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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더쿠: 100년 기업 ‘파일럿’의 인쇄 광고

“써보았다. 내 목소리가 들렸다”

이해원 | 378호 (2023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100년 이상 필기구 사업을 해온 일본 기업 ‘파일롯(Pilot)’사는 지금도 한 장짜리 인쇄 광고를 통해 손으로 글을 쓰는 것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2016년에는 ‘쓰는 사람은 천천히 살아간다’는 카피를 통해 쓰는 사람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며, 그 시간은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2019년의 카피는 다소 공격적이다. ‘울까, 먹을까, 쓸까’. 어쩐지 화가 나 보이는 여인의 옆얼굴 위로 무심하도록 큰 글자로 쓰인 동사 세 개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으로 ‘쓰기’를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2021년 광고에서는 ‘써보았다. 내 목소리가 들렸다’라는 카피를 통해 손 글씨를 쓰는 행위가 주는 감정을 치유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10대 때 흥얼거린 노래를 사람은 평생 흥얼거린다.”

2009년 교환학생으로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 만난 광고 카피다. 이때부터 필자는 일본 광고에 빠졌다. 어린 시절에도 꿈이 ‘카피라이터’였지만 본격적으로 일본 광고 덕질을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꿈인 카피라이터가 되지는 못했지만 요즘도 필자는 문장을 수집한다는 마음으로 일본 광고를 찾아본다.

좋은 카피는 정말 많다. 하지만 필자가 중점적으로 덕질하는 광고는 프린트 광고다. TV 광고는 시놉시스와 장면들을 파악해서 전달하기에 깊고 다양하게 생각할 여지가 많지 않다. 하지만 인쇄 광고는 좀 더 시적(詩的)이다. 또한 한국에서는 인쇄 광고가 사양화했지만 일본에서는 여전히 인쇄 광고 파워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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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감상을 나눌 인쇄 광고는 100년 이상 필기구 사업을 지속해온 ‘파일럿(Pilot)’사의 작품이다. [그림 1]에 있는 2016년 ‘쓰는 사람은 천천히 살아간다’는 카피의 광고를 살펴보자. 쓰는 사람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며, 그 시간은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휴대폰 문자, 메신저, e메일 등을 통해 수많은 글을 쓰지만 진정한 글의 가치란 손으로 시간을 들여 써내려 가는 것임을 파일럿은 말하고 있다. 여기에 부드러운 필기감을 자랑하는 유려한 글씨체, 잉크의 농담으로 멋지게 쓰인 카피가 아날로그 시계와 매우 잘 어우러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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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에게 마치 편지를 띄운 것 같았던 2016년 광고를 지나 2019년에는 메시지의 강도가 세졌다. [그림 2]의 2019년 파일럿 광고의 카피는 매우 짧고 굵다. ‘울까, 먹을까, 쓸까’. 이 카피를 보자마자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세 가지의 동사가 어우러져 리드미컬한 운율을 빚어냈던 그 느낌.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동사가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제목이었다. 파일럿의 광고 카피도 꼭 그런 울림을 줬다.

어쩐지 화가 나 보이는 여인의 옆얼굴 위로 무심하도록 큰 글자로 쓰인 동사 세 개. 화가 나서 분하면 울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고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 중 어떤 것일까?

회사에서 일이 폭풍처럼 밀려들 때 필자는 잠시 자판기에서 손을 내려놓고 수첩을 꺼낸다. 그리고 오늘 할 일에 대해 적어 내려가고 폭발하려는 마음을 다잡아 우선순위를 정한다. 신기하게도 펜을 들면 화가 난 마음이 누그러진다.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으며 급여 노동자로서 이 상황을 가능한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객관적인 의무만 남는다. 아무렇게나 적는 수첩에는 가끔 일을 하다 만나게 되는 멋진 글귀를 한두 문장을 적으면서 밸런스를 맞출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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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의 2021년 광고는 좀 더 상냥해졌다. 어찌 보면 난폭해 보였던 큰 글자를 줄여 굵기도 속삭이듯이 얇아졌다.

감정이 종이에 옮겨지는 일기조차 내가 직접 손으로 옮겼을 때 언어로 표현된 문장이나 어투는 조금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때 나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쓰는 행위 자체가 나를 치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스트레스를 덜어내는 데 도움을 주고 복잡한 생각을 다이어트하는 데도 손으로 쓰는 것은 효용이 있다는 걸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이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사고나 창조, 기록 등 인간 특유의 문화와 깊이 연관돼 있다. 그러기에 파일럿은 각각의 시대에 걸맞은 필기구를 통해 소비자가 ‘사고하는 것’, 나아가 ‘창조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홈페이지에서 밝힌 바 있다.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디지털화 영향으로 필기구를 둘러싼 환경은 크게 변했지만 파일럿이란 기업은 “사람과 창조력을 연결한다”는 기업 목표를 재설정했다. 오늘 잠시 짬을 내어 펜을 든 손이, 당신을 창조의 문으로 인도하기를 기대해본다.



편집자주
이해원 작가의 ‘한 줄의 카피, 영원한 울림’ 기사는 한 분야에 천착해 전문가가 된 ‘덕후’들의 브랜드 이야기를 전하는 플랫폼 ‘브랜더쿠(http://www.brdq.co.kr/)’를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정리=장재웅 기자 jwoong04@donga.com
  • 이해원 | 작가(일본 프린트 광고 덕후)

    필자는 일간지 기자로 치열히 살다가 평범한 회사원이 됐다. 여전히 읽고 쓰는 것에 천착하고, 외국어로 사고를 확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세상의 명언, 짧은 글이 주는 영감을 사람들과 나누는 데 관심이 많다.
    inky.ju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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