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영업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면서 전통적 마케팅 수단인 4P(product, price, promotion, place)만으로는 판매 및 이익 의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고객의 기호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게다가 신상품을 개발하더라도 곧바로 경쟁 기업이 유사상품을 출시하기 때문에 선두주자(first mover)라 이익을 누릴 여지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광고 등을 통한 대규모 판촉 활동 역시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의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관계 마케팅(relationship marketing)이다. 관계 마케팅은 고객, 종업원, 주주, 납품업체, 정부 등 기업 활동과 관련한 거의 모든 이해 관계자와 강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장기적으로 유지해야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마케팅 기법을 일컫는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관계 마케팅 분야의 석학인 로버트 모건 앨라배마대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지난달 현대자동차의 요청으로 방한한 그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를 통해 신규 고객을 개척하는 것보다 기존 고객을 유지하는 것이 효율적인 영업 활동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기존 고객을 유지하는 핵심 전략이 바로 관계 마케팅”이라고 밝혔다.
모건 교수는 1994년 세계 최고의 마케팅 학술지인 ‘Journal of Marketing’에 실은 논문을 통해 관계 마케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크게 주목 받았다. 이 논문은 2004년 경영 및 경제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으로 뽑힐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그는 캔자스 주립대를 졸업하고 텍사스 공대(Texas Tech University)에서 마케팅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건 교수는 관계 마케팅이 기업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관계 마케팅은 인간 지향적인 기법입니다. 서비스나 상품 뒤에 가려진 기업의 좋은 인상, 신뢰감, 고객에 대한 배려를 소비자가 느낄 때 이들이 충성도 높은 고객으로 변한다는 거죠. 제품이 아니라 고객이 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근원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는 관계 마케팅을 가장 잘 활용하는 회사로 사우스웨스트, 오토바이 제조업체인 할리 데이비슨, 워렌 버핏의 회사 버크셔 해서웨이 등을 들었다.
“마케팅을 전공하는 어떤 교수가 사우스웨스트와 미국의 최대 항공회사인 아메리칸 에어라인(AA)을 이용하면서 똑같은 비행기 지연 문제를 겪었습니다. 그 교수는 두 회사에 각각 항의 편지를 보냈는데 AA에서는 ‘날씨가 나빠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일관한 상투적 사과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에 비해 사우스웨스트는 5장에 달하는 장문의 편지에 진심어린 사과의 말을 적고 공짜 티켓까지 첨부했더군요. 고객의 마음이 사우스웨스트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파산 직전에 몰린 할리 데이비슨이 부활한 것도 관계 마케팅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할리 데이비슨은 호그(HOG: Har-ley-davidson Owners Group)라는 독특한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35만 명 이상의 열혈 할리 팬들이 존재한다. 할리 데이비슨은 호그 회원들에게 마일리지 보상, 무료 모터사이클 잡지 및 보험 혜택 등을 제공해 이들을 할리 데이비슨 공동체의 주역으로 만들어냈다. 연회비를 받고 있지만 호그 회원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해변 축제는 미국 최대 볼거리 중 하나로 꼽힌다. 회원들이 입은 독특한 가죽 재킷, 선글라스 등 일상 생활용품은 물론이고 할리 맥주, 면도 크림, 담배, 심지어 할리 식당이 등장했을 정도다. 할리 데이비슨은 호그를 통해 브랜드 애호가의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브랜드 홍보 효과도 누리고 있다. 하나의 브랜드가 단순한 선호를 벗어나 문화 현상으로 발전한 사례다.
‘오마하의 현인’ 워렌 버핏이 이끄는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주총회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버크셔 주주총회는 흔히 ‘자본주의자들의 우드스탁’으로 불린다. 주총의 흡인력이 1960년대 말 수십만 명의 히피족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우드스탁 록 페스티벌에 버금간다는 의미에서다. 매년 5월 초 주총 시즌에는 세계 각지에서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미국 중부의 한적한 중소 도시 오마하로 모여들어 이 지역 경제 전체를 먹여 살린다.
주주총회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주총 장소인 퀘스트 센터를 비롯해 오마하 시내 어디에서든 버핏이나 버크셔 해서웨이 계열사와 관련한 물품을 구입하지 않을 수 없다. 주총의 첫 행사인 칵테일 파티가 열리는 곳이 버크셔 산하의 보석 전문 도매업체 보샤임이라는 점은 주총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있는지를 잘 알려준다.
투자자들에 대한 버핏의 서비스도 확실하다. ‘투자자들과의 대화’ 시간이 끝나면 버핏은 해외 투자자들과 별도로 시간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는 질의응답이 오가지 않는다. 행사의 핵심은 해외에서 오마하까지 온 투자자들에게 버핏과 기념사진을 찍고 사인 받을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들이 다시 주총을 찾고 지인들에게 입소문을 내게끔 만드는 셈이다.
모건 교수는 기업들이 성공적인 관계 마케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실력 있고 충성도 높은 영업 직원을 육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질 높은 제품과 서비스만으로는 인간 지향적인 관계 마케팅을 이뤄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모건 교수는 미국에서도 영업을 전문직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많은 대학이 세일즈와 마케팅을 전공과목으로 삼고 체계적인 교육을 하면서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영업 사원이 존경을 못 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직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영업 직원 본인도 ‘회사가 망하면 어때. 난 내 고객이 있으니까 이 고객들을 데리고 언제든 다른 회사로 가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어떤 회사가 망하려 할 때 가장 먼저 그만두는 사람이 영업 사원이라는 편견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건 프로페셔널의 자세가 아닙니다. 때문에 영업 교육은 팔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접근 방식과 소명의식을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단순히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면 대학 교육과 기술학교 간 차이가 없겠죠.”
그는 역량 있는 영업 사원을 육성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인은 돈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돈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단순히 물건을 팔아 돈을 많이 벌기보다는 영업 직원에게 특정 업무(role)와 책임감을 부여해야 합니다. 이들이 상품을 판매한 후 ‘아, 내가 이것을 통해 학습했구나. 성취도가 높아졌구나’라는 느낌이 들게 만들어야 합니다.”
영업에서 한국 기업들이 가장 뒤처진 면은 영업을 전문 직종으로 생각하지 않는 풍토라고 그는 지적했다.
“제약업계의 경우 의학이나 약학과 관련한 지식이 없는 사람을 영업 사원으로 고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회사에서 교육을 시키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미국 제약업체들은 약학이나 의학 전공자를 영업 직원으로 고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업의 중요성을 그만큼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