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Article at a Glance – 인사, 인문학
재상 정태화는 효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부의 리스크 관리와 대응을 주도한 인물이다. 특히 신뢰관리와 운영 리스크 관리에 집중해 대비책을 수립하고 정책 오판을 막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먼저 상정하고 상황이 개선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그 시대가 조선 역사상 최악의 위기였음에도 이를 극복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정책이 본래 그 목적대로 훌륭하게 시행될 수 있도록 돕고, 그에 따른 리스크를 관리해 준 ‘지원자’였다. 업무성과를 평가할 때 사업부서에 비해 경영지원부서가 주목을 못 받듯 ‘지원자’는 ‘기획자’나 ‘실행자’의 그림자에 가려지기 쉽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든 최고의 리스크 관리자는 바로 이런 지원자 중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깨닫고 1인자는 그 2인자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2인자는 언제나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 ‘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정태화(鄭太和, 1602∼1673). 일반인뿐만 아니라 전공자에게도 그리 익숙한 인물은 아니다. 눈에 띄는 큰 업적을 세운 것도, 주목받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명재상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하지만 그가 역사에 드리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정태화는 8회에서 다뤘던 중종대의 정승 정광필의 5대손이다. 1649년, 48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오르기까지 그는 각 도의 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각조 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무공을 세워 비변사로부터 ‘유장(儒將) 4인’의 한명으로 선정됐으며1 전쟁 후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하며 명청(明淸) 세력 교체기의 외교·안보 업무에 깊이 관여한다.
정태화가 중진 관료로 활동하던 즈음 조선의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세자빈이 역적의 죄로 사사됐으며, 원손을 제치고 봉림대군이 세자가 됐다. 청나라에 대한 항복으로 정통성에 손상을 입은 인조는 끊임없이 신하들을 의심했고, 제 세력들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섣부르게 행동했다가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다.
정태화는 바로 이 기간 동안 대사헌, 형조판서와 같은 민감한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공손하고 신중하게 처신해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었던” 덕에 “시론이 뒤집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지위와 명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벼슬살이를 잘하는 자는 태화가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해관계를 따지며 이리저리 혐의를 잘 피했고 우유부단해 자기주장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
이후 정태화는 효종이 즉위하면서 좌의정이 됐고 효종 2년 12월7일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1673년(현종14) 심한 중풍으로 완전한 정계은퇴가 허락되기 전까지 그는 20여 년간 여섯 차례에 걸쳐 영의정으로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한다. 노년에 병치레가 심해 37번이나 연속으로 사직상소를 올린 적도 있지만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누워서 집무해도 좋다”3 며 사직서를 반려했고, 병세가 위중했을 때에만 부득이하게 영중추부사와 같은 명예직으로 잠시 이동시키곤 했다. “영상이 출사(出仕)했으니 매우 다행스럽다”4 는 현종의 말은 정태화에 대한 신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체 그의 어떠한 점 때문에 임금으로부터 이런 지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정태화가 영의정으로 활동하던 기간은 재난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관련 연구들에 따르면 17세기 전후는 소빙하기로 지구의 기온이 내려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해, 기근과 전염병이 만연했다. 전염병에 관한 실록의 기록 빈도를 보면 1651년에서 1750년까지 100년간 모두 208회로 다른 기간의 5배에 이를 정도다.5 특히 현종의 치세 동안은 거의 매년 재난과 기근이 발생했으며 역병과 우역(牛疫)이 창궐했다. 발생횟수 역시 압도적이다. 우리 역사상 최대의 대기근이라고 불리는 ‘경신대기근(1670년 경술년∼1671년 신해년)’도 바로 현종 11년과 12년에 걸쳐 일어났다. 경신대기근은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휩쓴 온갖 자연재해, 사상 초유의 식량 위기, 유례없는 전염병으로 대재앙이었다. 국가 재정이 고갈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돌고, 죽고, 도둑질을 하고, 살상을 하고 변란을 꿈꾸었다.”6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이 시대를 암흑기로 기억하지 않는다. 조선 최대의 개혁이라는 대동법이 태동했고, 민생안정을 위한 각종 시스템들이 구축됐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념과 사상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기도 했다. 국가적인 위기상황 앞에서 임금을 위시한 민관이 합심함으로써 위기가 역동적인 변화로 이어졌던 것이다. 정태화는 바로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재상으로서 정태화의 가장 큰 장점은 리스크를 관리한 데에 있다. 그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대처해 일을 그르친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데7 이러한 그의 능력은 백성 구휼 업무에서 빛을 발했다.
조선은 재난상황이 발생하면 안민(安民) 대책을 최우선으로 집행했다.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능동적으로 백성을 구휼했으며 상평창, 의창, 활인원, 혜민서의 기관을 설립해 백성들에게 의료(醫療), 곡식, 생필품 등을 제공했다. 조선과 같은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이와 같은 체계적인 구휼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유교적 도덕률 때문이었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임금,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폭군으로 불렸던 연산군조차 예외가 아니었다.8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기민(飢民)과 환자부터 먼저 확인하고, 주소지와 상관없이 구휼을 받을 수 있도록 하며, 관에서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담당자들의 엄격한 책임의식을 강조한 세종의 지침9 은 조선 구휼정책의 깊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데 이러한 정책들은 주로 문제가 발생하면 거기에 얼마나 신속하게 대처하느냐는 ‘위기관리’ 능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리스크를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노력은 부족했다. 정태화는 이 지점에서 차별성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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