회와 문화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위치한 소비자들의 트렌드 변화를 알고 싶어 합니다. 글로벌 문화 전략가인 조승연 작가가 현재 세계적 ‘트렌드 리더’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해외의 최신 문화 트렌드, 그리고 그것이 비즈니스에 미칠 영향에 대해 소개합니다.
Urban Culture의 탄생
1) “Bronx is Burning”
뉴욕의 ‘브롱크스’는 한때 폭력과 마약, 범죄의 온상으로 불렸다. 뉴욕의 할렘 북쪽에 위치한 이곳은 사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백인 중산층 거주지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 세계에서 엄청난 수의 이민자들이 미국의 대도시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입성했다. 그리고 동부에서는 당시 부동산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뉴욕 브롱크스로 밀려들었다. 서서히 인종 갈등이 시작됐고, 1964년 인종 폭동으로 이어졌다. 브롱크스 거리의 빌딩과 자동차들이 불탔고, 경찰과 유색 인종 이민자들 간에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돌과 화염병이 날아다녔다. 이 장면은 브라운관을 타고 전 세계로 보도됐다.
“Bronx is Burning”은 아직도 많은 세계인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당시의 미국 주요 신문 기사 헤드라인이다. 이 후로 브롱크스의 이미지는 ‘인종 갈등, 총기 사건, 마약 중독자들이 넘쳐나는 거리’가 됐다. 이때 생긴 브롱크스의 이미지로 인해 미국에서는 웬만한 형편만 돼도 브롱크스로 이주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건물주들은 정당한 세를 지불할 세입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월세는커녕 관리비도 건질 수 없었고, 건물을 유지 보수하지 못하게 되면서 대부분의 집들은 유리창이 깨진 채로 방치됐다. 수도 파이프가 터지고 난방과 전기도 끊기면서 폐허로 전락했다. 다른 나라에서 갓 이민 온, 혹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노숙자들이 그런 빈집들에 무단 점거해서 살기 시작했다. 건물주들은 노숙자들의 무단 점거를 몇 년간 눈감아 주는 대신 건물에 불을 지르도록 했고, 이를 빌미로 화재보험금을 타 손실을 보존했다. 브롱크스는 계속 불타고 있었다. 무법천지로 변해갔음은 물론이다.
그런 브롱크스에서 새로운 청년 문화가 꽃피고 그것이 전 세계 시장 흐름까지 바꿨다. 말이 안될 것 같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참으로 그 생리를 알다가도 모를 것이 바로 유행이고 트렌드다. 하지만 기업인들은 이 예측 불가능한 문화의 자생력과 트렌드의 생리를 민감하게 포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타깃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브롱크스가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고‘문화 트렌드’를 리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2) 자메이카에서 온 청년
폭력과 마약의 온상으로 악명이 높아진 브롱크스에 DJ Kool Herc(DJ 쿨허크)라는 자메이카 청년 이민자가 들어왔다. 낯선 미국 땅에 도착한 후 자연스럽게 자메이카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살던 브롱크스로 온 것이다. 그는 음악에 미쳐 있었다. 정말로 음악을 즐겼다. 버려진 아파트 지하실에 큰 턴테이블 두 개와 대형 스피커 두 개를 설치했다. 그리고 자기만큼 음악을 좋아하는 동네 친구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하면서 함께 춤추며 노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점차 그의 아파트는 젊고 에너지가 넘쳐 음악과 춤을 즐기는 브롱크스 청년들의 메카가 됐다. 어느 날 DJ Kool Herc 는 자신과 함께 놀던 청년들을 문득 유심히 관찰했다. 자신의 공간을 찾은 팔팔한 청년들은 음악의 페이스가 느려지면 금세 지루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는 그들이 계속 신나게 놀 수 있도록 턴테이블 두 개에 각기 다른 레코드를 끼워 놓고 가장 리듬이 빠르고 신나는 부분만 교체하며 틀었다. 한 음악에서 신나는 부분이 지나가면 바로 다른 음반의 신나는 부분으로 교체한 것이다. ‘힙합’이 탄생했다. 그는 가난한 이민자에서 졸지에 전 세계 청년 문화의 트렌드를 바꾼 힙합 문화 창시자가 됐다. 당연히 브롱크스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적인 장소가 됐다. 힙합의 폭발적인 유행으로 유명해진 DJ Kool Herc는 1972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파트 지하실에서 빠른 리듬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힙합리듬’의 시작이었다.”
또 CNN과의 인터뷰에서는 “내가 살던 아파트 계단으로 내려오던 중 4층, 3층, 2층, 1층에서 모두 내가 만든 음악이 흘러 나와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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