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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Z Consulting

역설적 無知:더 많이 알수록 지식의 덫에 빠진다

송미정 | 87호 (2011년 8월 Issue 2)

편집자주
트리즈(TRIZ)는 창조적 문제 해결 이론(Theory of Inventive Problem Solving)을 뜻하는 러시아어 ‘Teoriya Resheniya Izobretatelskikh Zadatch’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말입니다. 모든 발명 과정에는 공통되는 법칙과 패턴이 있다는 믿음하에 A분야 문제에 대한 해법을 B분야에서의 문제 해결책을 참조해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TRIZ입니다. 쉽게 말해 ‘재발명을 통한 문제 해결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년간 TRIZ 컨설팅 외길을 걸어 온 송미정 박사가 TRIZ를 활용해 현장에서 부딪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실전 솔루션을 제시합니다.
 
창의성만큼 많은 연구자들과 연구결과들이 있고 갖가지 해석과 다양한 창의성 개발 기술이 제시돼 있는 주제는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의성 연구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창의성은 역설적이란 점이다. 전문가의 지식이 많아질수록 창의성은 제약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대로 해당 내용에 무지한 이들에게 창의성이 잘 발휘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트리즈의 기본 가정은 창의적인 해결안이 필요한 나의 문제를 실은 누군가 이미 풀어 놓았다는 것이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남이 이미 풀어놓은 문제의 해결안’을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게 트리즈의 가정이다. 창의적인 해결안이 필요한 공학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지식, 혹은 창의적 해결안이 필요한 공학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는 무지에 대해 현장에서 고민할 기회가 필자만큼 많았던 이도 드물 것이기에 지면을 통해 그 경험을 나눠보고자 한다.
 
무지의 3 단계
필자가 현장에서 만났던 무지(無知)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첫째 단계는 어떤 사실이나 절차로 표현되는 지식, 그 자체를 모르는 무지다. 두 번째 단계는 자기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이며, 마지막 단계는 다른 사람들은 아는데 자기만 그 해결법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다. 1단계 무지는 우리가 흔히 교육 수준이 낮다고 일컫는 이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2단계, 3단계 무지는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많이 발견되는 무지다.
 
그렇다면 창의적인 해결안이란 어떨 때 얻을 수 있을까? 필자의 경험에 비춰볼 때 정말로 창조적인 해결안은 이 세 가지 범주의 무지를 스스로 알아차리고 그 경계를 넘고자 노력할 때 얻을 수 있다.
 
1단계 무지는 지식과 접하기만 하면 바로 해결된다. IT 발달로 언제 어디서고 필요한 지식을 접할 수 있는 현대에는 1단계 무지 때문에 발명이나 착상을 하기 어려운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관건은 검색 엔진에 어떤 내용을 입력할 것인가 정도다. 2단계, 3단계 무지가 심할 경우 검색 엔진에 입력할 새로운 키워드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이 1단계 무지를 해결하는 데 유일한 방해물이라 할 수 있다.
 
단계가 높아질수록 무지가 끼치는 해악은 더 커진다. 그러나 그 해악을 알아차리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2단계, 3단계 무지는 1단계 무지를 없애기 위해 지식을 알아갈수록 부지불식 중에 증가하는 ‘역설적’ 무지다. 자기가 아는 많은 지식의 지평선에 갇혀 그 너머의 지식들, 혹은 지식들 틈새의 빈 구멍들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올바른 관점을 가진 지식인들이라면 지식이 증가할수록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고 지식의 틈새를 지적하거나 메워주는 외부의 자극에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지식이 증가할 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무지하거나 왜곡된 관점을 가진 지식인들은 그러한 자극이 들어올 때 그 자극에 대해 부정하고 그 자극이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들을 외면한다.
 
역설적 무지가 끼치는 해악 

역설적 무지가 끼치는 해악에 대해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A라는 물질을 포함한 유리입자가 있다. 이 입자를 전기 소자 표면에 코팅하면 소자의 강도를 높이는 등 여러 바람직한 특징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코팅 후 공기 중의 수분에 조금만 노출돼도 유리입자로 만든 코팅 층에서 A가 녹아나오면서 A'라는 유해 물질을 방출시켜 주변 소자의 전기 배선 등을 끊어놓는다. A물질이 포함된 유리입자가 수분과 친화성이 높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결국 문제는 ‘코팅 시 특수한 기능을 위해 유리입자에 A라는 물질을 일정량 이상 포함시켜야 하지만 이때 공기 중 수분에 의한 유해물질 A'의 방출을 피할 수 없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A를 포함한 유리입자가 공기 중 수분과 닿지 않도록 해당 유리입자의 표면을 물과 친하지 않은 일반 유리로 덧칠한 후 이를 전기소자 표면에 코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작업 단계가 복잡해지고 A를 포함한 원래 유리입자와 이 위에 덧칠하는 일반 유리입자들 간 서로 뭉쳐버리는 등 부작용도 많았다. 수분과 친화성이 높지 않은 물질로 유리입자 표면에 덧칠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덧칠하는 방법이 과연 최선일까?
 
실은 더 간단하면서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A라는 물질을 포함한 유리입자를 끓는 물이나 수증기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이 방법의 주된 목적은 전기 소자에 유리입자를 코팅하기 전 아예 유리입자 표면에 있던 A를 의도적으로 모두 녹여냄으로써 문제의 근원을 뿌리뽑는 것이다. A가 물을 만나면 궁극적으로 A가 녹아 없어지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A'도 파생돼 나오겠지만 코팅 전 단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 결국 A를 포함한 유리입자는 의도적인 수(水)처리를 거치면서 적어도 ‘표면’ 부분에 한해서는 A가 없어지고 수분과 친하지 않은 일반 유리 성분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이렇게 사전 가공한 유리입자를 전기 소자 코팅용으로 쓰면 공기 중의 수분과 만나더라도 유해한 A'가 생성되지 않는다.
 
A를 포함한 유리층 혹은 유리가루의 특징은 ‘물과 닿으면 A가 녹아 유해한 A'를 만든다’는 전문적인 지식이다. 이런 전문지식을 가진 이들은 ‘물’이라는 자원이 ‘해롭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물로 A를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상상하기 어렵다. 어떤 전문 지식을 알고 있지만 바로 그 전문지식이 선입견으로 작용해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문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결국 문제라고 생각했던 물이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는데도 그것이 유해하다는 심리적 관성 때문에 물의 가능성에 대한 2단계 무지의 함정에 빠진다. 본인이 그런 함정에 빠져 있다는 사실만 인지하면 금방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본인이 무지의 함정에 빠진 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데 있다.
 
 
무지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동시에 빠져나오는 방법을 알려주는 강력한 방법 중 하나가 트리즈다. 위 상황에 빠진 사람에게 만약 트리즈의 변환 기법 중 하나인 ‘전화위복의 원리(convert harm into benefit·문제해결을 위한 트리즈의 40가지 발명 원리 중 22번째 원리로 유해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요소가 유익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규칙)’를 적용했더라면 물은 유해하다는 심리적 관성에서 빠져나오기가 좀 더 수월했을 것이다.
 
발명의 원리나 진화의 법칙 외에도 트리즈에서 지식의 지평선을 점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트리즈의 창시자와 그의 제자들이 정리한 여러 버전의 ARIZ(Algorithm of Inventive Problem Solving을 뜻하는 러시아어의 약자)라고 하는 창의적 문제해결 알고리듬도 그중 하나다. 이 모든 원리, 규칙, 방법론 등에 대해 속속들이 알 필요는 없지만 그중 특히 기억할 만한 내용 몇 가지는 일선 경영 현장이나 기술 개발 현장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요긴하게 쓸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제어 질문(control question)’ 형태로 만들어놓고 자신의 무지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다면 역설적 무지의 해악을 최소화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제어 질문이란 트리즈 전문가들이 문제 해결 단계에서 그 해결안에 대해 스스로 점검하거나 어떤 문제를 의뢰한 의뢰인, 혹은 학생들에게 해결안의 방향성을 스스로 열어가도록 하기 위한 유도 질문 기법이다. 통상적인 체크리스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평서문이나 짧은 명사 위주의 키워드 형태가 아니라 의문문 형태를 취하고 답이 하나 이상이거나 전혀 없을 수도 있는 개방형 질문의 형태를 취한다는 점이 제어질문의 특징이다. 사고를 자극하는 정도는 평서문 형태보다 의문문 형태가 훨씬 높기 때문에 실제 현장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제어질문 형태를 따르는 게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유해한 것을 유익하게 바꿔봐라”라는 형식의 평서형 체크리스트보다는 “유해한 작용을 하는 물질인 물이 유익한 작용을 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물질(물)을 넣어 의문문 형태로 질문을 만드는 게 효과적이다.
 
의뢰인의 지식 수준, 문제의 난이도, 문제 해결 목적 등에 따라 적절한 제어 질문을 선정하고 추가하는 능력이 트리즈 전문가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제어 질문은 창의적 문제 해결을 위한 매우 요긴한 툴이다.
 
필자의 경험상 트리즈의 여러 발명 원칙, 문제 해결 방법 등을 아우를 수 있는 트리즈의 원칙이 잘 녹아든 세 가지 제어 질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아래 제시한 세 가지 제어 질문 외에도 상황에 맞게 다양한 제어 질문들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 이 제어 질문들을 활용하면 본인과 타인의 앎의 지평선을 확인하고 그것을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제어 질문 1 해당 대상이나 특성 값(크기, 소요시간, 소요비용 등)을 무한대로 커지게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때 지금 일어나던 일 중 일어나지 않을 일은 무엇인가? 반대로 해당 대상이나 특성 값을 0이나 무한소로 작아지게 만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때 지금 일어나던 일 중 일어나지 않을 일은 무엇인가?
 
제어 질문 2 지금 제시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다른 어떤 문제를 대신 풀어야 하는가? 혹은 다른 어떤 문제를 지금 제시한 문제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풀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작용을 지금 가하는 작용 대신 가하거나 가하지 말아야 하는가? 또는 어떤 작용을 지금 가하는 작용 전이나 후에 가하거나 가하지 말아야 하는가?
 
제어 질문 3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대신 문제를 악화시켜볼 생각은 하지 않았는가?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더 악화된 상황이 문제 해결에 더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런 악화된 상태의 특징이 가진 유익한 점은 혹시 없는가?
 
 
늙고 병든 당나귀를 죽이려 했던 당나귀 주인에 얽힌 우화가 있다. 당나귀 주인은 당나귀를 흙에 묻어 죽이려고 마른 우물 속에 당나귀를 집어넣고 흙을 부었다. 그러나 당나귀는 해로운 자원인 흙에 묻혀 죽는 것을 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발로 밟아 다져 단단하게 만들어 우물 밖으로 탈출했다. 지혜로운 당나귀의 모습에 크게 감동한 주인은 당나귀를 죽이지 않고 천수를 누리게 해주었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해도 실상은 몇 가지 셀 수 있는 특징만을 알고 있을 때가 많다. 나를 해하기 위해 쏟아지는 흙도 그것을 밟아 다지면 오히려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당나귀 우화가 시사하듯 ‘내가 알지 못했던 가능성’을 이제 알아가 보자. 무지의 영역을 밝혀주는 도구가 여기 트리즈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송미정 삼성종합기술원 CTO 전략팀 부장 triz_institute@hanmail.net

필자는 KAIST에서 화학공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제 트리즈 협회 공인 Level 4 전문가로, 삼성종합기술원에서 200건 이상의 연구 개발 과제 컨설팅을 수행했다. 저서로 <회사를 살리는 아이디어 42가지(공저)>가 있다.
  • 송미정 | - (현)삼성종합기술원 CTO 전략팀 부장
    - 삼성종합기술원 연구혁신센터 차장
    - 국제 트리즈 협회 공인 Level 4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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