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숙종시대=영의정 수난시대 권력투쟁에 끼어든 2인자들의 종말

185호 (2015년 9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영조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재위기간을 가졌던 숙종의 시대는영의정 수난 시대이기도 했다. 1인자인 왕이 주도하는 지속적인 환국 과정에서 당파 갈등은 극에 달했고 거의 대부분의 영의정이 죽거나 유배를 갔다. 그러나 당시의 혼란이 1인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2인자인 재상들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소속 당파의 입장에서 행동하며 당론만을 우선시했다. 자의건, 타의건 권력투쟁에 참전했다. 이것은 스스로의 운명까지 비극으로 만들었다. ‘지연과 학맥’, 그리고 업무과정에서의 친소관계를 토대로 한라인에 목매는 기업 2인자의 운명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의 행로에는 그가 가진 의지나 신념 외에도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생존여건 등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2인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2인자의 역할 자체가 1인자와의 관련성 속에서 정립되고, 그 임무는 조직의 내외적 환경을 감안하는 가운데 설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의 19대 임금 숙종의 치세는 2인자들에게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장희빈의 일화로 잘 알려져 있는 숙종은 조선왕조에서 두 번째로 긴 재위기간을 자랑한다.1  1674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이후 1720년 승하하기까지 그는 46년간 조선을 통치했는데 민생 안정과 상업의 발전이 빛이라면, 극단적인 권력투쟁과 정국의 혼란은 그림자였다. 특히 숙종이 주도한 환국은 상대당의 공존을 허용했던 이전까지의 붕당정치를 무너뜨리고, 상대의 절멸을 요구하는 일당 독재체제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돌발적으로, 그것도 오로지 국왕의 주관적인 독단에 의해 단행된 환국은 정치를 왜곡하고 국가에너지를 크게 소모시키게 된다.

 

이 시기, 국정의 2인자이면서 동시에 각 붕당의 대표였던 재상들은 원했든, 원치 않았든 당쟁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책임까지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는데 귀양을 가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잦았다. 영의정만 해도 허적(許積, 1610∼1680)과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사사됐고,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권대운(權大運, 1612∼1699)과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영의정이었을 때 각기 절도(絶島)와 북변(北邊)으로 위리안치됐다. 여성제(呂聖齊, 1625∼1691)와 유상운(柳尙運, 1636∼1707), 최석정(崔錫鼎, 1646∼1715) 역시 유배를 경험한다. 숙종대의 마지막 영의정이었던 김창집(金昌集, 1648∼1722)도 숙종 사후 2년 만에 유배지에서 사사됐다. 평탄하게 재임하고 물러난 영의정을 찾아보기 힘든, 가히영의정 수난시대라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숙종시대 영의정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예측 불가능한 1인자와 살얼음판 같은 정국 아래에서 이들 2인자가 걸어간 자취를 복기해봄으로써 2인자로서 환경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하는지 그 교훈을 찾아보고자 한다.

 

 

아들 관리의 실패, 허적

 

1680(숙종 6) 328, 숙종은 전격적으로 군부의 주요 수장을 교체했다. 남인의 대표적인 무신 유혁연을 퇴진시키고 숙종의 장인이자 서인의 핵심인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훈련대장에, 같은 서인인 신여철을 총융사에 임명한다. “! 재앙과 이변이 계속 일어나고, 불안한 의심이 생겨나며, 거짓말이 떠들썩하니, 궁궐을 지킬 장수는 국가와 지극히 친하고 직위가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날 숙종이 내린 비망기에는 당시 집권세력인 남인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다. 정국을 책임질 능력이 없는데다 심지어 남인이 정변을 일으킬지도 모를 의심스러운 상황이니 차제에 외척에게 군권을 주어 왕실을 보위토록 하겠다는 것이다. 숙종은 이어 조정을 서인 일색으로 전면 개편하는 환국을 단행한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경신환국)이 그것이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경신대출척의 발단은 소위유막사건때문이었다.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이 조부 허잠에게 시호가 내린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마침 이날 비가 내리자 비로 인해 잔치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한 임금은 특별히 왕실용 장막과 차일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미 허적의 집에서 그 물건들을 가져간 뒤였다. 임금의 물건을,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참람한 일로써 숙종은이는 한명회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이다라며 격노했다.2 이뿐만이 아니다. “(잔치에) 허적의 당파가 모두 모여 기세가 등등하다” “허적의 서자 허견이 잔치를 기회로 김석주, 김만기 등 서인 대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됐고, 이에 숙종은 남인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우선 남인이 가진 병권을 거둬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일화는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실록에서는허견(許堅)의 옥사가 남인의 몰락을 가져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허적의 서자 허견은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그는 청풍부원군의 첩과 다투다 폭력을 행사해 이빨을 부러뜨렸고3 다른 사람의 아내를 납치해 겁탈하기도 했다.4 이 두 사건은 모두 도성의 치안과 사법을 책임지는 한성부 좌윤 남구만의 고발로 공론화됐는데 숙종이 의금부에 명해 철저한 진상조사를 지시했지만 남인정권은 이를 덮어버렸다. 특히 앞의 사건의 경우 가해자 허견의 진술만 가지고 오히려 피해자 측에 죄가 있다고 규정하고, 고문 등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해 사건을 왜곡시켰다.5 뿐만 아니라 고발자인 남구만을 공격해 유배를 보냈다. 허견의 죄가 인정돼 처벌을 받게 되면 아버지인 허적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고, 이는 서인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게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허적의 은폐 지시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권대운과 오시수 등 남인의 주요 대신들이 모두 나선 것으로 볼 때 어떤 형태로든 개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허적과 남인정권이 보인 무리한 행태는 같은 남인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남인의 원로이자 판중추부사 허목은허적의 서자 허견은 하는 짓이 무도함에도 법을 맡은 자는 그것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구만의 상소로 일이 비로소 드러나기는 하였으나, 비호하고 덮어버려 오히려 남구만이 귀양을 가고 허견은 무사하니, 인심이 더욱 불쾌해 하고 있습니다6 라며 허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허목은 아들의 죄를 무마시킨 허적을 강력히 비판하고, 허적이 사사로운 욕심으로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공격했다. 이때 비록 숙종이 허목을 질책하고 허적을 두둔하긴 했지만 남인 내에서도 자식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허적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여론이 비등하게 된다. 하지만 허적은 아들 허견의 만행을 계속 묵인했고, 이는 결국 최악의 패착이 돼 돌아왔다. 허견이 복선군7 과 결탁하여 역모를 꾀한 것이다.

 

정원로의 고변으로 발각된 역모는 허견과 복선군 모두 순순히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봐서 사실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8 이들은 사병을 양성하고 체찰부(體察府)를 통해 군사를 동원하고자 했는데 나라의 군권을 총괄하는 체찰부는 남인 대신 윤휴의 주장에 따라 설치된 것으로 숙종 3년에 폐지됐지만 남인들의 주장에 따라 다시 설치됐다. 이 체찰부의 책임자인 도체찰사가 바로 영의정 허적으로, 이 점 때문에 체찰부와 관련된 남인 대신들도 역모혐의가 씌워졌다. 허견의 역모가 남인 정권을 몰락시킨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허적도 결국 사사되고 만다.

 

허적은 원래 경제 관료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김육이 화폐 유통에 관한 제도를 입안하겠다며 함께 논의할 인물로 허적을 지목할 정도였다.9 허적은 호조판서로서 김육의 대동법 추진을 뒷받침했고 현종 때는 좌의정으로서 경신대기근10 에 따른 국가재정 확보, 경제재건 작업을 지휘했다. 영의정이던 숙종 4년에는 상평통보의 시행을 주도한다.11 허적은 처신에도 탁월했는데, 그는 남인이면서도 서인 재상인 정태화, 송시열과 원만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오랜 기간 조정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런 허적이 아들로 인해 무너진 것이다.

 

 

물론 경신대출척과 남인의 몰락을 전적으로 허적이 아들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 남인의 과오, 정국의 변화와 임금의 판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적이 허견의 잘못된 행동을 엄하게 제어하고 훈육했다면 적어도 허견의 역모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환국이 벌어졌을지언정 허적 본인을 비롯해 남인의 주요 인사들이 몰살당하는 참화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가족, 그중에서도 특히 자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체면을 구기고, 심지어 본인의 생존마저 위협받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만 해도 중국에서는 고급 외제 승용차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낸 아들로부터 시작된 추문이 고위 관료인 아버지의 몰락을 가져왔고, 우리나라 모 항공사의 오너는 딸의 잘못으로 인해 명예가 실추되고 추진하던 사업이 무산되는 등의 위기를 겪었다. 이는 모두 자식이라는 사적 영역과 공적인 영역 사이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못한 탓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식은 그 자체로 리스크다. 신속하게 이 리스크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공적인 부분에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노론의 수호자, 김수항

 

허적이 사사되고 남인들이 축출된 뒤 그 빈자리는 서인으로 채워졌다. 이때 새로 영의정으로 임명된 이가 김수항이다.12 김수항은 김상헌의 손자로서 젊은 시절부터 곧은 기개와 단아한 품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런 그를 송시열은 사림의 종주로 추대한 바 있다.13

 

 

 

그런데 김수항은 영의정이 된 이후 자신이 속한 당파에 편향된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김수항은 세 가지 큰 절의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첫째, 남인의 역모를 미리 꺾어 세상의 올바른 도리를 지켜냈고, 둘째, 소론이 제멋대로 남인에게 아첨할 적에14 홀로 정도를 지킴으로써 비록 이로 인해 화를 당했지만(나중에 보복받지만) 후회하지 않았으며, 셋째, 스승 송시열을 배신한 윤증을 통렬하게 배척해 선비의 길을 밝히고 유학 발전에 도움을 줬다는 것이다.15 평가 자체의 옳고 그름은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김수항이 노론의 입장에 충실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노론의 수호자로서 남인과 싸우고, 소론의 잘못된 주장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지켰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그의 정적인 소론은 “(김수항은) 스스로 공정하다고 말하지만 사사로운 마음이 컸고” “송시열에게 마음을 바쳐 그의 말이면 어기는 것이 없었으며” “경신년 오시수의 죽음과 임술년 전익대의 옥사에서 크게 공평성을 잃었다고 평가

한다.16

 

실제로 김수항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온갖 정성스러운 예()를 다하여 송시열을 불러들이소서라고 말하는 등 임금이 송시열을 각별히 예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7  그는 나라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심지어 왕의 건강이 좋지 못할 때에도 그 해결책으로송시열을 다시 불러올 것을 청했다”.18  송시열이 임금의 비판을 받거나 상대당의 공격을 받을 때면, 그가 전면에 나서서 방어했다.19

 

오시수와 전익대 사건도 이러한 스탠스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것이다. 오시수(吳始壽, 1632∼1680)는 남인으로 우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접대를 담당했던 오시수는 사신이조선은 왕이 약하고 신하가 강성하다고 말했다며 이를 조정에 보고했는데, 훗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허위보고를 한 죄로 오시수를 체포했다. 겉으로는 왕을 능멸했다는 죄목이었지만 실상 신하가 강성하다는 말이 송시열을 지목한 것으로 보고, 송시열을 위협할 수 있는 싹을 제거하고자 옥사를 일으킨 것이다. 서인은 역관 등 다른 관련자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채 오시수를 죽였는데, 이는 같은 당파 안에서도 비판이 나왔을 만큼 무리한 조처였다. 이 과정을 총괄하며 주도한 것이 다름 아닌 김수항이다.

 

전익대 사건은 서인의 중진 김익훈의 사주를 받은 전익대가 남인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며 허위로 고변한 것을 말하는데, 그 과정에서 추잡한 모략이 있었음이 드러났고 김익훈은 서인 대간과 소장신료들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그런데 송시열이 김익훈을 옹호하고 나섰다. 스승 김장생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김수항도 송시열의 입장을 따라 김익훈의 편을 들었는데, 이로 인해 그에게도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이 사건이 바로 노론과 소론이 갈라지는 도화선이 된다.

 

 

이후 김수항은 기사환국이 일어나면서 유배됐고, 얼마 후 유배지인 전라남도 영암에서 사사됐다.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 대해 우의정 김덕원은우리 덕이(德而)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 말했다고 한다. 덕이는 오시수의 자로, 이 말은 곧 오시수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김수항을 죽이겠다는 뜻이었다.20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갈수록 격화됐던 정치 환경 속에서 이와 같은 김수항의 선택은 자신의 당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라 전체의 수상이 아닌 노론 당파의 수장으로 행동함으로써 그는 과오를 범했고 스스로를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빠트렸다. 임금에게는 편견을 버리고 넓게 포용하라고 요구하면서도 그 자신은 노론의 당론만이 진리라는 편향성을 보였다. 때문에 훗날 그가 복권되면서도수상으로서 조제(調劑)를 잘못한 죄가 있다는 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21

 

만일 2인자가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특정 집단에 편중된다면

조정자의 역할을 담당할 사람은

사라지고 구성원들 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될 것이다.

 

 

무릇 2인자는 공동체 안의 다양한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고 협력을 이끌어내야 하는 자리다. 실무적인 일을 담당하지 않는 대신 객관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으로 구성원들을 조화시키고 역량을 결집하는 데 힘써야 한다. 만일 2인자가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특정 집단에 편중된다면 조정자의 역할을 담당할 사람은 사라지고 구성원들 간의 갈등은 더욱 격화될 것이다. 역사적으로나, 김수항 본인으로나 매우 아쉬운 지점이다.

 

김수항이 퇴진한 이후 영의정에는 지난 연재에서 다룬 남구만을 거쳐 김수흥이 보임됐다. 김수흥은 김수항의 형으로 장희빈이 낳은 아들에게 원자의 명호를 주는 것을 반대했다가22 숙종의 노여움을 샀다. 숙종은 그가임금에게 말하면서 발끈하여 화를 냈고” “‘예로부터 임금의 무리들은이란 표현을 사용하였으니, 신하가 되어 임금에게 이와 같이 말한 것은 심히 교만하다며 파직시킨다.23 곧이어 남인이 재집권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면서 김수흥은 귀양을 갔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뒤이어 영의정이 된 여성제는 불과 일주일 만에 사임한다.24 그는 우의정 시절 숙종의 총애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던 동평군 이항을 탄핵했다가 남구만과 함께 함경도 변경지역으로 위리안치된 바 있었는데25 높은 명망으로 인해 남인 정권이 출범했음에도 영의정에 임명된 것이다. 사임 후 그는 판중추부사로서 남인들과 계속 충돌하다 결국 귀양을 떠났다. 유배에서는 금방 풀려났지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울분으로 죽는다.

 

남인 정권의 영의정이었던 권대운은 송시열을 사사하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일에 연루되면서 갑술환국과 함께 유배됐다. 이후 고령이라는 이유로 숙종의 특지에 의해 방귀전리(放歸田里)26 로 감형된다. 권대운이 88세의 나이로 죽자 숙종은그가 지은 죄는 무겁지만 청백(淸白)한 것은 숭상할 만하고 나라에 오랜 기간 복무했으므로직첩을 환급하도록 지시했는데 노론이 강력히 반발했지만 명을 철회하지 않았다.27

 

서인이 정권을 되찾은 갑술환국 이후 영의정은 소론인 남구만을 거쳐 역시 소론인 유상운에게 이어졌다. 유상운은 장희빈과 남인 등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견지했는데 이로 인해 노론의 비판을 받아 삭탈관직과 유배를 거듭해 겪었다. 뒤이은 소론 서문중(徐文重, 1634∼1709)은 노론과 소론으로부터 공히성실하고 행정실무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8 하지만 나이를 이유로 35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린 끝에 퇴임한다.

 

 

 

논란의 경세가, 최석정

 

다음으로 영의정이 된 최석정은 최명길의 손자이자 남구만의 제자로서 남구만의 뒤를 이어 소론의 영수가 됐다. 그는 관직 생활 내내 노론의 집중포화를 받아 부침을 겪는다. 송시열과 대립했던 윤증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데다29 윤증이 죽었을 때 지은 제문에서공언(空言)은 실천하지 못하였고 고론(高論)은 이룬 적이 없었다며 송시열을 격하시켰기 때문이다.30 남인을 처벌하는 문제에 있어서 온건론을 주장하고, 세자(훗날 경종)를 보호하기 위해 장희빈에 대해서도 은전을 베풀 것을 주장하는데 이 점도 노론의 반발을 산다.

 

또한 최석정은춘추의 법이란 중국도 오랑캐의 예를 사용하면 오랑캐가 되는 것이고, 오랑캐도 중국에 나아가면 중국이 되는 것이다. 이는 성인(聖人)의 공명정대한 마음이다라고 말한다.31 청나라의 중화질서를 인정하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그때까지도 명나라를 존숭하고, 청나라를 오랑캐라 여기며, 병자호란의 복수를 다짐하던 조선의 주류 유학자들에게 이는 매우 이단적인 태도였다.

 

이런 그였기 때문에 최석정은 항상 탄핵과 비난에 시달렸다. 심지어 나라를 팔아먹은 최명길의 손자라는 인신공격까지 가해졌다.32 그는 유배와 중도부처, 파직, 삭탈관직 등을 거듭해 겪게 되는데 조정 밖으로 완전히 내쳐지지는 않았다. 상대 당에서 그를원수처럼 미워하여 여러 번 거꾸러뜨림을 당하였지만, 임금의 총애는 끝내 쇠하지 아니하여 자리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번번이 다시 불러서 등용하였으니, 전후로 모두 아홉 번에 걸쳐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33 할 정도였다. 대체 그 힘은 무엇이었을까?

 

숙종에게 최석정은 꼭 필요한 경세가(經世家)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조판서 때 시폐(時弊) 10조목을 올렸는데, 당면한 과제들을 정확히 진단하고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34 좌의정 시절에는 관직제도, 인제선발 방식, 농지세 제도, 군사제도의 개선방안을 입안했고35 당시 많은 폐단을 낳고 있던 과거, 균전, 양역, 군역 제도의 개혁안을 도출했다.36

 

1698(숙종 24) 청나라로부터 구호곡식을 도입하는 일도 그가 나서서 진행한 것이다. 1695(숙종 21)에서 1699(숙종 25) 사이, 조선은 5년에 걸친 대기근을 겪었다. 이 기간 동안 최소 10만 명, 최대 5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되는데 숙종은 그 참담한 상황을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37 라고 묘사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청나라로부터 곡식을 사들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제기됐는데원한을 잊은 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구제를 구걸하여 우리의 약함을 보여줄 수 없다38 는 것이 신하들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최석정이 전면에 나서고 숙종이 결단을 내리면서 조선은 청나라에 구제곡식을 공식 요청했다. 청나라에서는 이부시랑을 파견해 무상 구휼미 1만 석과 교역할 쌀 2만 석을 전달해왔는데, 이 곡식이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의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다. 그런데 최석정은 이 일로 상을 받기는커녕 파직되고 문외출송에 처해졌다.39 오랑캐와 굴종적인 교섭을 한 책임이 지워진 것이다.

 

이처럼 최석정은 정치적 고난을 겪으면서도 국가와 백성을 위한 정책에 집중하며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며, 실현가능한 정책대안을 수립했기 때문에 숙종은 계속 그를 곁에 두며 중용한 것이다. 이후 최석정은 영의정으로 재임하다 숙종이 노론 위주로 정국을 재편하면서 물러난다. 퇴직의 사유는 다소 황당한데 1710(숙종 36) 정월, 숙종은어제 수라를 든 것이 그저께 든 것만 못하였는데, 근래 임금의 의약을 담당하는 신하들은 이를 전혀 걱정하지도 않는다며 최석정 등 약방제조 세 사람을 삭탈관작해 문외출송 시킨 것이다.40 이 조치는 금세 철회됐지만 이를 계기로 최석정은 조정의 일선에서 퇴진했다.

 

이상 최석정의 사례는 설령 극단적인 외부 환경과 마주하더라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보여준다. 1인자와 공동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한다면 그것이 곧 스스로를 지켜주는 든든한 보호막이 될 것이다.

 

이 밖에 숙종 조에서 영의정을 지낸 신완(申琓, 1646∼1707)은 노론과 소론으로부터 모두 인자한 성품을 지녔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특별한 자취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는 옥사를 잘못 처리한 죄로 영의정에서 파직됐다.41 서종태(徐宗泰, 1652∼1719)는 소론이지만 노론이 편찬한 <숙종실록>에서도 유독 폄하하는 내용이 없는 인물이었다. 당파를 내세우지 않고 노론 인물들과도 무난하게 지냈기 때문인데, 실록의 졸기처럼과격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엄격하여 청렴하고 검소했지만” “정승으로 일컬을 만한 업적은 없다.”42 이유(李濡, 1645∼1721)는 송시열의 문인으로 김창집, 이이명 등 노론의 핵심들과 절친했지만 당쟁에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그는 반대를 뚫고 북한산성을 수축하는 일을 지휘했고, 왜구 방어 등 국가 안보강화를 위해 주력했다. 당시 많은 폐단을 양산하고 있던 양역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노력했다.43 이여(?, 1645∼1728)는 노론이지만 소론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쟁이 나라에 화근을 가져다줄 것이라 걱정해 조정의 화합을 이끌어내고자 진력했다. 청렴하고 결백했으며 의연하고 기개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데44 당쟁이 극심해지자 지방에 은거하며 숙종이 비망기를 내리며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45

 

끝으로, 김수항의 아들이자 숙종의 마지막 영의정 김창집은 경종의 즉위 후에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총괄했다. 김창집은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는 등 왕위 후계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는데 이로 인해 반대파인 소론의 공격을 받아 삭탈관직됐고 반역을 도모했다는 목호룡의 무고를 받아 1722(경종 2) 유배지에서 사사됐다.

 

이상으로 숙종의 재위 기간 동안 영의정을 지낸 인물들을 모두 살펴봤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숙종의 시대는영의정 수난시대였다. 정치적으로 평탄했던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어서 삭탈관직과 유배가 필수였고, 위리안치와 사사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렇게 파국적인 양상을 띠게 된 것은 무엇보다 숙종에 의한 비정상적인 정국 운영 때문이었다. 한 당파를 모두 축출하고 이를 다시 한 당파로만 메꾸는 환국은 공존의 정치를 붕괴시켰고 복수의 복수를 불러왔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상대를 죽이는 참극을 낳게 했다. 하지만 이것이 임금만의 책임은 아니다. 2인자인 재상들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그들이 국가와 백성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소속 당파의 입장에서 행동하고 당론을 우선시했다. 자의건, 타의건 권력투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의 운명까지 비극적으로 만들었다.

 

 

숙종의 영의정들이 주는 교훈은 결국 2인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2인자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격한 자기 관리의 바탕 위에서 코디네이터로서 객관성과 균형을 잃지 않고, 사심 없이 갈등과 대립을 조정해야 한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해 1인자를 보좌하고, 공동체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헌신해야 한다. 물론 그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나 어렵고 혼탁할 수 있다. 잘못된 1인자를 만나고, 과격한 시대를 만나 좌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분을 잃지 않는 2인자는 적어도 헛되이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스스로를 권력싸움에 희생시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서두에서 인간의 행로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지만 방향을 정하고, 발걸음에 무게를 싣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다.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서로 다른 자취를 보여준 숙종의 영의정들이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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