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입시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조변석개(朝變夕改)’다. 교육은 백년지계(百年之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제도가 바뀐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들조차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헷갈려 한다.
이렇게 급변하는 교육 시장에서 무려 43년 동안 번영을 구가한 제품이 있다. 게다가 이 제품은 제도가 수십 번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 환갑을 바라보는 장년층이 학창시절 끼고 다녔던 책을 빅뱅과 소녀시대에 열광하는 요즘 청소년들도 숙독하고 있다. 바로 <수학의 정석>이다.
<수학의 정석>은 출판의 역사를 여러 차례 새로 썼다. 1966년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이 4000만 권이나 된다. 4800만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중학생 이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이 1권씩 구매한 셈이다. <수학의 정석>은 지금도 매년 120만 권씩 팔린다. 오래된 책 한 권이 극심한 환경 변화와 경쟁자들의 거센 도전에도 ‘만년 1등’을 고수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2009년 5월 15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성지출판에서 <수학의 정석> 저자인 홍성대 이사장을 만났다.
전체 틀은 고수하되, 문제는 부지런히 바꿔
대중들에게 <수학의 정석>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바뀐 게 없어 보인다. 투박한 디자인에 구성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전통을 고수한 게 장수의 비결일까? 하지만 홍 이사장은 전혀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초판과 최신판을 비교하면 문제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딱 보일 겁니다. 정석 책을 대충 훑어본 사람들은 초판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말하겠지요. 사실은 알게 모르게 꾸준히 개정을 해왔어요.”
우리나라 교육 과정은 보통 5∼7년에 한 번씩 대규모로 바뀐다. 홍 이사장은 그때마다 2년씩 시간을 들여 직접 개정 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수학의 정석>이 처음 나오고 5년까지는 매년 개정을 했고, 대대적인 개정은 지금까지 여섯 번 정도 했다는 설명이다.
“언제나 새로 쓰는 기분으로 하지요. 설명이 부족하다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원고를 다시 씁니다.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의 전체적인 틀은 한결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크게 개정할 때마다 문제를 10% 정도 교체해요. 수학이라는 분야에서 이 정도면 엄청나게 많이 바꾸는 겁니다.
저는 평소에 떠오르는 좋은 문제들을 메모해뒀다가 개정판에 넣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척 고민스러운 일이지요. ‘선택의 어려움’에 부딪혀요. 준비해놓은 자료가 워낙 많다 보니 한자리에 새로 넣을 후보 문제들이 수십 개나 돼요. 이놈을 넣을까, 저놈을 넣을까 고민하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학생들한테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소개해주고 싶지만, 동시에 알토란 같은 기존 문제를 빼내야 하니까 아깝기도 하고요. 정말 주옥같은 문제들은 43년째 그대로 남겨뒀습니다.”
책 개정에 얽힌 일화가 하나 있다. 40여 년 전, 홍 이사장이 항상 손가방에 넣고 다니며 애지중지하던 메모장을 택시에 놓고 내렸다.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문제가 떠오를 때마다 적어놓던 메모장이었다. “정말 자식을 잃어버린 것만큼 아까웠지요.”
홍 이사장은 그 일이 있고 나서 과감히 자가용을 사버렸다. 당시만 해도 자가용은 사치품이었지만 그에게는 필수품이었다. 택시를 타고 다니다 메모를 잃어버리느니 승용차 유지비를 쓰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차 안 곳곳에 주머니를 달아놓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해 넣어뒀다.
<수학의 정석>은 유니버설 디자인
이처럼 문제를 많이 교체했지만 정석 책의 큰 틀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바뀌지 않았다. 각 장에서 수학의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고, 이 개념을 익힐 수 있도록 상세한 풀이 과정을 넣은 ‘기본 문제’를 실은 뒤, ‘유제’와 ‘연습문제’로 단련하는 식이다. 원래는 문과생과 이과생이 모두 보는 ‘기본편’이나, 주로 이과생들이 보는 심화 단계의 ‘실력편’ 모두 주관식 문제뿐이었다. 그러다 입시에서 수학 과목이 5지선다형 위주로 바뀌면서부터 기본편의 25% 정도를 5지선다형으로 바꿨다. 수학 시험은 단연코 주관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홍 이사장의 입장에서는 많이 양보한 셈이다.
“수학은 논리적 사고력을 기르는 학문이에요. 그러자면 답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논리적으로 잘 전개됐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5지선다형의 경우 가끔 5개의 보기를 각각 문제에 대입해보면 답이 나올 때도 있는데, 그것은 꾀로 푼 것이지 수학 실력을 키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지요.
최근의 출제 경향에 맞게 책의 형식을 싹 바꿀 생각은 안 해봤어요. 출제 형식이 주관식이든 객관식이든,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문제 유형이 무엇이든 간에 수학은 기본기가 탄탄해야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의 정석>이 만들어진 목적 자체가 문제를 찍는 요령이 아니라 수학의 기본기를 가르치려는 것이므로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질문들은 ‘골라라’가 아니라 ‘풀어라’ ‘구하여라’ ‘증명하라’ 하는 식입니다. 지루하고 진부하다는 이유로 문제 푸는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습니다.
책 자체가 그렇게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입시 출제 경향이 어떻든 간에 일단 <수학의 정석>으로 자습을 하고서 나중에 다른 문제집을 보는 게 학생들의 수학 공부 패턴으로 굳어져버린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