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영조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재위기간을 가졌던 숙종의 시대는 ‘영의정 수난 시대’이기도 했다. 1인자인 왕이 주도하는 지속적인 환국 과정에서 당파 갈등은 극에 달했고 거의 대부분의 영의정이 죽거나 유배를 갔다. 그러나 당시의 혼란이 1인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2인자인 재상들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소속 당파의 입장에서 행동하며 당론만을 우선시했다. 자의건, 타의건 권력투쟁에 참전했다. 이것은 스스로의 운명까지 비극으로 만들었다. ‘지연과 학맥’, 그리고 업무과정에서의 친소관계를 토대로 한 ‘라인’에 목매는 기업 2인자의 운명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 ‘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의 행로에는 그가 가진 의지나 신념 외에도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생존여건 등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2인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2인자의 역할 자체가 1인자와의 관련성 속에서 정립되고, 그 임무는 조직의 내외적 환경을 감안하는 가운데 설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의 19대 임금 숙종의 치세는 2인자들에게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장희빈의 일화로 잘 알려져 있는 숙종은 조선왕조에서 두 번째로 긴 재위기간을 자랑한다.1 1674년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이후 1720년 승하하기까지 그는 46년간 조선을 통치했는데 민생 안정과 상업의 발전이 빛이라면, 극단적인 권력투쟁과 정국의 혼란은 그림자였다. 특히 숙종이 주도한 환국은 상대당의 공존을 허용했던 이전까지의 붕당정치를 무너뜨리고, 상대의 절멸을 요구하는 일당 독재체제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돌발적으로, 그것도 오로지 국왕의 주관적인 독단에 의해 단행된 환국은 정치를 왜곡하고 국가에너지를 크게 소모시키게 된다.
이 시기, 국정의 2인자이면서 동시에 각 붕당의 대표였던 재상들은 원했든, 원치 않았든 당쟁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책임까지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는데 귀양을 가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잦았다. 영의정만 해도 허적(許積, 1610∼1680)과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사사됐고,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은 유배지에서 죽었다. 권대운(權大運, 1612∼1699)과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영의정이었을 때 각기 절도(絶島)와 북변(北邊)으로 위리안치됐다. 여성제(呂聖齊, 1625∼1691)와 유상운(柳尙運, 1636∼1707), 최석정(崔錫鼎, 1646∼1715) 역시 유배를 경험한다. 숙종대의 마지막 영의정이었던 김창집(金昌集, 1648∼1722)도 숙종 사후 2년 만에 유배지에서 사사됐다. 평탄하게 재임하고 물러난 영의정을 찾아보기 힘든, 가히 ‘영의정 수난시대’라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숙종시대 영의정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예측 불가능한 1인자와 살얼음판 같은 정국 아래에서 이들 2인자가 걸어간 자취를 복기해봄으로써 2인자로서 환경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하는지 그 교훈을 찾아보고자 한다.
아들 관리의 실패, 허적
1680년(숙종 6년) 3월28일, 숙종은 전격적으로 군부의 주요 수장을 교체했다. 남인의 대표적인 무신 유혁연을 퇴진시키고 숙종의 장인이자 서인의 핵심인 광성부원군 김만기를 훈련대장에, 같은 서인인 신여철을 총융사에 임명한다. “아! 재앙과 이변이 계속 일어나고, 불안한 의심이 생겨나며, 거짓말이 떠들썩하니, 궁궐을 지킬 장수는 국가와 지극히 친하고 직위가 높은 사람으로 임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날 숙종이 내린 비망기에는 당시 집권세력인 남인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다. 정국을 책임질 능력이 없는데다 심지어 남인이 정변을 일으킬지도 모를 의심스러운 상황이니 차제에 외척에게 군권을 주어 왕실을 보위토록 하겠다는 것이다. 숙종은 이어 조정을 서인 일색으로 전면 개편하는 환국을 단행한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경신환국)이 그것이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경신대출척의 발단은 소위 ‘유막사건’ 때문이었다.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이 조부 허잠에게 시호가 내린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마침 이날 비가 내리자 비로 인해 잔치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한 임금은 특별히 왕실용 장막과 차일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미 허적의 집에서 그 물건들을 가져간 뒤였다. 임금의 물건을, 임금의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참람한 일로써 숙종은 “이는 한명회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이다”라며 격노했다.2 이뿐만이 아니다. “(잔치에) 허적의 당파가 모두 모여 기세가 등등하다” “허적의 서자 허견이 잔치를 기회로 김석주, 김만기 등 서인 대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됐고, 이에 숙종은 남인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우선 남인이 가진 병권을 거둬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일화는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실록에서는 ‘허견(許堅)의 옥사’가 남인의 몰락을 가져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질문, 답변, 연관 아티클 확인까지 한번에! 경제·경영 관련 질문은 AskBiz에게 물어보세요.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Click!
회원 가입만 해도, DBR 월정액 서비스 첫 달 무료!
15,000여 건의 DBR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이용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