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똑똑하고 독선적인 정조의 채제공, ‘예스맨+α’로 차선의 국정 이끌었다

191호 (2015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정조는 1인자로서는 굉장히 까다로운 유형인똑똑하고 부지런한 리더였다. 웬만해서는 2인자인 재상들이 정조의 맘에 들기가 어려웠는데 채제공은 정조로부터 신뢰를 받았고 앞장서서 정조시대의 개혁 어젠다를 추진해나갔다. 그는 정조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지만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예스맨은 아니었다. 하지만 임금을 절대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자기 고집이 강하고 다른 이들의 일처리에 안 그래도 불만이 많은 정조에게 직접적인 비판을 가할 경우 오히려 고집을 꺾지 않고 잘못된 일을 밀어붙이는 역효과가 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채제공은 주로 일의 각론이나 정책의 시행방법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형태로 간언을 했다. 채제공은 정조가 이야기한 A안에 동의할 수 없을 때에는 “A가 아니라 B가 맞다고 말하지 않고 “A가 맞지만 A+1 혹은 A-1로 하면 더 나아질 것 같다고 말하는 방식을 활용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1인자를 보좌하는 입장이라면 이 방식은 조직을 위한 올바른 결정을 위해서든, 1인자와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해서든 매우 좋은 방법이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직장인들이 쓰는 약어 중에똑게, 똑부, 멍게, 멍부라는 말이 있다. 상사의 유형을 네 가지로 구분한 것인데 순서대로똑똑하고 게으른상사, ‘똑똑하고 부지런한상사, ‘멍청하고 게으른상사, ‘멍청하고 부지런한상사를 말한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참모총장을 지낸 쿠르트 폰 하머슈타인-에쿠오르트(Kurt von Hammerstein-Equord) 장군이 1933년에 출판한 ‘<지휘교범>’ 나는 장교들을 똑똑하고, 게으르고, 부지런하고, 멍청한 네 부류로 나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중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영리하고 근면한 자들은 고급 참모 역할에 적합하다. 멍청하고 게으른 자들은 전 세계 군대의 90%를 차지하는데 이런 자들은 정해진 일이나 시키면 된다. 영리하고 게으른 자들은 어떤 상황이든 대처할 수 있으므로 최고 지휘관에 적합하고, 멍청하고 근면한 자들은 위험하므로 신속히 제거해야 한다1 라는 대목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똑똑하고 게으른 사람이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보다 선호된다는 점이다. 아마 그가 한 사람의 개인이라면 똑똑하고 부지런한 쪽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리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보스인 이상 그를 모시는 부하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똑똑하고 부지런한 보스는 똑똑하기 때문에 부하들이 그의 지적 수준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부지런하기 때문에 그의 업무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역량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부하가 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개입해서 시시콜콜 코치하기도 한다. 모든 일을 세세한 것까지 자기가 직접 관장하려 드는 소위만기총람형 지도자는 바로똑똑하고 부지런한유형에서 등장해왔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정조, 그가 인정한 재상

 

 

 

조선의 임금들 중에서 이 유형(똑똑하고 부지런한)에 속하는 군주는 정조다. 그는 군사(君師, 임금이자 스승)를 자임하며 신하들에게 유교경전을 강의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학문은 작은 완성에 만족하면 안 된다. 더욱 힘써 정진하면서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탄식해야 한다.” “혹시라도 단 한 점의 치우친 생각이 생기면 치열하게 성찰해 단속해야 한다2 라고 되뇌며 언제나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정무를 보느라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않고, 며칠 밤을 지새우면서 옥안(獄案)을 검토하는 등 그의 근면함도 감히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자신이 모든 업무를 관할해야 마음을 놓았다. 그는내가 비록 덕이 모자라지만 의리에 관계되는 문제는 한번 중심을 잡은 다음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신하로서 누가 감히 그에 반대하여 나를 이기려는 생각을 가질 것인가. <서경>에 이르길오직 군주만이 극(, 정치의 기준)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는가3  라며 군주 중심의 정치관을 피력한다. “내가 혹 잡다한 업무를 보기도 하나 이 어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겠는가라고도 했다. 정조는 자기가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살피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어서라고 말한다. 당시의 정치상황이 워낙 좋지 못한데다 신하들은 무사안일에 빠져 있어 믿고 맡길 사람이 없으니, 부득이하게 직접 나서서 만기를 총람한다는 것이다.4 이것은똑똑하고 부지런한리더들이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한데, 즉 다른 사람들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며 답답해하느니 차라리 자기가 직접 도맡아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정조를 모시는 신하들은 어땠을까. 특히 수석참모인 재상은 정조와 어떻게 관계설정을 맺었고, 또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했을까. 이상의 정조에 대한 소개만으로도 정조 밑에서 재상 노릇 하기란 참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똑똑한 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대의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아버지 사도세자 문제, 여러 차례의 암살 위협 등으로 의심도 많았다. 즉위 초기의 권력기반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왕권을 공고히 하는 일에 집착하다시피 했다. 보좌하기에 무척 까다로운 1인자였을 것이고, 이런 정조 밑에서 2인자의 재상은 자연 운신하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게다가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재상의 임명과 해임을 전략적으로 운용했다. “나는 정승을 등용해서 일을 맡겼다가 해임해 내보내고, 다시 등용하고 하는 주기를 대체로 8년으로 해왔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8년이나 쉬기 때문에 세월을 낭비하게 되는 점이 있으나 반드시 쉬게 한 다음에 썼던 이유는 단지 상황이 그러해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을 위해 신망을 기르는 방안이었다. 쉬는 동안 잘 쉬고 잘 처신하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5 재상에게 일부러 고난을 주었다는 것이다. 정조의 말처럼 시련을 줌으로써 그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재상을 진퇴시킬 수 있고 힘들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왕권에 대한 복종을 유도한 것이다.

 

정조 재위 기간 동안 재상을 지낸 인물은 20여 명인데 이 중 영의정들에 대해서는 정조가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겼다. “나라에 정승을 두는 일은 무겁게 생각하고 신중해야 한다. 더군다나 영의정은 일반 대신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내가 보위에 있은 지난 20여 년의 세월 동안 영의정의 직책을 맡겼던 사람을 꼽아보면 채 열 명이 되지 않는다. 한 장의 상소를 올려 먹구름을 밀치고 어두운 거리 위를 해와 별처럼 밝힌 충헌공 서명선(徐命善, 1728∼1791)이 있고, 일의 조짐을 미리 환히 살펴 혼란한 가운데 나라를 위해 헌신한 문안공 정존겸(鄭存謙, 1722∼1794)이 있다. 효제(孝悌)를 독실하게 실천한 자로는 문정공 김익(金?, 1723∼1790)이 있고, 효안공 홍낙성(洪樂性, 1718∼1798)은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다. 평소 자신의 소신을 지켰던 자로는 문숙공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꼽을 수 있다.”6

 

정조가 거론한 사람 중 정조시대 정치의 중심축은 서명선과 채제공이었다. 여기에 더해 영의정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정조가 채제공과 더불어 3대 재상으로 언급한 바 있는 김종수(金鍾秀, 1728∼1799)와 윤시동(尹蓍東, 1729∼1797)이 포함된다.7 서명선은 소론의 영수로서 세손이던 정조를 보호하고 임금으로 즉위하는 데 크게 공헌했고, 세손 시절 정조의 사부를 맡았던 김종수는 노론 청명당을 이끌며 역시 정조의 안정적인 보위계승에 기여했다. 윤시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모두 나머지 한 사람인 채제공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명선은신과 채제공은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고 사세(事勢)상 나란히 설 수 없습니다8 라며 채제공을 배척했고, 김종수도어느 시대인들 난신적자가 없었겠습니까마는 마음을 쓰는 것이 이처럼 흉악하고 사특하며 참혹한 해악을 지님이 어찌 이 역적(채제공을 가리킴)과 같은 자가 있었겠습니까9 라고 극언을 한 바 있다. 윤시동 역시 채제공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10 이 세 사람의 주장처럼 채제공은 정말 나쁜 신하였을까?

  

 

1720(숙종46),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채제공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남인이다. 남인은 숙종 때 갑술환국으로 중앙정계에서 몰락했기 때문에 채제공 또한 요직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운이 따른다. 영조는 탕평정치를 펼치기 위해 조정 내에 청남(淸南)11 세력의 활동공간을 만들어주었는데 이때 오광운(吳光運, 1689∼1745)을 대표로 삼아 지원했다. 오광운은 이인좌의 난을 맞아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노론 입장에서도 반대하기 힘든 카드였다. 채제공은 바로 이 오광운의 제자가 된다. 그가 청요직인 예문관 한림이 되고 사관에 선발된 것은 오광운의 정치노선을 유지, 계승시키려 한 영조의 배려였다. 직전 아티클에서 다룬 바 있는 소론 재상 조현명은 이를 두고한림을 선발하는 방식을 고쳐 남태회(南泰會, 1706∼1770, 북인)와 채제공과 같은 사람을 얻었으니, 만약 옛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이 사람들이 어떻게 관리가 됐겠습니까12 라고 평가했다. 영조의 탕평정책이 없었더라면 채제공은 관직에 오르지도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채제공은 이후 충청도 암행어사를 거쳐 1758(영조24)에 도승지에 임명됐고 대사간, 대사헌, 경기감사, 홍문관 제학, 함경도 관찰사, 한성판윤 등 핵심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병조와 예조, 호조판서를 지냈고 왕세손을 보호하는 세손우빈객도 맡는다. 이는 채제공의 중용이 단순히 탕평책에 따른 관직 배분의 차원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조정 내에 세력이 전무하다시피 한 남인 출신으로서 이런 요직을 맡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의를 달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업무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채제공은 도승지 시절 사도세자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영조는 왕세손인 정조에게 채제공을 지적해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 말했다고 한다.13 훗날 정조의 각별한 지우를 입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정조 즉위 후 채제공은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홍인한과 김상로, 홍계희 등 과거 정권인사에 대한 단죄 작업을 맡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련이 닥친다. 정조의 핵심 측근이자 실권자였던 홍국영(洪國榮, 1748∼1781)이 실각하면서 그와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은 것이다. 채제공은 이때 사직하고 7년간의 은거생활을 택했다. 그러다 1788(정조12) 211일 전격적으로 우의정에 발탁됐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으로 승진한다.14 좌의정으로 재임하면서 그는 영의정과 우의정 없이 혼자 재상으로 있는, 소위독상(獨相)’ 체제를 3년이나 이끌었다. 남인이 정승이 된 것은 근 100년 만이었고, 독상체제도 매우 드문 케이스였기 때문에 조정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론은 연일 채제공을 흔들었다. 하지만 정조는 1793(정조17) 채제공을 영의정에 임명했고 그 뒤 우의정과 좌의정을 차례로 다시 맡긴다. 채제공은 1798년에 사직, 다음 해인 1799년에 세상을 떠났다. 채제공이 죽자 정조는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격과 기개를 가지고 어떤 일이 닥쳐도 주저 없이 담당해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고 추모한다.15

 

이렇듯 채제공의 이력과 정조의 평가로 봤을 때 그는 일국의 재상으로서 손색없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정조 정도 되는 군주가 아무나 재상으로 데리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서명선과 김종수, 윤시동 등 정조의 시대를 대표했던 다른 정승들은 극단적인 언어까지 사용해 가며 채제공을 배척했을까. 그리고 채제공은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재상으로 계속 재임할 수 있었으며똑똑하고 부지런하여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정조의 마음에 들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우선, 채제공의 정치적 지향점과 이해관계가 정조의 그것과 부합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각 당파가 각기 자신의 주장을 선명하게 주장하도록 하는 준론(峻論)탕평책을 채택했는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붕당 간의 건강한 경쟁이 필요했다. 적절한 긴장 아래 붕당이 서로 경쟁하게 함으로써 각 붕당의 경쟁력을 키우고 정책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소 갈등과 대립이 발생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국가에도 이익이 되리라는 것이 정조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정조는 주류 세력인 노론과 대등하게 맞설 정도는 아니더라도 노론을 어느 정도나마 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반대세력을 바랐고, 이것이 조정 내 남인의 입지 확보를 꾀했던 채제공의 목표와 맞닿았다. 남인의 정치철학이 리()를 중시하고, 현실정치의라 할 수 있는 군주의 역할을 강조해왔다는 점에서 군주권 강화를 추구했던 정조의 호감을 사게 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채제공의 정치적 감각과 업적

 

재상이 된 채제공은 노론이 자신들은 무조건 옳다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었다고 비판하고, 노론은 무조건 군자이고 남인은 무조건 소인이다라는 등식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그에 따르면 어느 붕당이든 그 안에는 군자와 소인이 있기 때문에 이 중 군자를 분별해 각 당파의 군자들이 경쟁과 협력을 통해 정치를 펼쳐가야 한다. 이는 정조의 탕평론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채제공은 이가환(李家煥, 1742∼1801)과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남인 인재를 육성하고17 남인 계열의 유생들이 올린영남 만인소18 를 활용해 노론을 견제해 갔다. 사도세자의 신원과 남인의 등용을 요구한 영남 만인소는 1만 명이 넘는 유생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노론도 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이처럼 노론을 공격하고 남인의 세력화를 추진하는 채제공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노론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남인을 공동의 적으로 간주한 소론까지 합세해 채제공을 공격했다. 앞에서 소개한 서명선의 상소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채제공이 권력을 탐하고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정국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채제공은 히든카드를 꺼낸다. 노론이 금기로 생각하는 사도세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채제공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역적을 토죄하고 사도세자를 추숭하자고 주장했다.19 사실 노론 당파 전체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론 계열의 일부 척신들이 연관됐을 뿐이고, 노론 대신 중에는 사도세자를 보호하고 영조와 세자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도 많았다. 다만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고, 그를 신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 또는 방관해왔는데 그것이 노론이 주도하는 정국의 질서를 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사도세자가 복권된다면 그동안 이 문제를 방기한 노론이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했다. 반대세력에 의해 정치적 희생양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노론이 채제공에게 극단적인 언어를 쏟아내며 반발한 이유다.

 

노론은 채제공이 영조의 조치를 뒤엎는 반역을 저지르고 있다고 몰아붙였는데 채제공은금등(金騰)’으로 반격한다. 금등은 원래 <서경(書經)>의 한 편명으로 금으로 봉한 상자를 말한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일을 후회하며 그 심정을 담은 글을 써서 금등에 넣어뒀는데, 그것을 비밀리에 채제공에게 맡겼고 채제공이 이를 공개한 것이다. 이로써 채제공은 자신의 행동이 영조에게 반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영조의 참뜻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고, 노론도 왜 진작 거론하지 않고 지금에 와서야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고 비판할 뿐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론이 채제공 개인에 대한 분노까지 접은 것은 아니다. 당파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채제공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마음먹게 된다. 노론은 갖은 트집을 잡아 총공세를 감행하는데 그 양상이 매우 거칠었다. 함께 근무하는 동료 재상들까지 채제공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갈 수 없다며 역적으로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이때 채제공 또한 많이 지쳤을 것이다. 매일 산더미처럼 쌓이는 탄핵 상소 앞에서 그는 아마도 관직을 버리고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주 사직서를 내고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는데 그리되면 정조가 곧바로 채근했다. “내가 듣건대, 대신은 나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고 하였다. 다한다는 말은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고, 말을 하면 빠짐없이 모두 털어놓는 것을 뜻한다. 경이 만약 피폐하고 괴이한 습속에 혼난 적이 있어서 어물어물하면서 머뭇거리며 뒤를 돌아보고 뒷걸음질을 하는 것이라면, 이는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20  “나는 경을 원로로 예우하고 나라의 스승으로 대우하고 있다. 그렇다면 경은 직분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21 노론의 공격을 겁내지 말고 계속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달라는 것이다.

 

남인의 영향력 확대라는 목표가 있긴 했지만 사실 채제공이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고 노론을 공격한 주 이유는 정조를 위해서였다. 노론을 견제하며 정치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아울러 아버지를 복권하고 싶은 정조의 여망을 실현시켜주고자 그가 앞장선 것이다. 그럼에도 정조가 늘 채제공을 지켜준 것은 아니었다. 채제공에 대한 공격이 극심해지면 정조는 그를 삭탈관직했고 문외출송을 시키기까지 했다.22 물론 금방 다시 풀어주고 등용했지만 채제공 입장에서는 임금이 끝까지 나를 지켜줄지 의심스러울 노릇이었다. 그러나 채제공은 정조에 대한 충성을 거두지 않는다. “성인(聖人)이 나를 속이시는구나라며 정조의 스타일에 당혹해하기도 했지만 정조의 개혁 어젠다들을 책임지고 앞장서서 실현시켰다. 대표적인 것이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신해통공은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고, 정부 납품과 조공물품 조달의 책임을 맡고 있는 육의전23 을 제외한 부문에서 백성들의 자유로운 상행위를 허가한 조치다. 원래 조선 사회에는전안(廛案)’이라는 것이 존재했는데 상인의 이름, 주소, 취급물품이 기재돼 있는 서류를 말한다. 이 전안에 이름이 올려져 있어야만 도성 안과 도성 밖 10리까지의 지역에서 상품 매매 행위를 할 수 있었다. 특정 상품에 대한 전매권도 부여받았다. 전안에 이름이 없는데도 상행위를 한다면난전(亂廛)’, 곧 시장 질서를 교란시켰다는 죄목으로 처벌됐다.

 

국가에서는 이들 난전을 엄격하게 단속했는데 이는 시전(市廛) 상인24 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난전 상인들은 다량의 어물을 매점하고, 한양 근교의 소상품 생산자·소상인들과 연계해 농수산물·수공업 제품 등을 구입, 이를 도성 각처에서 백성들에게 직접 판매함으로써 시전의 기득권을 위협하고 있었다. 조정으로서는국역25 을 담당하는 시전상인들의 이윤을 보호해줄 책임이 있는데다가 시전에 혼란이 올 경우 바로 물가에 영향을 미쳐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진다고 판단했다. “난전으로 인해 시전이 쇠락해지고 시전이 약해지면 물가가 뛰어오를 것인데, 그리 되면 가난한 선비와 곤궁한 백성들이 어찌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26 난전을 엄히 규제할 뿐 아니라 시전상인에게 난전을 직접 단속할 수 있는 권한까지 준 까닭이다.

 

하지만 이 같은 난전 단속은 많은 문제를 낳는다. 일반 백성이 소소하게 사고파는 행위까지 일률적으로 금지하여 원망을 샀고, 시전상인에게 사적 단속권을 허가함으로써 생겨난 폐해도 컸다. 게다가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고, 도고업이 성장했으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는 등 경제 환경이 급속히 변모하는 상황에서 시전상인의 독점을 보호하고 여타의 상행위를 억제하는 것은 시대발전의 흐름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정조는 통공의 시행을 검토하지만 시전상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노론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머뭇거린다. 그러자 채제공이 통공시행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임금의 결심을 재촉하는 상소를 올렸다.그동안 난전을 금지하는 법을 시행해 온 이유는 육의전이 나라의 일을 부담하는 대신 이익을 독점하도록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빈둥거리며 노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며 스스로 가게 이름을 붙여 놓고 백성들의 일용 생활과 관련된 물품들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합니다. 크게는 말이나 배에 실은 물건부터 작게는 머리에 이고 손에 든 물건까지 길목에서 사람을 기다렸다가 싼값으로 억지로 사들이는데 만약 물건 주인이 듣지를 않으면난전이라 부르며 결박해 형조와 한성부에 잡아넣습니다. 이 때문에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본전도 되지 않는 값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팔아버리는 일이 잦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들인 물건을 배나 되는 값을 받고 파는데, 사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부득이하게 사지 않을 수 없을 때는 다른 곳에서는 물건을 살 수 없고, 오로지 그곳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야만 합니다. 청하옵건대 육전의 품목 이외에는 난전이라 하여 죄를 묻지 마시옵소서. 그리되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고파는 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27

 

몇 년 후에도 채제공은시전상인들이 금난전권을 철폐한 것에 항의를 하기에행상이건 좌판이건 내가 있고 상대에게는 없는 것을 서로 무역하는 것은 꺼릴 것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전안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고 하여 자기의 물건을 매매하는 것조차 구속하고 내쫓아서 도성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야단을 쳐서 물리쳤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런데도 “70여 명의 상인들이 수원까지 몰려와 소란을 피웠으니 시전의 백성들이 무엄하게 자신의 사리사욕만 챙기려는 풍습에 조정이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며 금난전권을 흔들림 없이 추진할 것을 강조한다.28 채제공이 신해통공 입안과 시행뿐 아니라 후속조치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총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채제공은 고령의 나이에 정조의 역점사업이던 화성축조 업무를 감독했는데, 이때 채제공이 올린축성 방략을 보고 정조는 크게 감동했다고 전해진다.29

  

 

‘똑부’를 보좌하는 2인자 처세의 모범사례

 

채제공은 임금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적이 드물었다. 간언을 통해 군주를 바로잡는 것을 재상의 제1 책무로 여기고, 임금이 듣기 싫은 말까지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조선 사회에서 이는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더욱이 같은 시기에 함께 재상으로 근무한 김종수는전하께서는 치우친 기질을 모두 바로잡아 고치지 못하였고, 사사로운 인욕(人欲)을 모조리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고도 거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뭇 신하들의 의견을 깔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할 말을 하는 기상이 사라지고 있습니다30 라며 정조의 독단적인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다. 자칫 조야에 채제공이 재상답지 못한 재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채제공이 정조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고는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예스맨은 아니었다. 채제공은 주로 일의 각론이나 정책의 시행방법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형태로 간언을 하고, 정조 개인의 태도나 자세 등에 대해서는 논평을 자제한다. 정조의 성향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흔히 정조와 같이 똑똑하고 부지런한 유형의 리더는 독선적이 되기 쉽다. 총명함을 믿다 보니 자신의 결정과 판단을 과신하고, 요구하는 수준이 높다보니 부하들이 내놓는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다. 결국 자신이 모든 일을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이러한 스타일의 1인자에게 섣부르게 직언을 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을 수 있는데,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부하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지적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성찰하기보다는 불쾌한 감정을 먼저 앞세우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인자에게 바른 말을 하고 1인자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은 2인자로서의 마땅한 책임이다. 이것은 1인자와 2인자 간의 관계적 측면에서뿐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다만 매끄럽게 해나가는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채제공은 정조가 이야기한 A에 동의할 수 없을 때, ‘A가 아니라 B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봤자 정조는 듣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고집을 피울지도 모른다. 대신 채제공은 A가 맞지만 ‘A-1’이나 ‘A+1’로 해야 더 나아질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정조의 자존심을 세워주면서도, 정조의 결정을 보완하고, 정조에게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유도한 것이다. 물론 소극적인 태도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차선의 방식은 될 것이다.

 

이러한 채제공의 스탠스는 1인자와 친밀한 관계를 설정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는데, 채제공과 같은 소수파 2인자가 믿을 곳은 1인자밖에 없다. 채제공이 정조의 뜻에 충실히 따랐고, 정조가 요구하는 일들을 앞장서 추진했으며,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거나 이해관계를 따지더라도 반드시 정조가 제시한 바운더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은 그래서이다. 정조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아무리 똑똑하고 부지런하다 해도 임금 혼자서 나라의 모든 일을 다 처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있으면서 임금의 꿈을 도와 함께 실현시켜줄 수 있는 신하, 채제공이다. 2인자의 처세라는 측면에서 채제공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김준태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1호 Data Privacy in Marketing 2021년 10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