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친일매국 대신’ 김홍집? 사그라드는 국운 안고 ‘할 일’한 비운의 리더십

198호 (2016년 4월 lssue 1)

Article at a Glance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은 망국을 향해 치닫던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 최선을 다해 재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때로는명성황후 시해의 주범 중 하나로 몰리기도 하고친일매국대신으로 몰려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최근 그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나오고 있다. 김홍집이 활동하던 조선은 무능한 보스, 비전의 상실, 팽배한 보신주의, 인재 이탈, 파벌싸움, 변화에 대한 저항, 전시행정 남발 등 망국의 징조로 가득했다. 오늘날 망하는 기업의 특징도 이와 다르지 않을 텐데 이때 2인자는 신속하고도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충언하며 그런 상황과 싸우든지, 아니면 미련 없이 자리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선택지도 있다. 어떻게든 조직의 생명을 유지하며 시간을 버는 것. 자리를 지키며 일상의 행정업무들을 처리하는 것. 조직과 구성원들을 위해 누군가는 해줘야 할 일이다. 이리되면 그 역시 나라를 망하게 하고 기업을 쓰러트렸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사람들은 그의 고뇌를 이해해줄 것이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211일 오전 7, 국왕과 왕태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기 위해 비밀리에 궁을 떠났습니다. 이들은 여자들이 쓰는 덮개가 달린 가마에 탔기 때문에 궁궐 수비병들의 주의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계획을 함께 짠 러시아 대리공사 드 스페이어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제물포에 정박한 전함에서 100여 명의 병사와 대포 1문을 공사관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중략) 211일 오후, 경찰에 체포되었던 내각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가 감옥문 앞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이들의 시체는 길에 끌려 다니면서 백성들에 의해 처참하게 절단되었습니다. 다음날 내려진 국왕의 칙유에 따르면 문제의 두 대신은 법에 따라 재판 받기 위해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민중들의 손에 잡아 채여 살해되었다고 합니다.1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물어본 모든 조선인들은 이들이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시신도 경찰에 의해 민중의 손에 넘겨졌다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2

 

1896 215, 주조선 프랑스공사 G. 르페브르가 프랑스 외무부장관에게 발송한 보고서의 내용이다. 211일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총리대신이었던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이 피살되는 등 조선에 정변이 발생했다는 것으로, 이른바아관파천(俄館播遷)’에 대한 보고다.

 

아관파천은 을미사변 이후 강해진 고종의 반일감정이 친러파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이뤄진 것으로 이 사건으로 기존의 친일 내각은 붕괴된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3 에 따르면 고종의 파천 소식이 전해지자 신변의 안전을 우려한 주변 사람들이 김홍집에게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죽었으면 죽었지 어찌 박영효처럼 역적이란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4 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종을 알현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다 고종의 처형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온 경무관에게 체포됐고, 곧바로 살해됐다고 한다. 그를 죽인 것이 경찰이냐, 군중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데 이 사건을 상세히 기록한 <매천야록>과 프랑스 공사관, 일본 공사관의 문서를 종합해볼 때 김홍집은 경찰에 의해 먼저 살해된 후 그 시신이 백성들에게 공격당한 것으로 보인다.

 

<매천야록>경찰이 이 두 사람을 살해한 후 그 시체를 길거리에 널어놓자 도성 사람들은 단발령을 주장한 김홍집을 원망하며 돌과 기와 조각을 그 시체에 던져 살이 터지고 찢어졌으며, 그 시체를 베어 그대로 먹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일본 공사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가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를 보면김 총리가 러시아 공사관에 가서 고종을 알현하려고 했으나 경무청에서 파견된 순검이 총리를 압송하여 경무청에 구인했습니다. 또한 순검 수십 명이 정 농상공부의 저택으로 가서 그를 붙잡아 경무청에 구인했습니다. 이후 경관들은 김 총리를 경무청 문 앞으로 끌어낸 다음 발로 차서 쓰러뜨리고 수명이 일제히 가슴과 등을 칼로 찔렀습니다. 이어 정 농상공부를 끌어내 한칼에 참살하고 두 시체의 다리 부분을 거친 새끼줄로 결박해서 종로로 끌고 와대역무도(大逆無道) 김홍집 정병하라고 크게 써 붙여놓았습니다. 그러자 길 위에 가득 차 있던 보부상들이 각기 시체를 향해서 큰 돌을 던지기도 하고, 또 발로 짓이겨서 시체를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이번 사변에서 특히 김홍집과 정병하 두 사람이 학살을 당한 것은 작년 왕비가 폐위됐을 때(을미사변으로 왕비가 시해된 직후 빈으로 강등됐던 것을 말함) 두 사람이 이를 주도했기 때문이라 합니다5 라고 돼 있다.

 

요컨대 김홍집을 살해한 것은 국가기관인 경찰이고 이는 고종의 지시에 의한 것이다. 김홍집에게 백성들의 분노가 쏟아진 이유는 그가 을미사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단발령등 백성의 반발을 산 을미개혁을 주도했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만이 전부였을까? 도대체 그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같은 비극을 당하게 됐을까? 그는 이처럼 죽어 마땅한 인물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고종은 거듭된 그의 사직상소를 반려했고, 때론 밤을 새워 강권하며 그에게 총리대신을 맡겼던 것일까?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김홍집은 1842(헌종8) 숙종의 장인 김주신의 5대손이자 참판 김영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7(고종 4) 과거에 급제한 그는 승정원과 승문원, 훈련도감 등에서 초창기 관직생활을 보냈는데, 특히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承文院)의 박사를 오래 겸직한다. 이후 외교 분야에서 나타난 그의 독보적인 커리어의 출발점이다. 또한 이 시기에 김홍집은 개화사상의 거목인 박규수(朴珪壽, 1807∼1876)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홍영식, 김윤식, 박정양 등 훗날 개화파의 주역들과 교유했다.

 

 

 

 

그러던 1880년 예조참의 시절, 강화도조약6 의 세부 이행사항을 협의하기 위한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그의 이름은 조야에 널리 알려졌다. 일본에서 귀국한 김홍집은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한 일본의 모습을 상세히 설명한다. 이때 고종이화란(和蘭, 네덜란드)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어떤 나라인가?”라고 묻자 김홍집은서양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로서 영토가 우리나라의 4분지 1에 불과합니다라고 답했고, 고종이 다시나라가 그처럼 작은데 무슨 방법으로 강국이 되었는가?”라 묻자 김홍집은국력이 강한 것은 영토가 크건 작건 관계없이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고 실제(實際)에 힘쓰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7  약소국인 조선도 노력하기에 따라서 충분히 부강해질 수 있다는 의견을 표명한 것이다. 그러면서 김홍집은 주일 청나라 공사관의 황준헌으로부터 받아온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고종에게 올렸는데 이 책이 커다란 후폭풍을 가져오게 된다.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은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친중국 결일본 연미국(親中國結日本聯美國)’의 외교정책을 통해 세력 균형을 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미국과 수교해야 한다는 것은 조선으로 하여금 본격적인 개방에 나서라는 촉구였는데, 당시 보수 유학자들은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조선책략>을 가져온 김홍집에 대해서도 나라를 오랑캐에게 팔아먹으려 한다는 파상공세가 이어졌다. 김홍집이 주한 일본공사 하나부사와 협상을 벌여 인천 개항의 시기를 20개월 늦추는 등의 성과를 올렸지만 보수파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는 일시적으로 조정에서 퇴진해야 했다.

 

 

이후 김홍집은 개화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설치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통상 문제를 담당하는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가 됐고 1882 46일 미국, 421일 영국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에서 실무 책임을 맡았다. 임오군란을 수습하며 일본과 맺은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청나라와 체결한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서도 그가 전권 부관이 돼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이어 1884년 예조판서 겸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로서 외교수장이 된 그는 인천 제물포에 조계지(외국인 거주지)를 설치하는각국조계장정(各國租界章程)’ 체결,8 독일과의 수호통상조약 비준,9  일본과일본인재조선국간행이정조약부록(日本人在朝鮮國間行里程約條附錄)’10 을 의정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김홍집은 사실상 조선이 개항과정에서 맺은 모든 조약을 책임진 셈이다.

 

그런데 같은 해 겨울,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자 김홍집은 외교적 수습을 위해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만나야 했다. 본래 갑신정변은 일본 공사관이 조선 내정에 개입해 벌어진 정변으로 엄밀히 말하면 조선이 일본 측에 책임을 물어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일본군이 청군의 공격을 받고, 일본 공사관이 조선 백성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일본 거류민이 피살되는 등 일본이 입은 피해가 크자 일본은 자신들이 피해자라며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게다가 일본군이 개입한 것은 어쨌든 고종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절차상의 하자도 없었다. 청불전쟁을 벌이고 있던 청나라도 일본과의 다툼을 원치 않았다. 이에 일본은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한양에 진입해 조선을 압박했고, 조선은 김홍집을 전권대신으로 삼아 협상에 내보낸 것이다.

 

협상의 결과 체결된한성조약(漢城條約)’은 굴욕적이었다. 김홍집은 일본이 주장한 거액의 배상금을 삭감하고 공사관에 호위병 1000명을 주둔시키겠다는 요구를 철회하는 등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굴욕 협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조선 정부로서도 여론의 분노를 돌릴 희생양이 필요했고 말이다. 이 기간 그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으로 빠르게 승진했지만 이내 판중추부사라는 한직으로 체직됐고 수원유수로 좌천되기도 한다. 일시적으로 좌의정 겸 내무대신을 맡았던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9년여 동안 정국의 중심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김홍집이 정계에 복귀한 것은 1894년 일본에 의해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되면서다. 일본은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8000명의 군대를 한양에 집결시키고 청과 전면전을 벌이는 한편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했다. 말이내정개혁이지 실상은 청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조치였다. 고종은 교정청(校正廳)이라는 자체 개혁기구를 설치하고 이를 명분으로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일본은 723일 일본군 1개 여단을 동원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고 반일 성향을 보이던 민씨 척족정권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운현궁에 칩거하고 있던 대원군을 입궐시키고11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신설, 김홍집을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로 하는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것이 소위 '1차 김홍집 내각'이다.

 

군국기무처 총재가 된 김홍집은 주로 관제 개혁에 치중하는데 중앙 행정기구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2원화하고 어지럽게 산재한 각 기관들에 대한 통폐합 작업에 돌입했다. 6조를 8아문으로 확대했고, 영의정도 총리대신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김홍집은 조선의 초대 총리대신에 취임한다. 또한 국왕의 인사권을 대거 각 아문대신들에게 이양했고 국왕의 재정권과 군사권도 상당 부분 내각으로 돌렸다. 입헌군주제에 준하는 개혁을 단행한 것인데, 고종으로서는 매우 못마땅한 조치였을 것이다.

 

이 밖에도 김홍집 내각은 경찰기구인경무청(警務廳)’을 신설하고 과거제도를 폐지했으며 근대적 교육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반포했다. 은본위 화폐제도를 시행하는 등 경제 부문에서도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개혁정책들이 상당 부분 자율적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대대적인 개혁과 함께 일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정들도 함께 이뤄진 것이다. 경부, 경인철도부설권이 약속됐고, 목포가 추가로 개항됐으며, 일본의 경복궁 강점에 대해서도 면죄부를 줬다. 이에 여론은 크게 들끓었고 수문장 김기홍은 김홍집을 비롯한 매국간신 8명을 참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12

 

하지만 이러한 이득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만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의 거물 정치인이자 메이지유신의 원훈으로 불렸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직접 주한일본 공사로 부임하며 자신이 기초한 내정 개혁항목 20개 조를 시행하라고 요구한다. 이노우에 공사는 동학세력과 연계해 일본에 대항하려던 대원군을 끌어내리고 일본에서 귀국한 박영효(朴泳孝, 1861∼1939)를 내부 대신으로 입각시켰다. 박영효와 김홍집의 연립내각, ‘2차 김홍집 내각이 출범한 것이다.

 

2차 김홍집 내각은 근대적 헌법이라 할 수 있는홍범(洪範) 14를 선포하는 등 내정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노비제 폐지, 민법과 형법을 강조한 사법 분야에서 개혁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김홍집은 큰 과오를 연달아 범했다. 항일을 외치며 재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해달라고 일본에 요청했는가 하면 이노우에의 뜻에 따라 개혁을 추진하겠다는맹세서한[誓言]’을 보내기도 한다. 조선을 경제적으로 예속하기 위해 일본이 추진한 300만 엔 차관계획을 나서서 수용하기도 했다.13  친일파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후 김홍집은 박영효와의 갈등으로 인해 잠시 내각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총리대신에 발탁됐다. ‘3차 김홍집 내각인데 주로 친러, 친미파 각료로 구성됐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열강은 일본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동북아 국제질서에 개입했고, 이에 따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도 약화되는 듯 보였다. 고종은 이 기회를 노려 왕권 강화와 일본 견제에 나섰고 이를 위해 친러파를 중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친일파로 분류되고 있던 김홍집이 총리가 된 것은 당시 조선을 둘러싼 엄혹한 국제 질서 속에서 외교적 식견을 갖추고 수상의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이는 그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홍집은 극구 사양했지만 고종의 간곡한 부탁을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는 실권을 제약당하고 상징적인 총리에 머물렀다.

 

 

이러한 김홍집의 위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에 의해 왕비가 잔인하게 시해당하는 을미사변14 이 일어나면서 다시 변화한다. 을미사변을 저지른 일본은 친러, 친미파 대신들을 해임하고 친일 내각을 출범시켰다. ‘4차 김홍집 내각이다. 김홍집 내각은을미개혁으로 불리는 개혁조치들을 단행했는데 양력 사용, 국가예산제도 채택 등이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런데 개혁 중단발령은 조선 사회에 거센 반발을 가져왔다. 고종 또한 머리를 깎아야만 했는데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자신의 신체 모든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조선의 백성들에게 이는 가치관, 윤리관을 송두리째 흔드는 위협이었다. 더욱이 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의 진상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일본에게 유리하도록 사건을 왜곡했다. 심지어 위조된왕비폐위조칙을 발표하기까지 한다.15  이로 인해 김홍집 내각은 고종과 백성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됐고 주한 외교 사절들로부터도 거센 항의를 받았다. 내각의 권위와 도덕성이 땅에 떨어진 것이다.

 

김홍집 내각의 실책이 이어지자 전국 곳곳에서는 의병이 일어났다. 단발령을 결사반대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고 외친 의병들은 대대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친일파로부터 국왕을 구하겠다는 친위 쿠데타인춘생문(春生門) 사건16 도 벌어졌다. 김홍집 내각이 뿌리째 흔들리는 가운데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함으로써 결정타를 날린 것이다. 그리고 서두에 기술한 대로 김홍집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아관파천 후 법부대신 조병식이 올리고 고종이 인가한 서류에 따르면 김홍집의 죄는 ① “갑오경장 이후 외교를 빙자하여 군주의 권한을 빼앗는가 하면 일당을 규합하여 음모를 꾸몄고” ② “820일에 일어난 변란(을미사변)의 우두머리이며 ③폐후조서를 내리도록 했고” ④ “대원군에게 함부로 서명을 받아내어 법령을 반포했으며허위조서로 단발령을 화급히 서둘렀고, 임금의 머리를 강제로 깎은 것이다.17  고종은 갑오년과 을미년에 걸쳐 단행된 개혁안 중 상당수를 폐지하고 원상회복 방침을 밝혔는데, 그 명분을대역죄인 김홍집이 왕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추진한 것이기 때문으로 돌렸다. 그런데 이 중 ①번과, 즉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의 조치들은 모두 고종이 승인했다. 이런데도 고종은 자신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 마냥 말을 바꿨고 김홍집이 모든 악의 원흉이 된 것이다.

 

물론 김홍집이 일본의 대조선 정책에 협력하고 을미사변의 진상을 덮으려 하는 등 중대한 과오를 범한 것은 분명하다. 단발령처럼 조선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개혁시도로 실패를 자초한 점도 있다. 하지만 그가 정말 만고의 대역죄인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인물이었을까? 친일파에 엄격했던 황현은 그에 대해김홍집이 비록 일본과 화합할 것을 주장하여 청의(淸議)에는 배치되었지만 그는 국가를 위해 심력을 다하였고 재간도 다른 이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그가 살해된 후 매우 애석하다는 여론이 있었다18 고 기록했다. 독립지사이자 역사가인 박은식도 김홍집을 걸출한 정치가로 평가했다.19  그가 친일적인 입장에 섰던 것은 조선의 개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을 얻고, 일본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의에 어긋나고 잘못된 생각일지언정 조선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위해 헌신한 그의 노력은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황현은 김홍집을 비판하면서도우리들이 구시대의 제도를 개혁한 소인(小人)이 되어 청직(淸直)한 여론에는 죄를 지었지만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 되어 후세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니 일시의 부귀만 생각하지 말고 각자가 노력해야 합니다라는 김홍집의 말을 소개한다. 나라를 위한 그의 열정만큼은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과오만 없었다면 김홍집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일본에 대항하며 독립자주노선을 견지하고 안정적인 개혁을 추진했더라면 그는 실패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망국을 향해 가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바꾸기에 그 한 사람의 힘은 역부족이었다. 강력한 외세들에 둘러싸여 나라의 존망이 바람 앞에 등불과도 같던 그때, 국왕은 오로지 왕권을 유지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고 신하들은 친청파, 친일파, 친러파로 갈려 극심한 당쟁에 몰두했다. 공동체의 앞날보다는 자신의 이익만을 중요하게 여겼다. 김홍집이란 사람 자체도 한계가 있었다. 철학이나 신념이 확고하지 못했고 외부 상황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줏대 없는 면모를 보였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탁월한 외교관이자 행정가가 됐을지 모르지만 난세를 감당하기에 그는 너무나 나약한 인간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1인자를 잘못 만났다. 고종은 갑신정변과 동학농민혁명, 갑오경장, 을미사변 등 위태로운 상황이 올 때마다 김홍집을 불러 위기관리의 중임을 맡겼지만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라주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국면이 바뀌면 언제든 말을 뒤집었다. 아무도 떠맡지 않으려는 어려운 일을 기꺼이 맡아준 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곤 했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고 모든 잘못은 2인자인 김홍집이 저질렀다고 규정했다. 을미사변 이후 이어진 김홍집의 정책에 단 한마디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으면서 아관파천이 일어나자마자 그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린 것이 대표적이다. 만일 고종이 김홍집에게 이견을 제기했더라면 고종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김홍집은 어떻게든 고종의 뜻을 반영하고자 움직였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종은 참으로 비겁했다.

 

역사 속 재상들의 유언을 보면나는 자질이 평범하기 때문에 폭군을 만났다면 그의 주구가 되었겠지만 성군을 만난 덕에 이름을 보전하게 되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1인자에 대한 의례적인 상찬으로 들리지만 이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훌륭한 1인자를 만나게 되면 다소 평범한 2인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강점을 발휘해 큰 공을 세우게 되고, 나쁜 1인자를 만나면 좋은 자질을 가진 2인자라 할지라도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실패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목격해왔다. 나쁜 1인자를 만난 평범한 2인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2인자가 어떤 능력을 발휘하느냐, 그래서 어떻게 기억되느냐는 결국 1인자에게 달린 것이다.

 

그렇다면 2인자의 입장에서 1인자를 잘못 만났다고 판단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나 조직 역시 망해갈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라면. 김홍집이 활동하던 조선은 무능한 보스, 비전의 상실, 팽배한 보신주의, 인재 이탈, 파벌 싸움, 변화에 대한 저항, 전시행정 남발 등 망국의 징조로 가득했다. 오늘날 망하는 기업의 특징도 이와 다르지 않을 텐데 이때 2인자는 신속하고도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목숨을 걸고 충언하며 그런 상황과 싸우든지, 아니면 미련 없이 자리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선택지도 있다. 어떻게든 조직의 생명을 유지하며 시간을 버는 것. 자리를 지키며 일상의 행정업무들을 처리하는 것. 조직과 구성원들을 위해 누군가는 해줘야 할 일이다. 이리되면 그 역시 나라를 망하게 하고 기업을 쓰러트렸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사람들은 그의 고뇌를 이해해줄 것이다.당대에친일매국대신으로 비난받던 김홍집이 쓰러져가는 나라를 지탱하고자 분투노력한 비운의 정치가로 재평가되는 것처럼.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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